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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8화 (8/40)
  • chapter 8

    #08

    엄마가 병으로 죽고 남은 건 빚뿐인 집에서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간호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이설은 힘든 일을 하면 종종 코피를 쏟았기 때문에 늘 힘든 일은 효원이 도맡았다. 고작 열다섯 살의 나이에 편의점 알바를 해 생활비를 벌었고, 밤에는 짬을 내 그림을 그렸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공모전 시즌이 되면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추운 겨울날 도시가스 요금이 많이 나올까 걱정이 되어 아버지와 이설 방에만 보일러를 가동하고 제 방은 돌리지 않아 그의 방은 늘 냉골이었다.

    영하 12도 혹한에도 차디찬 냉골 방은 효원의 자리였다. 손이 얼어붙어 붓을 잡는 것조차 어려워도 입김으로 손을 녹이며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려 낸 작품이 하나둘 주목을 받았지만,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부잣집 아이들과 경쟁에 밀리곤 했다.

    간혹, 제 작품보다 못한 작품이 대상부터 최우상까지 휩쓸기도 했다. 그땐 몰랐으나 대학에 들어오게 된 후 알게 되었다. 지금껏 제 실력이 모자라 대상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속이 까맣게 탔다. 돈으로 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한국에서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등할 수 없다면 외국으로 나가야 했다. 그곳에서 오직 실력으로 평가를 받고 싶었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내 아들… 엄마는 믿어…….’

    ‘엄마…….’

    그리운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 땐 저도 어쩔 수 없는 아이가 되었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에게 그녀의 빈자리는 무척이나 컸다. 어린 효원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괴로웠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은 건, 어머니의 꿈, 아버지의 희망이 바로 저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꿋꿋하게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걱정 마, 엄마. 난 꼭 화가가 될 거니까.’

    불현듯 잠결에 누군가 머리카락을 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은 고단한 몸을 풀어 주는 것 같았다. 커다란 손이 마치 엄마의 손길처럼 느껴졌기에 효원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상대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얼굴을 비비려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효원은 뺨은 단단한 허벅지에 놓여 있었다.

    “헉! 죄, 죄송해요!”

    효원은 자신이 누구의 허벅다리를 베고 있는지 깨닫고 기겁을 했다. 고개를 들자마자 서범익의 얼굴이 보였다. 효원은 그의 허벅지에 누워 꿀잠을 잤다는 것이 너무도 민망했다. 그러나 서범익은 잠들기 전과 달랐다.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입술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 왔어. 저 집인가?”

    “벌써요? 네, 맞아요.”

    밤 10시, 임대아파트와 어울리지 않은 롤스로이스를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몹시도 궁금한 것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쳐다보는 사람도 보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가 싶었는데, 하필 일일 장터가 열리는 날이었다. 곳곳에 포장을 치고 장사를 하는 차가 보였다.

    “저기, 좀 더 떨어진 곳에서 차를 세워 주세요.”

    “그러지.”

    차가 다시 움직이자 사람들의 시선도 멀어졌다. 차는 효원의 아파트와 떨어진 민영아파트 단지에 세워졌다. 동네 위치는 비슷하지만 민영아파트가 비싼 아파트라 그런지 간간이 수입차가 보이니 롤스로이스라도 덜 주목을 받았다.

    하긴, 이설도 페라리를 타고 다니는데…….

    효원은 서범익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차에서 내렸다.

    “다음에 뵐게요.”

    “…….”

    그는 효원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열었으나, 다시 굳게 닫았다. 서범익은 효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눈을 감고 좌석에 등을 기댔다. 효원은 문을 닫고 차에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았다. 그때, 뒤에서 남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효원 씨, 잠깐만요.”

    “네?”

    효원이 뒤를 돌아보자 그가 트렁크에서 커다란 쇼핑백을 꺼내 품에 와락 안겨 주자 그는 얼떨떨해 멍하게 되물었다.

    “학교 다닐 때 가지고 다니시라고 합니다.”

    “네? 그게… 무슨?”

    “선물이라네요.”

    “에? 남, 남 비서님? 이런 건 계약에…….”

    남 비서는 효원에게 선물을 안기고 쌩하니 차를 탔다. 차는 그대로 효원의 앞에서 사라졌다. 효원은 바보처럼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제 품에 안긴 쇼핑백을 보고 꽥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명품을 몰라도 이 포장지가 명품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C사의 가방이라면 800백만 원을 호가할 텐데… 비슷한 모양의 가방을 과대가 가지고 있었기에 손이 벌벌 떨렸다.

    ‘이렇게 비싼 선물은 부담스러운데… 어쩌지?’

    효원은 다시 돌려줄 마음이었다. 어르신이 특별히 효원에게 했던 말도 있는데, 이렇게 선물을 덥석 받을 수 없었다.

    효원은 정부 이외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회장은 후원하는 것 외에 다른 선물을 받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효원은 혹시라도 쇼핑백이 더러워질까 소중히 안았다.

    그때, 저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설이었다. 페라리를 빼앗겼는지 그녀는 작은 소형차를 멀리에 세워 놓고 소속사로 출근했다.

    “너, 옷이 그게 뭐야? 누구 옷을 입었어?”

    “어, 누… 누나. 아는 선배가 빌려줬어.”

    “어딜 갔다 온 거야? 그거 뭐야. C사! 오오!”

    “누, 누나!”

    이설의 눈이 반짝이더니 용케도 효원이 들고 있는 쇼핑백을 알아봤다. 이설은 효원의 품에서 쇼핑백을 뺏더니 그 속의 물건을 확인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거. 엄청 비싼데 어디서 났어! 응? 누가 사 줬어?”

    “어… 어어어? 그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5억의 빚은 지인에게 빌려 갚았다고 했지만, 선물까지 받았다면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효원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이설이 대박을 외쳤다.

    “맞다! 네 주위에 부잣집 알파들이 많지? 너 혹시 누구 사귀니?”

    “아니.”

    “에이, 아니긴 뭐가 아니야? 누구야? 어떤 여자야? 아니면, 남자니?”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냥 교, 교수님이 줬어.”

    “교수? 유준태 교수님? 그 교수가 왜?”

    “알잖아. 교수님이 나 특별히 챙기는 거, 선물을 받았는데 자기하고 어울리지 않는 가방이라 나에게 준 거야. 돌려줘야 하니까. 이리 줘.”

    “미쳤어? 줬던 선물을 왜 돌려줘?”

    “누나!”

    “한 번 준 선물은 되돌려 주면 실례야. 정 네가 싫다면 내가 가진다.”

    이설은 혀를 길게 빼더니 집 방향으로 뛰어갔다. 효원이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달라고 했으나, 그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방 태그를 떼어 버렸다. 효원은 깜짝 놀랐다.

    “누나에게 안 어울리잖아! 백팩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리 줘!”

    “내가 없어서 안 가지고 다녔지. 요즘 백팩은 정장에 메도 예쁘거든? 고마워! 잘 쓸게. 너희 교수님께 비밀로 할 테니까 걱정 마!”

    “누나! 누나! 야! 이설!”

    아무리 그녀의 이름을 불러도 이설은 앞을 보고 질주했다. 어떻게 힐을 신고 저렇게 빨리 달리는지… 결국 숨이 차 멈춘 건 효원이었다. 효원은 울상을 지었다. 당장 저 가방을 안 가지고 다니면 서범익이 서운해 할 텐데… 팔아먹었다고 오해하면 어쩌지? 돈 때문에 몸을 파는 정부에게 돈이 되는 물건을 준 건 그가 어떻게 하나 떠보는 것일 수도 있는데…….

    효원은 물건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설이 잠든 사이 가방을 몰래 가져가 학교 사물함에 넣어 둔 후, 서범익을 만날 때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효원은 머리를 헝클었다. 좋았던 기분이 일시에 날아가 버렸다.

    * * *

    월요일이 되었다. 효원은 새벽에 이설의 방에서 명품 가방을 가지고 와 학교 캐비닛에 숨겼다. 그리고 클럽에 두고 온 제 가방을 찾기 위해 교수실로 걸어갔다. 그의 강의는 2시였으나, 부지런한 그는 오전에 출근했을 게 분명했기에 학교에 오자마자 바로 교수실로 향했다.

    복도가 썰렁했다. 그의 교수실은 4층 건물의 끝으로 매우 외진 곳이었다. 평소에도 복도에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고, 교수들도 자기들 방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 한적했다.

    효원은 교수실 앞에서 마른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가볍게 노크를 한 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삐걱, 작은 마찰음이 생겼다. 딱딱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두운 곳에 시야가 막혔다. 암막 커튼을 쳐 놨던지라 오전인데도 어두웠다.

    “교수님?”

    미대 교수실답게 이곳저곳 그의 작품들이 세워져 있었다. 교수실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개인 작업실 같은 곳이기에 정리되지 않은 곳이 보였다.

    ‘어디 계시지?’

    그의 교수실은 두 개의 방을 합친 곳이었다. 문을 열면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효원은 그 앞에서 문을 두드리려다 멈칫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신음 소리가 같았다.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혼자가 아닌가? 이렇게 이른 아침이라면 학생일 텐데…….’

    나중에 다시 올까 하고 돌아서려다 멈칫했다. 안쪽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일은 효원은 히트사이클이라 평소보다 더 페로몬에 민감해 그의 기운이 느껴졌다.

    잠깐… 지금 교수님 러트사이클인가?

    하필 유준태의 러트사이클이었나 보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손바닥에서는 절로 땀이 솟았다.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효원은 서둘러 교수실 밖으로 나갈려고 했는데 안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알파의 페로몬이 확 풍겨 왔다. 동시에 오메가 페로몬도 느껴졌다.

    곧이어 안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효원은 예쁘장한 여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마주칠 줄 몰랐던 효원은 헉, 외마디를 질렀다.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 러트사이클이 온 남자와 오메가 여자가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 상상이 되었다.

    놀란 건 유준태도 마찬가지였다. 유준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일찍 왔네. 가방은 이따 강의실에서 줘도 됐는데.”

    “죄송해요. 나중에 올…….”

    그녀는 유준태와 효원을 번갈아 보더니 호호 웃었다.

    “어머~ 교수님, 저를 기다린 것 아니었나요? 뭐, 상관없어요. 저도 마침 필요했으니까요. 그럼, 교수님 다음에 봬요.”

    여자는 유준태에게 애교를 부리며 웃더니 교수실을 나갔다. 그러자 그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유준태는 효원 앞에서 부끄러워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순진해 보이기도 했고, 다른 알파들과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들었다고 해도 러트사이클이시잖아요. 비난할 사람은 없어요.”

    “고마워.”

    “다른 알파들도 모두 그런걸요.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효원은 쿨하게 넘겼다.

    “베타라 이해 못할 거라 생각했어. 사랑이 없는 섹스는… 좀 그렇잖아? 발정 난 개처럼 보이기도 하고.”

    “베타들도 호감이 가는 상대와 원나잇 해요. 그리고 러트사이클에 억제제를 먹지 않으면 힘들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요.”

    효원은 밝은 미소로 답을 했다. 그러자 유준태의 눈을 휘둥그레졌다. 그가 갑자기 효원의 손목을 잡았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러트사이클이라는 거? 억제제를 먹어서 기운이 약할 텐데…….”

    “아…….”

    효원은 흠칫했다. 그의 말투가 상당히 빨랐다.

    ‘어떻게 하지?’

    효원은 순간 자신의 입을 꿰매고 싶었다. 효원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자 유준태는 손을 놔주었다.

    “하긴, 우리 과 녀석들이 떠벌렸겠지. 괜찮아. 뭐, 이미 다 소문 돌았을 테니.”

    “네… 네!”

    그런 소문이 도나? 하긴, 알파나 오메가들은 러트사이클을 짐작할 수 있으니까…….

    다행이었다. 위기를 넘겼다. 유준태가 안에서 효원의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아, 맞다. 잊어버릴 뻔했네. 너에게 주고 싶은 게 있는데. 자, 이거 받아.”

    유준태가 효원에게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열었더니 그곳에서 초대장이 나왔다. 초대장은 한 기업에서 주최하는 파티였다. 아마도 그들만의 사교계 파티 중 하나로 보였다. 그런데 장소가 지난번 서범익과 첫날밤을 보낸 호텔이었다. 서범익을 떠올리자 알 수 없는 열기가 몸속에서 맴돌았다.

    “그런데. 이걸 왜 저에게 주는 거예요?”

    “너와 가려고. 파트너가 필요하거든.”

    “네? 파, 파트너요?”

    “아, 조금 거슬리는 말인가? 사실 친구가 필요해. 원래 안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꼭 참석하라고 하셔셔 갑자기 파트너를 구하기 힘들어졌어.”

    파트너라면 좀 전에 나간 예쁜 여자도 있지 않은가? 굳이 저와 함께 가겠다는 저의를 모르겠다. 효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티에 최동혁 화백도 오실 거야.”

    “네? 지. 지금 누구라고 했어요? 최, 최동혁 화백님요?!”

    화백의 이름에 효원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길로 유준태를 바라봤다. 최동혁 화백은 젊은 나이로 프랑스 파리 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전시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화백이었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접목해 한국 고유 전통의 아름다움을 승격시키고, 동시에 서양화의 매력도 첨가해 그야말로 신의 손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주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한국에 들어오는 건 1년에 한 번도 안 될 만큼 바쁜 화백이었다. 국내 미술계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진 화백은 화가 지망생이라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너 놀랄 줄 알았어. 나도 그 화백이 온다고 하기에 인사도 드릴 겸 가려는 거야. 예전에 몇 번 봤지만 거의 10년 만에 뵙는 선생님이거든. 어때? 내가 소개해 줄 수 있는데.”

    “좋, 좋아요! 물론이죠! 갈게요. 교수님! 정말 뵙고 싶었어요.”

    효원은 가슴이 떨렸다. 덥석 유준태의 파트너가 되기로 약속했다. 효원은 초대장을 가방에 넣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강의실로 향하다 중간쯤 발길을 멈추었다. 갑자기 근육이 경직되었다. 초대장에 찍힌 날짜가 내일이라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젠장… 어쩌지? 하필! 왜! 히트사이클이야?’

    효원은 손으로 목덜미를 더듬거렸다.

    ‘어떻게 하지?’

    화백을 꼭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든 인맥을 터야 하는데… 갑갑함에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다.

    ‘약을… 두 배로 먹여야 하나? 그럼 속이 울렁거릴 텐데…….’

    억제제를 두 배로 먹는 방법이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위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과다복용을 하면 메스꺼움을 동반한 복통과 구역질이 동반되고는 했다. 고등학교 때에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때, 두 배로 복용했던 날이 여럿 있었다. 그때마다 어지럽고 울렁거려 밥도 못 먹고 비틀거리기도 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여기서 포기할 수 없어. 그래, 가자. 잠깐 인사만 나누고 빠져나가면 되니까…….’

    효원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깨를 쫙 폈다. 그리고 내일 참석할 파티를 생각하며 강의실로 걸어갔다.

    * * *

    화요일 오후 5시 파티였다. 효원은 유준태가 빌려준 정장을 꺼냈다. 그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또다시 그가 빌려준 정장을 입게 되었다. 옷이 없으니 할 수 없지만…….

    효원은 약통을 열어 억제제 두 알을 입에 넣고 삼켰다. 아마 두세 시간 정도는 부작용 증세가 없을 것이다. 그 사이에 화백과 인사를 나누고 파티를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효원은 특별히 외모에 신경을 썼다. 평소에는 바르지 않던 스킨로션을 바르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남자들의 액세서리는 없지만, 나비 모양의 타이를 매니 그래도 꽤 봐줄 만했다. 갈색 머리카락과 연한 갈색 눈동자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피가 섞인 듯한 매력이 있었다. 늘 선배들이 게임 속에서 튀어나온 캐릭터 같다고 했는데, 이렇게 꾸미고 보니 확실히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서범익의 외모에 비하면 평범한 것도 같다.

    효원은 준비를 마치고 아버지의 식사를 차리고 집을 나섰다. 따로 걸쳐 입을 코트가 없었기에 슈트 차림으로 나왔더니 바람이 썰렁했다. 효원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저쪽에서 유준태의 차가 보였다. 효원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깜짝 놀라며 운전석에서 내렸다.

    “추운데 집에서 기다리지 뭐하러 나왔어? 아… 코트, 이런. 내가 거기까지 생각 못 했네… 자, 내 코트 입어.”

    그가 자신의 코트를 벗어 주려고 하자 효원은 격하게 손을 휘저었다. 썰렁하긴 했지만, 참을 만했다.

    “저 열 많아요. 교수님 입으세요. 그리고 그 코트는 길어서 저와 안 맞아요. 애가 아빠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일걸요?”

    “그… 그런가?”

    “전 괜찮아요. 호텔 금방이잖아요.”

    “그래. 어서 가자.”

    효원은 씽긋 웃으며 유준태의 차에 탔다. 차는 곧바로 호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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