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의 늪-1화 (1/40)
  • chapter 1

    #01

    도심을 벗어난 서울 외곽의 한적한 도로에 검은 롤스로이스 한 대가 달리고 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롤스로이스는 전면 신호등이 노란색에서 녹색으로 바뀌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교차로를 지나쳤다.

    우르르-.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얼음 조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창을 때리는 우박이 마치 누군가 커다란 돌멩이를 던지는 것 같았다.

    조수석에 앉은 남 비서가 백미러를 통해 뒤에 앉은 서범익을 힐끔거렸다.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는 남자는 금방이라도 차를 돌리라고 말할 것처럼 보였다. 남 비서는 괜스레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회장님께서 특별히 고르고 고른 후보입니다. 이번에는 꼭 맞을 것입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내 러트사이클이 올 때마다 오메가를 찾는 것이 질리지도 않으신지… 매번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도 포기 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이러다가 파파라치라도 붙는다면 쌍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 아니야?”

    그의 입술에 비틀린 웃음이 걸리더니, 차가운 말투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의사들이 장담했으니까요.”

    “그 말, 이번이 스무 번째인 거 알고 말하는 거야?”

    “면목 없습니다.”

    남 비서의 목소리가 개미 소리처럼 작아졌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내 자존심이 얼마나 무너지는지 아신다면, 매번 이렇게 오메가 여자를 사 억지로 섹스하게 만들지 않을 거야. 이 사실이 외부에 흘러나간다면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겠어?”

    “누, 누가… 대표님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남 비서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범익은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우성 알파였다. 우성 알파만이 지닌 특수성 덕에 뛰어난 두뇌는 물론이고, 연예인을 방불케 하는 외모와 탄탄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난해부터 JK 그룹의 후계자로 차기 회장의 길을 걷고 있었기에 곧 부회장이 될 사람이기도 했다. 막강한 힘과 권력을 쥔 그룹이기에, 감히 그 앞에서 대놓고 그의 치부를 꺼낼 사람은 없었다. 거기다 막강한 부와 권력을 지닌 JK 그룹의 외아들이었다. JK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이기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JK 그룹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러모로 완벽한 조건을 가진 그를 모든 이들이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그에게도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치부가 있었다. 알파임에도 오메가를 안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최소한 알파들 사이에서는 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지… 지금껏 한 번도 오메가를 안지 못한 알파는 나밖에 없을 테니까…….”

    그의 말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남 비서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러트 때마다 타는 갈증과 심장이 찢기는 고통을 느꼈다. 보통 러트 시기에 러트 억제제를 먹거나 오메가와 섹스를 해 풀면 되지만,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우성 알파로 발현하고 첫 러트사이클에 러트 억제제를 맞았다가 큰 부작용을 겪었다. 그 이후에 그에게 특화된 억제제를 만들어 투약했으나 부작용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급적 오메가와의 섹스로 푸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그가 오메가 페로몬에 강한 거부감을 느껴 섹스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통제하기 힘든 러트사이클이 다가오면 늘 이렇게 불안해했다.

    “이번에 서 회장님이 특별하게 고르신 상대이니 괜찮으실 겁니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글쎄… 이게 고르고 고른다고 해결되는 문제이던가. 그 지독한 냄새만 맡지 못하면 차라리 나을 텐데…….”

    어떤 오메가도 넘어올 우성 알파임에도 오메가와 섹스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페로몬을 가진 오메가를 찾기 위해 서 회장과 그 측근들이 혈안이 되어 있음에도 일이 쉽게 풀리지가 않았다. 벌써 몇 년째 한 달에 한 번씩 이 길을 지나고 있었다. 남 비서 또한 제발 오늘은 꼭 그에게 맞는 오메가와 만나기를 바랐다.

    차가 멈춘 곳은 깊은 산속에 지어진 별장이었다. 만일의 사태를 맞이해 미리 기다리고 있는 의료진과 붉은색 페라리가 보였다. 저 페라리는 아마도 이번에 선택받은 여자 오메가가 타고 온 것 같았다.

    서범익의 차가 멈추자 가드들이 일시에 달려와 뒷자리 문을 열었다. 서범익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별장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의 몸에서 타오르는 열기가 뿜어져 나오자 모든 이들이 바짝 긴장했다. 슬슬 그의 러트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역시나 서범익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휘청거렸다. 곁에 선 남 비서가 그의 몸을 잡았다가 깜짝 놀라 손을 떼어 냈다. 감당할 수 없는 열기였기 때문이었다.

    “지겨워. 이 고통… 빌어먹을…….”

    평소 냉정하고 침착한 그가 답지 않게 욕설을 뱉었다.

    “어서! 억제제를 놔 주십시오. 어서요!”

    의료진이 서둘러 그에게 달려와 팔에 주사를 놓으려고 했으나, 서범익은 그들을 저지했다.

    “우선 저 안에 있는 오메가를 본 뒤에 해도 늦지 않아. 오메가가 놀라 뛰쳐나온다면 그때 방으로 들어와. 그리고 이번에는 억제제 두 대를 놔.”

    “두, 두 대요! 그건 더 심각한 부작용이 올 수 있습니다.”

    “부작용? 이보다 더한 부작용이 있겠어? 제기랄! 명령이야. 내가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면 무조건 찔러 넣어! 알겠어?”

    “…네,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서범익은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그가 별장으로 들어가자 의료진과 남 비서는 밖에서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남 비서의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이번에는 꼭 그의 몸에 맞는 상대를 만나기를… 그리고 그가 안정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때였다. 쥐죽은 듯 조용하던 별장에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의료진은 준비한 주사와 링거팩을 손에 들고 하얗게 질린 채로 별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 비서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이번에도 실패인 것 같았다.

    곧이어 대충 옷을 걸쳐 입은 여자가 놀라 별장을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굉장히 기분이 나쁜 듯 예쁜 입술에서 거친 욕설이 나왔다.

    그녀는 남 비서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고 남 비서는 슈트 안쪽에서 흰 봉투를 내밀었다.

    “약속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죠. 내가 알파를 유혹하지 못했다는 말이 퍼진다면, 내 몸값은 그야말로 바닥으로 떨어질 걸요. 하… 돈은 안 세어 봐도 되겠죠?”

    “네, 두 배로 넣었습니다.”

    여자는 아쉬운 눈빛으로 별장을 바라봤다. 막강한 돈줄이 될 스폰서가 날아가 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 남 비서의 눈에 훤히 보였다. 동시에 계약이 성사된다면 진행하기로 했던 JK 전자 휴대폰 광고도 날아갔다. 분한 듯 입술을 깨물던 여자는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바르더니 제 페라리를 타고 별장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남 비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남 비서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묵직한 목소리가 들린 건 당연한 순서였다. 경호원의 보고가 벌써 올라간 모양이었다.

    -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어. 후원하는 대학생 중에 남자 오메가를 찾아봐.

    서 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앞서 나가는 기업인으로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을 후원했다. 이제까지 후원하는 학생 중에서 상대를 찾는 일은 처음이었다. 거기다 여자가 아닌 남자라니. 남 비서는 당황스러웠다.

    “나, 남자요?”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알파와 오메가에겐 성별이 중요하지 않다지만, 서 회장은 이제까지 여자 오메가만 찾았기 때문이다. 서범익도 남자 오메가에 딱히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말이다.

    지금 서범익이 똥오줌 가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남자 오메가를 정부로 두는 건 더 위험한 계획이었다. 애초에 서범익이 회장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다.

    - 눈에 띄는 남자가 있더군, 사진을 보낼 테니 그를 찾아 설득해. 이왕이면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과 계약하는 게 좋겠지. 특별히 입이 무거워야 하니까.

    회장은 전화를 끊었다. 곧이어 메신저로 사진 한 장이 전송되었다. 회장이 보낸 사진은 최근 포털을 화려하게 장식한 주목하는 예술인의 기사였다.

    남 비서는 사진 속 인물을 보자마자 누군지 알아챘다. 그는 JK 그룹 본가에서 대소사를 총괄하는 이 집사의 먼 조카였다.

    이효원이 오메가였나?

    이 집사의 집안에 오메가가 몇 있다고 듣긴 했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남 비서는 사진 속 남자를 떠올렸다. 서 회장이 후원하겠다고 집으로 초대했을 때, 그는 열두 살이었다. 벌써 그룹의 후원을 받은 것이 10년째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신동으로 주목받은 이효원…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꿈을 펼치던 소년은 어느덧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올해 스물둘이지만 어릴 때 모습이 많이 보였다. 흰 피부에 이목구비가 수려한 것이 여전히 미인이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어릴 때와 다르지 않았다.

    [저는 한국의 미래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또한,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조금이라도 제 그림이 도움이 된다면 저는 붓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기사 내용을 훑어보니 여전히 마음도 곱고 바른 청년이었다. 남 비서는 서범익과 이효원을 나란히 두고 생각해 봤다. 어쩐지 그림이 나쁘지 않았다.

    ‘설마… 남자 오메가가 그의 짝일까?’

    * * *

    한 남자가 구부정한 자세로 쉰 김치에 소주를 연신 들이켰다. 이미 소주 세 병을 비웠음에도 그는 술을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잔뜩 굽은 어깨와 푹 꺼진 가슴이 안타까워 위가 꼬이는 것 같았다. 목구멍 안쪽이 따가웠다.

    “이보게, 학생? 학생은 누군데 우리 집에 있는 거야? 끄억.”

    “아, 아저씨. 저 기억 안 나요? 지난달에 작은 방에 월세로 들어온 학생이잖아요?”

    “그랬나? 허허, 요즘에는 점점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혼자 적적했는데, 한잔할까?”

    “좋아요.”

    그가 효원의 앞에 술잔을 건넸다.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하면서도 효원은 그가 따라 준 술을 마셨다. 목젖을 타고 흐르는 술은 마치 독약을 마시는 것처럼 끔찍했다. 그와 함께라면 술은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다. 다만 점점 더 희미해지는 그의 기억이 슬플 뿐이었다.

    50대 이른 나이에 조기 치매가 온 그는 효원의 아버지였다. 치매에 술은 독이지만, 팍팍한 삶에서 그가 유일하게 즐기는 술을 빼앗을 수 없었다. 술이 없었다면 미쳐 버렸을 아버지니까…….

    “그래. 월세는 꼬박꼬박 내고 있나?”

    “그럼요. 통장 보세요.”

    아버지가 통장을 보더니 껄껄 웃었다. 몇 년간 통장 정리를 하지 않았기에 통장에는 1억이라는 돈이 찍혀 있었다. 그가 돈을 찾으려고 은행으로 안 가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계속 숨길 수 있으니까…….

    효원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과거 아버지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사업을 실패했다. 집과 공장은 경매로 넘어가고 남은 건 통장 잔고 1억이 다였다. 곧이어 쓰러진 어머니의 병원비로 그 돈마저 다 사용하고 되레 빚까지 생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허전함을 술로 달래던 아버지에게 조기 치매라는 진단이 떨어졌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에 효원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싶었다. 동시에 부모를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진단을 받고 아버지는 빠르게 기억을 잃어버렸다. 젊은 사람의 치매는 노인들과 달리 진행이 빠르다고 하더니, 친척은 물론이고 자식까지 못 알아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기억은 서른에 멈추었다.

    그때부터 효원은 이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빠듯한 살림이지만, 그림을 그려 팔고 모자라면 밤에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그렇게 해도 다달이 나가는 빚과 이자가 있어, 한 달을 생활하기엔 빠듯했다. 그럼에도 효원은 생활이 고되어도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뒤로 벌렁 드러눕자 효원은 그의 몸을 부축해 방으로 가 눕혔다. 그때, 아버지의 바지가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또 오줌을 싼 것 같았다.

    효원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기억이 멀어지는 것은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신체 기능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그의 죽음이 임박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는 축축한 바지를 입고서도 아이처럼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효원은 한숨을 쉬며 욕실에서 따뜻한 수건을 가지고 와 그의 뒤처리를 해 준 뒤, 옷을 갈아 입혔다.

    한참 동안 집안일을 하고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넘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하루 촬영이라더니…….”

    벌써 이틀째 누나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효원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오로지 바닥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자꾸만 탈선하는 누나가 걱정되었다. 연예인이 되겠다고 고등학교를 자퇴했지만, TV에 제대로 출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디서 돈이 났는지 최근에는 페라리를 타고 다녔다.

    그녀의 매니지먼트에서 차를 지원해 줬다고 말하지만, 톱스타도 아닌 무명 배우에게 그렇게 큰 지원을 하는 회사는 없을 것이다.

    “정말… 어디 술집이라도 나가는 거 아니야?”

    그때, 집 밖에서 가난한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스포츠카 엔진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페라리라는 건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효원의 누나 이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지금이 몇 시야? 좀 일찍 들어오면 안 되겠어? 못 들어오면 전화를 하던가. 걱정했잖아?”

    “남이사, 몇 시에 들어오든. 우리 서로 얼굴 붉히면서 살지 말자. 안 그래도 열 받아 죽겠는데 슬슬 긁지 마.”

    이설이 코트를 벗어 던지자 몸에 착 들러붙는 미니 드레스가 보였다. 어딘가 파티라도 다녀온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거물급 집안의 자제와 파트너가 되었던가…….

    “우리와 어울리지 않은 파티라고 했잖아? 그들이 오메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꼭 거기에 가야겠어?”

    “자주 얼굴을 내밀어야 멍청한 알파라도 하나 꼬실 거 아니야? 너는 이렇게 사는 게 억울하지도 않니? 너도 구질구질한 집 벗어나고 싶잖아?”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 마찬가지지만, 알파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아.”

    “하, 이건 멍청한 건지… 맹추인 건지. 내 말 잘 들어. 누가 사랑을 하라고 했니? 몸 주고 돈을 받는 것뿐이잖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다가 혹시라도 나한테 빠지는 알파를 만나면 그 길로 대박 인생인 거야. 그 얼굴이 아깝다. 아까워… 쯧쯧…….”

    “…….”

    할 말을 잊었다. 같은 배에서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그녀와 효원은 가치관이 너무 달랐다.

    “너도 되지 않는 그림 그만 그리고, 돈 많은 알파 계집애 하나 만나 스폰받고 편하게 살아. 우리가 가진 게 뭐가 있어? 부모가 물려준 것이라고는 반반한 이 얼굴과 오메가라는 특성뿐이잖아? 물론, 끝내주게 멋진 알파를 유혹하긴 어렵지만… 아, 씨발. 또 성질나네. 담배나 하나 줘 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설은 책상 위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뻑뻑 피우기 시작했다. 좁은 집에 금세 메케한 담배 연기가 가득 찼다.

    효원은 그런 이설을 보며 창문을 열고 이설이 아무 곳에나 벗어 던진 옷가지를 정리했다. 옷을 세탁기에 넣고 담뱃갑을 본 효원이 담배 한 개비를 슬그머니 꺼내 피워 보았다. 담배 연기를 입 안에 머금자마자 바로 콜록콜록 기침이 터졌다.

    이런 것이 뭐가 좋다고 피워 대는지…….

    어울리지 않게 담배를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다가 아버지에게 보여 주지 않은 통장을 열어 봤다. 정리되지 않은 빚이 많았다. 작품에 열정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시간에 아르바이트까지 했더니 요즘 성적이 좋지 않았다.

    효원은 머리를 헝클며 마이너스 대출 통장을 바라봤다. 남은 것이라고는 작은 임대 아파트뿐인데… 이것도 기간이 되면 나가야 했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졸업은 할 수 있을까?

    불행 중 다행으로 거물급 후원자가 효원을 후원해 주고 있지만, 학비만 해당되고 생활비는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지금 당장 부서진 이젤과 유화 물감을 살 돈도 없었다.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야? 당숙이 없었다면, 진작 막노동판에서 뛰거나, 이설 말처럼 알파에게 몸을 팔았을지도 모르지…….”

    제 후원자는 바로 한국 최고의 JK 그룹 회장이었다. 회장의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가 당숙이었던지라 운 좋게 행운을 쥘 수 있었다. 후원을 약속받고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10년간 후원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르신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래. 넌 우리 집 자랑이야. 비록 난 실패했지만, 너는 화가로서 반드시 성공해야 해. 그게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니까.’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매일 했던 말이 뇌리에 깊게 박혔다. 신동으로 주목받는 자식을 향한 기대감이 엄청났다. 절망이 어린 눈에 일말의 희망이 들어섰다. 그건 돌아가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철없는 누나와 아버지를 부탁하면서 끝내 눈을 감긴 했지만…….

    그때부터 마음에 무거운 짐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들이 걸었던 기대처럼 잘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올해 스물둘.

    주변 사람들의 기대감은 이제 막 성인이 된 효원에게는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어떻게든 되겠지… 고민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우선 당장 필요한 생활비는 그려 두었던 작품을 팔아야 할 것 같았다. 내 자식 같은 작품을 상업적으로 팔아야 한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지만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할 수 없었다.

    효원은 씁쓸한 마음을 식탁 위에 남은 쓰디쓴 술로 달래려 했지만 오히려 타는 듯한 갈증이 밀려왔다. 오늘따라 유독 몸에 열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히트사이클이 다가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간혹 평상시에도 한 번씩 뜨거워지기는 했다. 물론 억제제를 미리 먹었기에 성욕이 치밀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오늘은 조금 다른 것 같아 억제제를 하나 더 먹어야 하나 고민했다.

    결국 효원은 붉어진 얼굴로 냉장고를 열어 억제제 약통을 꺼냈다. 약통을 열어 보니 억제제가 몇 알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아… 당장 이것부터 사야겠네… 쯧…….”

    아무리 돈이 없어도 억제제는 꼭 사놔야 했다. 효원은 억제제 하나를 손에 들고 잠시 망설였다. 억제제 한 알을 먹을지 아니면 그냥 참을지 고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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