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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12화 (12/40)
  • chapter 12

    #12

    “씨발…….”

    서범익은 시원한 얼음물을 마시고 싶을 정도로 속이 탔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두 남자가 손을 잡고 유학을 가는 상상이 떠나지 않았다. 어느새 머릿속으로 유준태를 해치는 음험한 상상을 했다.

    효원에게 접근하는 놈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효원이 저를 비아냥거리는 말을 꺼내자마자 얼굴이 굳어 버렸다. 그 순간 기분이 엄청 상했다. 그런데도 왜 기분이 상하는 것인지 몰랐다.

    마치 밤새 제 아래에서 신음을 지르던 원나잇 상대가 아침에 일어나 싫다고 했던 것보다 더 기분이 더러웠다.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자존심 상하는 건 처음이었다. 또한, 제 기분을 일부러 상하게 한 사람도 효원이 처음이었다.

    모두가 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집안에 속한 사용인뿐 아니라 친척, 친구까지… JK 그룹 차기 오너의 심기를 살폈다. 알파, 오메가, 베타를 떠나 모든 사람이 저를 우러러봤다. 그러나 효원의 경우는 완전 반대였다.

    서범익는 제 아랫도리를 쳐다봤다. 효원과 키스를 하는 사이에 아랫도리에 혈류가 몰렸다. 흥분한 제 몸을 보며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설마 난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동하는 몸이었던 걸까? 다른 남자에게는 1% 관심도 없는데? 왜 효원에게만…….

    ‘…뭐야? 이 증세는?’

    모르겠다.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지 판가름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를 좀 더 완벽하게 굴복시키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서범익은 효원을 멀리서 지켜봤다. 직접 그의 앞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그의 사진이 종종 메신저로 전송이 되었다.

    웃는 모습, 밥을 먹는 모습, 그림을 그리는 모습까지. 때론 동기들과 장난을 치는 모습도 모두 서범익의 휴대폰 속에 저장되었다.

    왜 이렇게까지 그의 사진을 모으는 것인지……. 정말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자꾸만 보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었지만, 호기심은 점점 소유욕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는 아버지가 따로 서범익을 불렀다.

    ‘효원에게 가드를 붙였냐?’

    ‘네.’

    ‘왜? 그는 계약 정부에 지나지 않아.’

    ‘계약 정부라고 해도 사생활이 문란한 건 볼 수 없죠.’

    ‘…그게 끝이냐?’

    ‘다른 뜻 없습니다. 그와 계약 관계가 있는 건 저니 제게 맡겨 주십시오.’

    아버지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난 너를 믿는다. 넌 JK 그룹을 이끌어갈 차기 오너야. 사적인 감정이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 명심해. 정부는 정부로 끝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당장 효원은 필요한 사람이었기에 서 회장도 더 이상 제 뜻을 막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쩌면 느꼈을지 모른다. 묘하게 한 사람에게만 신경 쓰는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서범익의 눈에는 소유욕이 타올랐다. 이것이 단순한 욕망인지, 호기심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다른 놈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두고 봐, 이효원. 그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길들여 줄 테니…….”

    * * *

    시간이 지나고 약속했던 워크숍을 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효원이 짐을 챙기는 소리에 잠에서 깬 이설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1박 2일? 너, 요즘 바쁘구나. 신났어.”

    “미안, 누나. 아버지 좀 부탁할게. 이제 공모전이 40일 남았어.”

    “그래, 가라 가. 나 오늘 약속 펑크 나서 집에서 뒹굴뒹굴할 생각이니까.”

    이설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직 가방이 없어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그 많은 가방 중에서 서범익이 사 준 가방이 사라진 건 모를 것이다.

    ‘아, 가방 돌려줘야 하는데…….’

    그 후로 서범익을 만나지 못했다. 효원은 날짜를 계산했다. 그의 러트사이클 예정일이 일요일이었다.

    ‘어쩌지? 1박 2일로 워크숍을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외박해야 하잖아?’

    효원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꼭 필요할 때만 부르는 가정 방문 간병인을 신청했다. 아버지가 온화해서 다행이었다. 폭력성이 없는 환자라 미리 신청하면 원하는 시간에 사람을 보내 주었다.

    “누나, 일요일에 간병인 신청했어.”

    “헐. 또 외박하시게요? 너 어디서 뭘 하는… 아, 맞다. 고액 아르바이트하지? 그래… 그래. 네가 벌어서 네 돈으로 하겠다는데, 알아서 해.”

    이설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효원은 냉장고에 국과 반찬을 하루하루 먹을 수 있게 나눠 놓고 가방을 들고 나왔다. 때마침 다른 차들이 효원의 집 앞으로 왔다.

    효원은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차로 뛰어갔다. 그 뒤를 은밀히 따르는 차가 있었지만,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차는 도심을 지나 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인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 리조트와 호텔이 보였는데 그곳 근처에 크고 작은 별장이 수두룩했다. 신이 난 남자들이 앞을 다퉈 뛰어나왔다.

    “우와! 멋져요, 교수님!”

    “오오.”

    “경치가 끝내주네요.”

    효원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터졌다. 자연을 만끽하며 창작하기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싱그러운 자연의 숲 냄새, 작은 폭포와 흐르는 시냇물… 나뭇잎은 아름다운 단풍이 되어 땅으로 수북이 떨어져 하늘과 땅이 온통 단풍길이었다. 이런 자유로운 숲은 늘 효원이 화폭에 담고 싶은 풍경이었다.

    “후…….”

    효원은 눈을 감고 힘껏 향기를 마셨다. 평소 효원은 자연과 벗이 되길 좋아했다. 푸르른 자연과 나무의 피톤치드 향을 맡으면 그보다 편안할 수 없었다. 봄이면 분홍빛을 머금은 진달래꽃이, 여름에는 향기가 짙은 라일락이, 가을이면 노랗게 물이 든 은행잎이 좋았다. 화폭에 담을 아름다운 경치는 효원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벌렁 땅에 누웠다. 효원도 그들 사이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고 하늘에서 눈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을 느꼈다. 은행잎이 꽃잎처럼 떨어진다.

    “편안해…….”

    우혁이 입을 열자 승주가 답을 했다.

    “침대 같다, 그치? 여기서 섹스해도 좋을 거 같아.”

    “미친 녀석.”

    “풉.”

    승주가 고개를 슬며시 돌려 효원을 바라봤다.

    “효원이, 느끼는 표정인데. 너 섹시해.”

    “선배. 농담은 나중에 하고, 우리 이 감성을 좀 더 느껴요.”

    효원의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바닥에 쌓인 낙엽이 마치 푹신푹신한 거위 털 침대와 같았다. 효원을 내내 괴롭히던 것이 단숨에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늘어져 있으니 모든 상념과 고민이 사라졌다. 서범익과의 키스도 지금 효원의 머릿속에서는 싹 지워졌다. 효원은 오직 자연과 함께했다.

    그때 손목이 욱신거렸다. 효원은 조금 인상을 찡그리며 왼팔을 하늘로 향하게 했다. 자연과 닮은 푸른색이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색이다. 좀처럼 낫지를 않아 병원에 갔는데 반 깁스를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날 단단히 손목이 삐끗했던 것 같았다. 아픈 줄도 모르고 무리를 한 것이 결국 탈이 나 버렸다.

    “공모전이 바로 코앞인데… 어쩌지?”

    “어떻게 넌 손 아픈 줄도 모르냐?”

    “그러게요. 바보인가 봐요.”

    “츳츳… 생긴 것과 달리 너무 맹해…….”

    그나마 인대가 살짝 늘어난 수준이라 일주일 정도만 무리하지 않는다면 풀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앞으로 40일 남은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건 문제없을 듯했다.

    그때, 왜 그는 키스를 한 걸까?

    그 후로 곰곰이 생각해도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일주일 내내 생각해도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아, 모르겠다.’

    지금은 온전히 공모전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고 두 팔을 늘어지게 뻗었다. 점차 차가운 바람이 효원의 뺨을 후려치고 스쳤다. 이윽고 저쪽에서 유준태가 학생들을 불렀다.

    다들 벌떡 일어나 차에서 자신들의 짐을 꺼냈다. 효원도 몸을 일으켜 짐을 어깨에 메려고 하자, 유준태가 다가와 효원의 짐을 들었다.

    “다쳤잖아? 내가 들어 줄게.”

    “고맙습니다, 교수님.”

    “그래.”

    술김에 고백했지만, 유준태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효원이 부담스러워할까 조심하는 듯했다. 고마웠다.

    그의 고백은 가난한 오메가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다. 매번 이설이 입에 달고 다녔던 부잣집 알파와 결혼하는 건 로또를 맞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선뜻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 결과가 뻔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를 떠나 둘의 집안은 너무도 많은 차이가 났다. 재벌과 가난한 집의 오메가… 그의 집에서 교제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효원은 JK 그룹의 서범익의 정부였다. 계약이 끝날 때까지야 비밀이 유지되겠지만, 유준태의 집안에서 마음먹고 뒤를 캔다면 돈을 받고 몸을 판 것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차피 이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효원은 못 올라갈 나무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 신데렐라가 될 마음도 없었다. 효원은 제힘으로 우뚝 서고 싶었다. 훌륭한 화가가 되어 반드시 성공해 아버지와 이설의 뒷바라지 하는 것이 꿈이고 목표였다.

    ‘내겐 꿈이 있어. 꼭 이뤄야 할 꿈… 다른 생각하지 말고 앞만 보자.’

    효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여러 색의 물감을 섞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늘한 바람과 자연의 향기는 효원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 * *

    서범익은 저녁이 되었을 때, 호텔에 도착했다. 룸으로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거칠게 걷었다. 날카로운 눈은 저 멀리 불이 켜진 한 별장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거리가 멀어 불빛만 보이지만, 마치 그곳에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때, 사진이 전송되었다. 서범익은 사진 속에 있는 효원을 바라봤다. 과 동기들과 워크숍을 간 효원은 그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힘겹게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니 속이 탔다.

    ‘일주일 반깁스를 해야 한답니다.’

    언제 다쳤는지… 그는 효원이 손목을 다친 줄도 몰랐다. 깁스를 한 손으로 열심히 작업하는 것을 보니 속이 뒤집혔다.

    범익은 효원의 뒤를 붙여 놓은 경호원에게서 목적지를 들었고, 퇴근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 별장에서 유준태와 함께 자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효원에게 연락해.”

    “네, 사장님.”

    남 비서가 효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내 그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왜? 그래?”

    “…휴대폰을 꺼 놨습니다.”

    순간, 서범익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전화를 꺼 뒀다고? 이렇다 말도 없이 워크숍을 간 것도 모자라 전화까지 껐다는 건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았다. 좀 전에 속이 탔던 것과 다른 의미로 열불이 솟구쳤다.

    그렇게 말했는데… 유준태가 어떤 놈인지 단단히 경고했음에도 제 말을 무시한 건 기분이 나빴다. 서범익은 담배를 빼 입에 물었다. 서범익은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담배 특유의 텁텁한 맛이 입이 아닌 배 속에서 울컥울컥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러트사이클이 올 때까지 생각해 보세요.’

    ‘내가 왜, 너에게 키스를 했는지 알면 나도 이렇게 답답하지 않지…….’

    다른 건 몰라도 확실한 건, 다른 놈들과 시시덕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서범익은 마지막으로 전송된 사진을 보며 휴대폰을 거칠게 내려놨다.

    화면이 꺼지지 않은 메신저에는 유준태가 고기쌈을 싸서 효원에게 먹이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서범익은 찡그린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재킷을 걸쳐 입었다.

    “가야겠어.”

    “사, 사장님? 지금 어디로…….”

    “저 녀석이 늑대가 우글거리는 곳에 자게 할 수 없어.”

    남 비서가 서둘러 서범익을 말리려고 했으니, 이미 그는 빠르게 방을 벗어난 상태였다. 그의 경호원과 남 비서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뒤를 따라가야지! 지금 사장님 눈에 뵈는 게 없어. 빨리!”

    * * *

    밤이 깊어질수록 별빛은 더욱더 빛났다. 칠흑 같은 하늘에는 별빛만이 가득했다. 저녁에는 야외 바비큐를 먹고 술도 한잔 마셨다. 그동안 적적했던 마음은 오랜만의 여유로 한껏 좋아졌다.

    실컷 먹고 마신 사람들이 하나둘 별장으로 들어가고 남은 사람은 유준태와 가장 친한 선배들이었다.

    효원은 술에 취해 실실 웃는 승주를 바라봤다. 승주는 우혁의 어깨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았다. 불 앞에 있는데도 추운지 으슬으슬 떨자 우혁이 승주를 꼭 안았다.

    그때, 효원과 우혁의 눈이 마주쳤다. 우혁은 효원의 눈치를 보며 승주를 떼어 내려고 했으나, 승주는 더욱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지금껏 몰랐는데… 설마… 승주 선배가?

    승주가 우혁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혁의 품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니 저까지 기분이 좋았다.

    “그런 거 아니야. 우린 친구야.”

    “아뇨, 잘 어울려요.”

    우혁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자 옆에 마주 앉은 유준태가 한마디 더 보탰다.

    “너희 둘, 불알친구라 서로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막상 서로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다면 생각이 다를 걸?”

    “교, 교수님! 우린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때, 승주의 옆에 앉아 있던 선배가 승주의 뺨을 만졌다. 그러자 우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탁, 하고 손을 쳐 내는데 꽤 소리가 컸다. 손등을 맞은 선배가 웃었다.

    “이것 봐, 완전 경계하는 거. 그러면서 꼭 아니라고 해요. 아무튼 쯧쯧… 계속 이러면 너희 둘은 평생 친구일 걸?”

    “난 그저 승주 어머니의 부탁을 받은 거야. 얘 술 취하면 똥오줌 못 가리니까. 히트사이클일 땐 더더욱 조심해야 해서.”

    “에이, 공주님 모시는 듯 모시는 걸 보면 아닌데? 너 같은 강철 가드가 있으니까 다행이지. 아, 그러고 보니 누구더라? ** 기업 아들도 실수로 임신했다던데… 배가 부를 때까지 숨기다가 들켜서 꼼짝없이 결혼하게 생겼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과 해야 해.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져야 하고.”

    우혁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가 저런 말을 하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우혁은 알파였으나, 승주보다 집안이 기울었다. 우혁의 아버지는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승주 아버지가 운영하는 기업 수주로 먹고살았다.

    대기업의 아들과 그 기업의 수주처 아들. 오래된 친구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껏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은 건 혹시라도 승주에게 손을 댔다가 아버지 사업에 영향을 끼칠까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우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바라만 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속으로 그를 사랑하면서도 정작 당사자 앞에서 친구의 선을 넘지 않는 그의 속사정을 누가 알까? 아마도 저 표정은 승주에게 한 번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혁은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승주를 바라봤다.

    그는 술을 한잔 들이켜더니 효원에게 뜻 모를 이야기했다.

    “사람이니,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어. 그러나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돌아서는 것이 상처받지 않는 거야.”

    “…그렇죠.”

    속이 뜨끔했다. 우혁이 말하는 이야기가 꼭 저를 두고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잘못된 것을 알았을 때 돌아서라…….

    자신도 그럴 마음이었다. 애초에 사랑이 없으니 돌아서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 가슴 한쪽에 있는 이 허전함은 무엇으로 채울까?

    유준태가 효원에게 술을 따랐다. 효원은 그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준 술잔을 입에 털 때, 갑자기 주위가 술렁거렸다. 뭐지? 효원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저, 저 사람… 혹시, 서범익? 맞지?”

    “어어? 어라? 맞아! JK 그룹 서범익 대표! 헉, 끝내주게 미남이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서범익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오는데 마치 모델이 걸어오는 것 같았다. 훤칠한 미남의 등장에 바비큐장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반대로 효원은 입이 딱 얼어붙어 버렸다. 머릿속이 까맣게 변했다.

    왜?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보다, 지금 우리 조심해야 할 시기 아니야?

    그는 곧장 효원에게로 다가왔다. 효원의 손에서 잔을 뺏더니 탁자 위에 탁 올려놨다. 효원은 펄쩍 놀라 눈을 돌렸다. 다들 효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잠에서 깬 승주도 효원과 서범익을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해!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효원은 다시 시선을 서범익에게 돌렸다. 입 안이 바짝 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 유준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범익을 보며 적대적인 표정을 지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은 거절인데. 돌아가 줬으면 좋겠군?”

    “초대받지 않았지만, 제 의뢰인이 전화를 꺼 둬서 찾으러 왔죠.”

    서범익은 유준태를 노려봤다. 범익의 말에 유준태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의뢰인? 무슨 의뢰인?”

    “오늘은 그림을 그리는 날입니다.”

    “그림?”

    “초상화를 의뢰했거든요. 매주 한 번씩 집으로 와 그림을 그리는데 오늘은 말도 없이 튀었더군요. 마침, 근처에 볼일이 있어 강원도로 왔는데.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 바쁘신 분이 직접 의뢰인을 찾아올 정도로 중요한 그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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