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46화
에스퍼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험한 직업이지만, 봄은 스스로가 그곳에서 몇 발자국 비켜난 운 좋은 인생이었다는 걸 폭주하고 나서야 알았다.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아서 편하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어서 좋다. 젊음을 탐하는 늙은이들은 짜증 나지만, 그래도 큰돈이 들어오니 괜찮다. 그런 인생이었다.
한편으로는 아등바등 괴물과 싸우는 에스퍼를 은근히 낮잡아 봤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폭주 에스퍼는 말할 것도 없다. 가이딩 수치 하나 조절 못 해서 폭주한 머저리들. 그런 주제에 살아남은 염치 없는 것들.
봄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에스퍼 사이에 전반적으로 퍼진 인식으로, 누구도 정정하지 않으니 사실이 되었을 뿐이다.
부끄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으나, 봄은 자신이 C동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작은할아버지인 달래의 권력은 여전히 그녀의 곁을 맴돌았고, 동료들이 무자비한 임무 속에서 죽어 갈 때 태평하게 부자에게 5년의 젊음을 내주었다.
비록 목줄은 차고 있어도 갈 곳 없는 절망만 가득한 이들과는 섞일 수 없겠다고, 그리 확신했었다.
“주현아.”
어린 주제에 노인 같은 눈빛을 가진 녀석과 나눠 먹곤 했던 체리 맛 사탕은 무척이나 달았다. 봄은 단 걸 좋아하지 않았으나 입안에 든 사탕과 꼭 닮은 색의 눈동자가 수줍게 휘는 걸 보는 건 좋아했다.
온통 무채색인 그곳에서 가장 생기 없던 녀석이 사탕 하나로, 봄의 농담 하나로 피어나듯 웃는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꼭 동생이 생긴 기분이었다.
‘넌 꼭 1미터짜리 줄에 묶어서 키운 개 같다.’
아직 주현의 볼에서 젖살이 덜 빠졌을 때, 그런 주제에 피와 멍으로 젖었을 때 봄은 충동적으로 그리 뱉었다.
‘세상이 줄로 연결된 1미터가 다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개 같아.’
어쩌면 미련하게 구는 게 눈에 거슬렸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그리 기꺼우면 더 고통받지 말고 알아서 죽던가. 그런 못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말하고 나서야 이 자존심 강한 녀석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 거라는 게 떠올라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주현은 그러지 않았다. 다만 그 아이는 멍든 눈을 조심스럽게 깜빡이며 부러진 손가락으로 제 목에 걸린 차가운 쇳덩이를 매만졌을 뿐이다. 마치 자신이 줄에 묶여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은 강아지처럼. 마치 1미터 너머에도 세상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이.
그 동작이 어딘가 순진해서. 안 그래도 어린 녀석이 더욱 어려 보여서. 봄은 평소 늙은이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작은 호기심이 연민이 되고, 연민이 더 나은 것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봄은 손을 뻗었다. 피가 엉겨 붙은 지저분한 손을 뻗어 우는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비참한 남자의 뺨에 손가락을 대었다.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던 능력이 배 속에서 휘몰아치는 게 느껴졌다. 수년 전 두 사람을 죽였던 폭주와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에스퍼의 등급은 멋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같은 능력이라고 했을 때 C등급은 결코 B등급을 이길 수 없고, B등급은 결코 A등급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폭주는 다르다. 폭주한 C등급 에스퍼를 A등급 혼자 막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봄의 작은할아버지, 달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폭주가 한계를 부쉈다면, 살아남은 다음 이미 트인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그야말로 가설에 불과하지만, 봄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불쌍한 강아지. 봄의 동생.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으나 그런 마음을 느끼게 하는 녀석.
“계속, 해 주고 싶었어. 늦어서…… 미안.”
간단한 이야기다. 언제나 안전한 곳에서 남들을 깔보며 살았던 봄은 밑바닥 진창에 박혀 나날이 죽어 가면서도 늘 반짝이는 저 붉은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는 말이다.
능력이 사용되는 익숙한 감각이 몸을 감돌고, 안 그래도 없던 가이딩이 바닥난 게 느껴졌다.
봄이 가진 능력의 한계는 ‘한 번 되돌린 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이다. 하지만 폭주는 한계를 깨는 힘이고, 한 번 트인 길을 두 번은 못 할까. 그게 바로 봄의 가설이자 원하는 답이었다.
제대로 된다면 자신에게 사용해서 목숨을 건지는 것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한 번의 기회를 이 불쌍하고 사랑스러운 녀석에게 주고 싶었다. 이 애는 한 번도 그런 걸 가져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봄은 손끝에 걸린 새것 같은 안대를 잡아당겼다.
주현의 창백한 볼에 난 생채기가 사라졌다. 멍도, 피딱지가 앉은 입술도 깨끗해졌다. 툭. 안대가 떨어졌다.
“역시, 예쁘다.”
갓 배어난 피로도 보이고, 활짝 핀 꽃으로도 보이며, 탐스러운 열매처럼도 보이는 눈동자들이 온전히 봄을 향해 쏟아졌다.
높은 곳에서 쉽게 남의 인생을 무시해 오던 봄이 고작해야 눈동자 두 개에 이토록 큰 기쁨과 뿌듯함을 느끼게 되다니. 인생 정말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재미있는 거겠지만.
“…….”
주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품에 안긴 몸에 깃든 죽음의 기미가 너무나도 강해서 그랬고, 두 배 넓어진 시야가 낯설어서 그랬다.
봄이 봄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혈액 부족으로 시체처럼 차가운 손이 툭 떨어졌다. 황급히 잡았으나 온기가 넘어가지는 않았다.
“……누나.”
주현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죽음을 봐 왔다. 사신의 그림자가 봄의 손목을 잡는 게 넓고 선명해진 시야에 똑바로 담겼다. 미소는 사라졌고, 체온도 사라졌고, 피는 여전히 흐르고, 그런데 주현의 몸은 빌어먹게 건강하고. 이제는 배도 아프지 않았다.
비어 버린 안구가 다시 차오른 시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얼음에 찢겼던 셔츠가 새것처럼 말끔했다.
“봄아! 주현아!”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승철이 왔다. 봄의 신호가 왔을 때 승철은 하필이면 임무 보고를 위해 C동 직원과 만나야 했던 탓에 바로 올 수 없었다.
승철의 발이 두 사람 앞에 멈춰 섰으나 주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주현은 동료들의 죽음을 보고, 겪고, 나중에는 상상해서 미리 아파했다. 그러나 그 안에 봄의 죽음은 없었다. 평소 맡는 임무의 결이 다른 데다 협회에서 아끼는 봄이 쉽게 죽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신주현. 놔.”
“싫어.”
“가이딩 약물 가져왔어. 정신 차려라.”
털썩. 직원에게서 새로 받았는지, 상당히 묵직한 가방을 내려놓은 승철이 주사기를 꺼내 익숙하게 내용물을 채웠다. 주현은 멍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가슴 아픈지 모르겠다. 어쩌면 협회가 머릿속에 심은 세뇌에 동료의 죽음에 무감각해지라는 게 있었던 걸까. 깨끗해진 지금, 닫혔던 감정이 쏟아지는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세뇌된 상태가 낫지 않을까.
“형, 상처가 안 나아.”
“혈액이 부족해서 약이 돌지 않는 것 같다. ……빌어먹을.”
“그럼 어떡해?”
가이딩 약물이 개발되어도 가이드가 여전히 중요한 이유다. 가이드는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것만으로, 심지어는 닿지 않아도 방사 가이딩으로 에스퍼를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약은 혈관을 타고 흘러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이상 부상의 정도에 따라 전혀 쓸모없을 때가 많다. 지금처럼.
쏴아아- 파도 소리가 귀를 울렸다. 앞으로는 바다가 정말 싫어질 거라는 확신이 머릿속을 때렸다. 그러고 보니 손가락을 잊고 있었다. 상관없다. 바다에 빠지든 누가 주웠든. 망할 반란군.
‘넌 화난 게 아니야. 슬픈 거지.’
아니. 지금은 화난 게 맞는 것 같아. 의미 없는 임무를 준 협회에, 봄을 공격한 반란군에게, 무엇보다 혼자 들떠서 방심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아무것도 안 한 차인호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자신이 진절머리 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
자동차 엔진음과 여러 사람의 발소리, 긴장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들은 세 사람의 뒤쪽에서 멈췄다.
“당신들은…… 폭주 에스퍼?”
승철은 겉옷을 입었으나 주현은 티셔츠 한 장만 걸쳤을 뿐이라 폭탄 달린 목줄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낮에 에스퍼의 폭주를 본 후 신경이 예민해졌기에 봄의 신호를 보자마자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하고 날아온 탓이다.
주현에게 주사기를 건네준 승철이 꿇었던 무릎을 펴며 일어나 두 사람을 지키듯 한 걸음 내디뎠다.
“협회 분들이 여기는 무슨 일이죠? 쓰레기장에는 별로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쪽이야말로 뭘 믿고 이런 곳을 서성이지? 우리는 낮에 일어난 폭주 사건 때문에 머물렀다가 에스퍼가 날뛰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왔을 뿐이다.”
“저 조끼는, 가이드?”
그제야 주현이 고개를 돌렸다. 산길에서 광견병 걸린 들개를 만난 것처럼 움츠러든 채 멀찍이 물러서 있던 사람들 틈, 가이드를 상징하는 조끼가 몇몇 보였다.
“여기! 가이딩이 필요한 환자가 있습니다!”
승철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희망이 질척하게 섞여 있었다. 주현 또한 그럴 뻔했다. 그들에게서 경멸을 발견하지만 않았더라면.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새까만 밤하늘 아래에 숨어도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는 명백했다.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말하자마자 그들이 물러서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에스퍼의 등 뒤로 숨거나 옷자락을 잡으며 자신을 지켜 달라고 속삭였다.
“……에스퍼가 심하게 다쳤습니다. 당장 가이딩이 없으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늘 나른한 목소리를 흘리는 승철이 놀랄 정도로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 누구도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심지어 망설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장에라도 쏘고 싶다는 듯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주현은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