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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160/161)

폭주 에스퍼 145화

주현의 염동력은 보다 물리적인 힘을 가진다. 이것은 장점이자 단점인데, 장점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이고 단점은 강한 힘에 부서진다는 것이다. 남자는 그것마저 알고 있는 듯, 뭘 하려고만 하면 곧장 얼음으로 깨부수기 일쑤였다.

“소용없다! 순순히 인정하고 패배를 받아들여라.”

“네 공격도 썩 효과 없거든?”

인상을 찌푸리던 주현의 시야로 어느새 얼음에서 벗어난 봄이 몸을 숨기고 있는 게 보였다. 옷이 젖지 않고 깨끗한 걸 보니 능력을 쓴 듯했다. 지금은 남자를 잡는 것보다 돌아가는 걸 우선하기로 한 주현이 자세를 잡았다.

오감이 예민한 에스퍼는 아무리 보이지 않는 공격이라 해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만다. 특히나 염동력은 흔한 능력이니 동료의 능력을 옆에서 자주 봤다면 더더욱 알기 쉽다.

가이딩 수치가 제법 떨어졌으나, 주현은 결코 이곳에서 폭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괜히 아끼고 몸 사릴 필요가 없다.

쐐액-! 힘껏 능력을 날린 주현이 얼음으로 대처하는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급한 와중에 딱 하나 챙겨 온 작은 칼을 내질렀으나 능력에만 의존하지 않는지 남자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기껏해야 어깻죽지가 조금 스친 칼날 끝에 피가 묻어났고, 곧바로 주현은 남자가 휘두른 다리를 맞고 휙 날아갔다. 얼마나 힘껏 찼는지 내장이 찌르르 울릴 정도였다. 특히 무릎에 맞은 부분은 분명 시퍼런 피멍이 들었으리라.

뒤를 노리는 날카로운 얼음을 피해 바닥으로 몸을 날린 주현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지친 건가? 움직임이 둔해졌군. 거기다 공격도 너무 단순하다.”

“그래……? 이런, 부끄럽네.”

퉤, 목구멍을 간질이는 피를 침과 함께 뱉은 주현이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열었다. 온기가 옮았는지 조금 미지근해진 시체의 손가락이 드러났다.

“그건……!”

“내가 손버릇이 좀 나빠서.”

주현이 어깨를 떠는 가면을 향해 혀를 빼꼼 내밀며 웃었다. 여전히 실력은 죽지 않은 모양이다. 꼬맹이였어도 목숨 걸고 익힌 기술이라 그럴지도. 황급히 양손으로 제 주머니를 뒤적이는 남자를 능력으로 후려친 주현이 즐거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쓰러지는 남자를 바다로 내던졌으나 그는 찰나의 순간 만들어 낸 얼음으로 몸을 감싸 물에 빠지지 않았다. 혀를 찬 주현이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붙잡지는 못해도 상대의 정체를 안 이상, 얼른 도망쳐서 마약이 퍼지는 데 반란군이 연관되어 있었다고 보고한다. 그럼 협회에서 알아서 손을 쓸 것이다. 일단 봄을 데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을 승철과 합류하면 이 지긋지긋한 임무도 끝이다.

“남의 걸 훔치면 안 되지!”

“잘 지키지 그랬어!”

상당히 중요한 물건인지 남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싸움으로 이리저리 컨테이너가 널브러진 데다 온통 꽁꽁 얼어 버린 항구는 상당히 끔찍한 몰골이었으나, 이 또한 협회가 처리할 것이다. 사냥개가 입에 피 칠하고 사냥감이나 잘 물면 됐지, 주인의 사정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다.

머리카락이 얼어서 바스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 멀리서 희미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는데, 귀가 좋은 에스퍼가 간신히 들었으니 목적지가 이곳이라면 시간이 좀 걸릴 터다.

바다 한구석에서 등대의 어슴푸레한 빛이 보였다. 주현은 능력으로 발을 감싸 날아오는 얼음을 걷어찼다. 형태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얼음은 둔기로도 송곳으로도 변해서 성가셨다.

“정말 귀찮게 하는군.”

“내가 할 말인데.”

“마음이 통했나. 하나 기쁘지는 않다.”

이상한 가면의 정체가 반란군이라는 걸 들은 순간, 주현은 당연하게 누군가를 떠올렸다. 차인호는, 반란군은 일부러 세 사람을 이곳에 보냈다. 봄이 조사한 마약에는 반란군의 손이 뻗어 있었고, 승철은 쓰레기장 사람들에게서 ‘프리 가이딩’이라는 봉사 단체가 자주 온다고 들었다.

결국 임무는 허울일 뿐이었다. 그들의 손에 놀아났다고 이제 와 화가 나는 건 아니다. 주현의 인생은 아주 옛날부터 그런 식으로 굴러왔으니까. 다만 의문이 지워지지 않아서.

‘봄이 누나를 노리고? 하지만 마약 조사 임무는 반란군이 아닌 협회에서 내린 임무잖아.’

보고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협회 입장에서 굳이 거짓말을 늘어놓을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협회라면 필요 없지만, 반란군에게는 필요했겠지.’

쿵! 콰직! 얼음 파도가 몇 겹의 방어막을 깨부쉈다. 서로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비교적 조심히 싸우던 걸 집어치우기로 한 모양이다. 그만큼 다급해졌다는 말이다.

다리를 붙잡은 얼음을 박살 낸 주현이 봄의 위치를 슬쩍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지. 협회의 상층부에 스파이를 심어 뒀나?”

“대답할 의무는 없다.”

“말해 주면 이거 온전하게 돌려줄게.”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을 흔들자 가면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도 바짝 굳은 어깨와 부풀어 오른 근육을 보면 곧장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못생긴 가면 때문에 얼굴이 가려져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초조하게 까딱이는 손가락이 확신을 주었다. 마침내 가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하지만 네가 협회에 고자질한다 해도 그 사람이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말이 많은 거 보니 쫄리는 모양인데. 아무튼, 약속은 지킬게. 가져가.”

주현이 손가락을 남자에게 던졌다. 손가락은 장갑 낀 남자의 손에 들어가기 직전, 허공에 잠시 멈췄다가 그대로 바다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포물선이 아닌 직선으로 날아가는 손가락은 어둠에 먹혀 더 이상 보이지도 않았다.

가면과 눈이 마주친 주현이 씨익 웃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못된 미소였다.

“뭐 해? 안 받고.”

“너 같은 도둑을 믿은 내가 바보다!”

분한 목소리로 외친 남자가 컨테이너 위로 휙 뛰어올랐다. 그리고 손가락을 쫓을 생각인 듯 얼음 뭉치를 발밑에 만들었다.

주현은 방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만난 반란군은 온통 제각각이었던 까닭으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죄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까닭으로.

언제나 주현을 치료해 주는 가이드를 습관처럼 생각하다 보니 그의 가족까지 다정할 줄 알았나? 모르겠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그가 머릿속에 박아 놓아야 하는 건, 오직 자신의 방심으로 동료가 다쳤다는 사실밖에 없다.

“참고로 이건 내 뜻이 아니다.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쉽군.”

남자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몇 번의 공방으로 그게 능력의 발동 전조라는 걸 깨달은 주현이 반사적으로 방어막을 쳤다. 그러나 얼음은 방어막을 부수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하리라.

“아…….”

주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컨테이너 위에서 숨죽이고 있던 봄이 상체를 숙인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얼음이 관통한 옆구리를 중심으로 피가 번지고 있었다. 공격받는 순간 피한 건지 곧바로 심장을 뚫린 건 아니지만, 중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봄이 가까이 온 이유는 항구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망가지고 더러워진 항구를 한 시간, 뭣 하면 몇 년 전으로 바꾸어 깨끗하고 덜 낡게 할 생각이었겠지. 그런 거 협회가 알아서 할 텐데.

남자가 서 있던 컨테이너를 바다에 빠뜨린 주현이 봄에게 뛰어갔다. 그러곤 봄을 능력으로 조심히 내려 품에 안았다. 차게 얼었던 피부에 따뜻한 체온이 닿아 따끔거렸으나, 지금은 그 통증이 기꺼웠다.

“조금만 기다려. 지금 승철이 형이 약 들고 오고 있어. 진짜, 조금만…….”

스스슷- 얼음이 만들어지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고갤 돌리자 남자가 푸른빛이 도는 얼음과 함께 멀어지는 게 보였다. 손가락에 씌운 능력은 아직 끊지 않았다. 적당히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힘껏 날려 준다.

“윽, 큭, 신, 주현.”

“말하지 마. 나중에 치료 다 받고 말해.”

바다 특유의 짠 냄새가 피비린내와 뒤섞여 코를 울렸다. 바다. 항구. 컨테이너. 범규도 이렇게 죽었다. 범규도 파도 소리와 함께 주현의 눈앞에서 죽었다. 주현은 어찌할 바 모르며 봄의 손을 움켜쥐었다.

얼음은 상온에 있으면 녹는다. 힘껏 쥐면 쥘수록 사라지는 게 얼음과 눈이란 족속이고, 봄의 옆구리에 박힌 얼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피와 섞인 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려 주현의 무릎을 적셨다. 그게, 빌어먹게 춥게 느껴졌다.

봄은 이미 몇 년 전에 스스로에게 능력을 썼다. 무슨 임무였다더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효진에게 뇌를 세척 당한 후로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거, 알아? 콜록, 폭주는, 인생을 박살 내지만, 사실 능력의 한계를…… 깨는 힘이라는, 가설이 있대. 작은할아버지가 한 연구니까, 분명…….”

주현이 봄의 옆구리를 손으로 막았다. 주현의 주먹보다 큰 구멍에서는 새빨간 생명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래서, 정말, 콜록, 나답지 않게, 연습했거든.”

“무슨 소리야. 조용히 하라니까? 누나, 제발 좀…….”

봄은 자꾸만 닫히려 하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기저기 까지고 멍든 얼굴이 겁에 질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작 자신의 상처에는 무관심한 주제에 동료의 안위를 무척 신경 쓰는 녀석이었다.

머리가 아프고, 팔다리가 저리고, 무엇보다 옆구리가 아파서 죽을 것 같다. 그게 현재 봄의 심정이었다.

‘곧 있으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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