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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3화 (3/40)
  • chapter 3

    #03

    회장은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워 줬다. 그런 회장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효원은 푹신한 가죽 소파에 앉아 있어도 바늘방석처럼 느껴졌다.

    효원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계약서를 쳐다봤다. 테스트를 통과하면 계약금 5억 지급. 이 돈이면 누나의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계약 기간이 끝나고 추가 지급되는 5억이라면 앞으로 아버지의 치료비를 걱정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해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10억이라는 큰돈을 선뜻 제시할 정도라면 서범익의 문제가 꽤 크다는 뜻이었다. 회장에게는 입이 무거운 오메가가 필요하고, 자신은 돈이 필요하다. 운명적인 적기였다.

    넓은 응접실에는 효원 혼자뿐이라 적막했다. 계약을 고민하기에 좋은 분위기였지만 효원에겐 압박으로 다가왔다.

    압박감 때문인지 갑자기 요의가 느껴졌다. 효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화장실을 찾았다.

    “도대체 화장실이 어디야?”

    저택이 워낙 넓고, 방도 많아 무턱대고 아무 방문이나 열 수는 없었다. 효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지나가는 사용인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효원은 별생각 없이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곳으로 걸어가던 효원의 발이 우뚝 멈췄다.

    “아!”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누군가 슈트를 입은 채 샤워기 앞에서 물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아 쥔 두 손을 벽에 기댄 채였다.

    쏟아지는 물이 차가운 물임에도 그의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슈트를 입었지만 물에 젖어 확연하게 드러나는 단단한 몸이 상당히 섹시했다.

    효원은 마치 넋이 나간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때, 그에게서 등골이 얼어붙을 만큼 강한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콧속을 파고드는 그의 페로몬은 온몸이 떨릴 만큼 자극적이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거 보니 그는 알파가 분명했다.

    잠시 보인 그의 얼굴을 본 효원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서… 서범익?!’

    그가 누구인지 깨달은 효원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지금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며 뒤로 돌아서 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팔목이 잡히더니 효원의 몸이 욕실로 끌려들어 갔다.

    “으악!”

    놀란 마음에 소리를 질렀으나 자신을 붙든 이를 본 효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의 눈을 본 순간, 효원의 시선은 그에게 사로잡혔다.

    10년 만에 본 서범익은 완전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에 본 귀여운 아이가 아니라 매혹적인 페로몬을 풍기는 섹시한 알파가 되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턱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까지 섹시해 보였다.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와 오뚝한 콧날, 갸름한 턱선, 얇은 입술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전체적으로 얼굴선이 곱고 아름다웠다.

    떡 벌어진 어깨와 단단해 보이는 몸매는 슈트 속에 숨겨진 근육을 가늠케 했다. 필시 탄력 있는 근육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 같았다.

    “넌 누구지?”

    그가 입을 열자 매혹적인 페로몬이 더욱 흘러나왔다. 효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입술을 빨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그의 페로몬에 흥분한 것 같았다.

    효원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군데 허락도 없이 3층으로 올라온 거냐고 물었어.”

    “그, 그게…….”

    묵직한 처음의 목소리가 효원을 더 움츠리게 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효원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성인이 된 그의 첫인상은 굉장히 무섭고 차가웠다.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움이 서려 있었다. 그럼에도 눈빛은 효원을 물어뜯을 듯 살벌했다. 그런 그에게 효원은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앞으로 당신의 섹스 파트너가 될지도 모르는 오메가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10년 전 당신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꼬맹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당신에게 입술을 처음으로 빼앗겼던 남자라고 해야 할까?

    효원은 갑작스러운 만남에 정신이 없었다. 머릿속도 뒤죽박죽이 되어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도 한몫했다. 아무래도 그의 러트사이클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효원은 물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이 뺨에 이리저리 흩어진 것이 거슬렸다. 아름다운 예술작품에 선이 아무렇게나 그어진 것처럼 보였기에 스르륵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효원의 행동에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세워졌다. 그러더니 자신의 몸을 효원에게 바짝 붙여 왔다. 그에 효원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몸에 한껏 오른 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남자 오메가를 산다고 하더니… 너였냐? 하… 이건…….”

    “…….”

    그의 열기와 페로몬 향기에 효원의 머릿속은 음란한 상상에 젖어 들었다. 성 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그의 허리에 올라타 음탕하게 허리를 흔드는 생각을 했다.

    효원은 그 상상을 떨치려 정신없이 머리를 털었다. 제 의지와 달리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 처음이었던지라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침착하려는 머리와 달리 몸이 슬슬 반응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안 돼! 지금 이 상황에는 곤란하다고…….’

    그러나 제 의지와 달리 효원의 페니스가 조금씩 기립했다. 그것을 모를 서범익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곧이어 서범익의 입술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그는 효원을 마치 창부라도 되는 듯 바라봤다.

    “왜, 꼴려? 하긴, 안 꼴리면 오메가가 아니겠지. 하지만 난 아무리 급해도 남자를 안을 마음은 없어. 여자 오메가도 모자라 이제 남자 오메가까지……? 아니다. 아무튼, 꺼져. 남자는 필요 없으니까.”

    “…잘 아시네요. 하지만 제 의지가 아니에요.”

    “그래? 그렇다고 쳐주지. 하지만 너. 계약 따윈 하지 마. 난 너를 찾는 일은 없을 테니까.”

    “글쎄요. 어떻게 될지 저도 알 수 없어요. 아직 계약서에 사인은 안 했지만… 저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니 거절할 수 없는 건 사실이에요.”

    서범익은 효원을 차갑게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끔찍한 괴물을 보는 듯했기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저는 첫눈에 그를 알아봤는데,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서운함은 두 번째였다.

    10년 전 스쳐 지났던 저를 기억하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그는 재벌이었고 주변에 사람도 많았지만, 저는 그저 많은 후견인 중에 한 사람일 뿐이었다.

    서범익은 효원에게서 멀찍이 떨어지며 효원을 위아래로 빠르게 탐색했다.

    “돈이면 아무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는 걸 보니 역시, 돈 많은 알파에게 몸을 파는 남창이군. 그래, 넌 연예인 지망생인가? 아니면, 술집에 나가?”

    “…후원을 받는 건 맞아요.”

    “하, 그렇지. 반반한 얼굴로 스폰서 한둘이 없다면 말이 안 되겠지. 츳…….”

    그가 혀를 쯧쯧 찼다. 그는 후원을 받는다는 말을 몸을 팔아 돈을 받는다고 단정하는 듯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저를 보던 효원은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생각이 아니라 제 앞에 들이닥친 빚이었다.

    효원은 억제제를 먹고 싶었다. 그의 페로몬에 자꾸 노출이 되니 약으로 몸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범익은 효원에게 조소를 보이며 욕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효원은 그가 나갈 수 있게 길을 텄는데 원하지 않게도 그의 어깨에 이마가 스쳤다. 순간, 효원은 그의 어깨에 안기고 싶었다. 매혹적인 남자의 짙은 향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범익이 완전히 사라지고 혼자 남겨진 효원은 다리에 힘이 풀려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호흡을 하며 날뛰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너무 강렬해…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효원은 욕실에서 열기가 가라앉길 기다린 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다 굳은 마음으로 입술을 질끈 물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우리 가족이 다 살 수 있는 방법이 한 사람에게 몸을 주는 것이라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그래, 하자.”

    * * *

    결국 효원은 회장과 비밀 계약을 했다. 서범익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계약을 충실히 이행할 마음이었다. 계약에서 지켜야 할 조건을 요약하면 총 세 가지였다.

    첫째, 서범익의 러트사이클에 24시간 내내 곁에 있을 것.

    두 번째, 효원이 히트사이클 때는 절대 섹스하지 말 것. 매일 피임약과 억제제를 먹어 관리할 것.

    세 번째, 다른 사람들 앞에서 철저히 비밀을 지킬 것. 특히, 언론의 눈을 조심할 것.

    변호사에게 모든 계약 조항에 대한 설명을 모두 듣고 나서 효원은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남 비서에게 넌지시 듣기로는 이전 오메가들에 비해 좋은 계약 조건이라고 했다. 물론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지만, 테스트를 통과하면 5억의 돈이 통장으로 들어온다.

    효원은 테스트를 통과하고 싶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와 하루빨리 관계를 맺고 그의 계약 정부가 되어야 했다.

    * * *

    회장과 계약을 한 후, 서범익의 러트사이클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잠시간 저택에서 머물기로 했다. 효원은 사용인들이 생활하는 별채 손님방에서 생활했다.

    잠시간 지낼 방임에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로운 침대를 들였다. 효원이 입을 옷 이외에도 그림 도구를 비롯해 노트북까지 마련해 주셨다.

    이곳에 지내는 동안은 회장이 지급한 물건을 쓰고 나갈 때는 그대로 두고 나가기로 했다. 며칠간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계약 정부가 쓰기에도 모자란 건 없었다. 효원은 벽장에 걸린 고급 슈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비록 계약 정부지만 최고의 대우를 해 주려는 배려가 느껴졌다.

    그때 휴대폰에서 문자 도착 알림이 울렸다. 거래 은행 계좌로 2천만 원이 입금 되었다는 문자였다. 효원은 서둘러 모바일뱅킹을 열어 2천으로 일부 빚을 갚았다.

    효원은 이설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나 부탁할 게 있어. 넉넉잡고 3일쯤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으니 아버지 좀 부탁할게.”

    - …3일이나? 나보고 3일 내내 방에 처박혀 있으라는 거야? 나, 내일 저녁에 중요한 약속 있단 말이야!

    쩌렁쩌렁한 이설의 목소리에 효원은 휴대폰을 멀리 떼어 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사고를 친 사람이 누구인데. 고작 3일도 간병을 못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었지만 효원은 이설을 살살 달랬다.

    “누나… 3일이야. 앞으로 남은 빚 청산하려면 그 3일은 꼭 필요하니까. 빚 안 갚을 거야?”

    - …갚아야지.

    “그러니 이번에만 부탁할게. 급하게 사람을 구할 수 없어서 그러니까.”

    - 아이씨, 알았어. 그 대신 돈 꼭 구해야 해!

    “응. 그만 끊을게.”

    이설과 전화를 끊자 메시지가 왔다. 남 비서였다.

    [대표님의 러트사이클이 시작되었습니다. 안채로 건너오세요.]

    효원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안채로 뛰어갔다. 사실 어제부터 조짐이 보여 서범익에게 갔지만, 그는 끝끝내 저를 거부했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나 보다.

    문을 열자마자 1층에서부터 불안정한 알파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효원은 바짝 긴장했다. 서 회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효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그의 방으로 올라가라는 뜻이었다.

    효원은 후다닥 위로 뛰어 올라가 그의 방문 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문이 안쪽에서 잠긴 상태라 열 수 없었다. 방 안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렸다. 서범익은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필요 없다고 했잖아! 아무리 급해서 남자 후장을 쑤시고 싶지 않아! 꺼져!”

    효원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졌다. 효원이 뒤를 힐끔거리자 남 비서가 비상 열쇠로 문을 열었다.

    “들어가세요.”

    “괜… 찮을까요?”

    “조금 말이 거칠긴 해도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거나 주먹을 쓰는 분은 아닙니다.”

    “네.”

    효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용기를 내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은 엄청 컸다. 방 하나에 거실과 방이 따로 분리되어 있기에 마치 스위트룸에 들어온 것 같았다. 짙은 페로몬이 효원의 본능을 자극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효원의 이성을 집어삼킬 것처럼 강했다.

    “아…….”

    거실을 지나자 바로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그곳에 서범익은 시트를 휘어잡고 괴로움을 토하고 있었다. 그는 온몸이 젖어 있었는데 땀인지 아니면 차가운 물에 몸을 식힌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몸에서 뜨거운 열감이 풀풀 올라왔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데일 것처럼 화기가 강했다. 방 전체에 그의 페로몬으로 가득 차 있어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어떻게든 이성을 붙잡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걸까?

    “크윽… 윽…….”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보니 몹시도 안쓰러워 보였다. 과연 자신이 그의 고통을 잠재울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망설이던 효원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 범익 씨…….”

    그의 이름을 부르자 얼굴을 시트에 묻고 있던 서범익이 고개를 돌렸다. 효원은 깜짝 놀랐다. 그의 눈동자는 시뻘겋게 충혈된 상태였다. 열기에 터진 실핏줄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서범익은 몸을 벌떡 세우더니, 효원을 차갑게 바라봤다.

    “나가라고 했잖아. 들어오지 말라는 말 못 알아들어?”

    “…회장님께서 제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러니…….”

    “난 싫다고 했어! 거부해!”

    “그러지 말고…….”

    효원의 심장은 펄떡펄떡 뛰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름다운 우성 알파의 모습에 매료되고 말았다. 효원은 용기를 내 그의 뺨을 만졌다. 그러자 서범익이 흠칫 떨었다.

    효원은 파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을 빨고 싶은 욕망이 밀려왔다. 저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점점 그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은 효원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서범익의 눈이 이글거렸다. 이글거리는 눈과 달리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놈에게 스폰받는 오메가를 내가 왜? 더럽고 불결해… 그 낯짝이면 돈 많은 알파들이 줄을 설 텐데. 계약은 파기해. 그리고 다른 놈 찾아.”

    “이미 계약금 받았어요. 테스트는 무조건 해야 해요.”

    효원이 손을 다시 내밀었다. 그럼에도 서범익은 효원의 손을 거칠게 쳤다. 몸을 가누지 못해도 힘이 엄청났다. 손등이 얼얼할 정도였다.

    “밖에 누구 없어? 이 녀석 끌어내. 당장!”

    그가 소리를 지르자 경호원이 들어왔다. 효원은 할 수 없이 경호원의 인도에 따라 그의 방을 빠져나와야 했다. 이로써 두 번째로 거절을 당했다. 축 늘어진 어깨로 1층으로 내려오자 서 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예상은 했다는 듯 회장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회장은 시계를 쳐다보더니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효원은 민망했다. 이렇게 된다면 테스트도 못하고 쫓겨날 판이었다. 잠시 후, 의사가 3층으로 급하게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억제제를 놓아 주러 가는 것 같았다.

    효원은 1층 거실에 앉아 대기를 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어느덧 말끔하게 차려입은 서범익이 3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효원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완벽하게 슈트를 갖춰 입은 서범익의 모습이 너무도 멋졌다. 품격이 느껴지는 블랙 색상의 기본 클래식 정장을 입은 그는 러트사이클이 온 알파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높게 쳐든 시선에는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을 높은 자존심이 보였다. 계단을 내려오던 그가 거실에 앉은 효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곧바로 그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아직도 안 돌아간 거야?”

    “…….”

    그는 길게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효원의 옆을 스쳤다. 효원은 그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꼼짝없이 서 있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남 비서가 효원에게 다가왔다.

    “우선 아침 식사부터 하십시오.”

    “저분… 어디를 가시는 거죠?”

    “일단 출근하시는 겁니다. 오늘 결재할 서류가 몇 가지 있거든요.”

    서범익은 JK 그룹 대표 이사였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대표 이사가 되었다. 스물여섯에 손에 꼽을 그룹의 대표 이사가 된 그와 화가 지망생 효원, 너무도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오늘 몇 가지 스케줄이 있으시지만, 아마도 집으로 오시진 않을 것 같습니다.”

    “24시간 곁을 주는 것도 상대가 봐 줘야 가능한 거 아닌가요?”

    “테스트를 통과하면 대표님도 다르게 행동할 것이라 믿습니다.”

    “러트사이클이 오면 일상생활에 힘들다고 하더니, 회사에 가실 힘이 있나 봐요?”

    효원은 헛웃음을 지었다.

    “억제제를 두 배로 맞으면 두세 시간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억제제를 하루에 몇 번씩 투여할 수 없으니…….”

    “그럼 오후에 또다시 발작이 오겠네요.”

    “네.”

    “그럼에도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을 피하겠다는 뜻이고요?”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우선 식사를 하세요. 회장님께서 다시 지시를 할 겁니다.”

    그에게 두 번이나 거절당한 효원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회장이 다른 수를 강구한다고 했으니 만남이야 기다리면 되겠지만, 정작 급한 건 효원이었다. 이러다 러트사이클을 그냥 넘겨 버리면 빚을 갚기 곤란해진다. 빨리 그와 테스트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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