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44화
“……망할.”
봄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란군. 오랫동안 잠잠하더니 최근 이야기가 자주 들려오는 조직. 하필이면 귀찮은 놈들에게 걸렸다.
“그래서? 반란군이 나에게는 무슨 볼일? 거기에도 젊어지고 싶은 놈들이 있는가 보지?”
“아니. 젊음에는 관심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어쩌라고. 본론이나 말해.”
아무튼 짜증 나는 놈이었다. 봄의 일갈에 못생긴 가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되살려야 하는 사람이 있다. 너의 능력이 필요하다. 참고로 내가 살리고 싶은 건 아니다.”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봄은 이런 놈에게 잡힌 거냐는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사람이랑 대화를 많이 안 해 봤나? 형광으로 번쩍이는 가면의 눈을 노려본 봄이 초조함을 숨기며 한숨 쉬었다.
“죽은 사람은 못 살려.”
“우리도 알고 있다. 다만 부패한 시신을 원상태로 되돌리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다시 썩을 시체를 왜 되돌려야 하는지 털어놓기 전까지는 손잡을 생각 없어.”
여전히 입에서는 입김이 나오고, 얼음에 닿은 피부에는 감각이 없어졌다. 거리가 멀어 호출기의 신호가 닿지 않았다면 큰일이다. 상대가 가까워진다면 능력을 사용해 어떻게 도망이라도 치겠지만, 그녀의 능력을 아는 이상 쉽사리 가까이 오지는 않을 터다.
“……넌 인간을 이루는 게 뭐라고 생각하지?”
“허, 갑자기 철학적이네. 다량의 물과 단백질, 그 외 등등.”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건 기억이다. 가치관은 쌓아 올린 경험에서 비롯된다. 사고방식도, 상황에서 도출하는 결론도 다르다면 그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기억은 뇌, 뉴런, 시냅스……. 아무튼 세포에 저장되지.”
“그래서?”
“우리의 계획은 이십 년 전에 죽어 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시체를 그 사람인 채로 되살리는 것이다. 많은 에스퍼의 능력이 필요하겠지. 그 첫 번째가 너다.”
“……그건 네 생각이냐?”
“아니다. 전부 들은 거다. 보스에게.”
제 이름조차 못 알려 준다며 보스, 즉 반란군 수장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잘도 떠든다. 봄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한쪽 눈을 찌푸렸다. 상대를 깔보는 미소. 이 표정을 지으면 세화는 늘 무시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반란군도 별것 없네. 죽은 사람에게 매달려서 징징거리기나 하고. 생각보다 더 허접한 곳인 것 같아서 웃음도 안 나와.”
“…….”
“그런데 내가 되돌릴 수 있는 건 5년이 최대라는 거 알고 권유하는 거지?”
“그래. 하지만 방법이 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당당해서 봄도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얼음이 녹아 신발 안이 물로 축축해졌다. 발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녹으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할 듯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가면이 똑바로 봄을 응시했다. 봄은 당장에라도 그걸 벗겨 코를 부러뜨리고 싶었다.
“넌 이미 5년보다 훨씬 전으로 되돌린 적이 있지 않은가.”
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굳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폭주. 미숙하고 뒤틀린 지옥. 원하는 자가 많은 능력 덕에 다른 에스퍼에 비해 안전하고 쉬운 환경에서 살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뇌리에 박혔을지도 모른다.
인간이었던 세포와 줄어든 하반신. 봄이 이를 악물었다. 아직 얼음은 충분히 녹지 않았다.
“죽어도 싫어. 애초에 폭주하면 조종도 못 한다고. 단순히 시체를 되돌리는 게 아니라 세포로 돌아가게 만들면 어쩌려고?”
“뭐든 시도는 해 봐야지.”
“아니, 난 누군지도 모르는 놈들을 위해 희생할 생각 없어.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꺼져. 애초에 폭주가 그리 쉽게…….”
불현듯 아침에 사수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주현과 승철이 가져온 정보도 파도처럼 밀려와 한데 뒤섞였다.
“……마약, 너희가 만드는 거였어?”
“맞다. 참고로 내 의견은 아니었다. 반란군 내에서도 아는 이가 극히 적다. 난리가 날 테니. 특히 몇몇 녀석은 아지트에서 총기 난사를 할지도 모른다.”
“내부에서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이런 짓을?”
“적어도 세 개의 이유가 있다. 다 말하면 반란군에 들어오는가?”
말이 반란군에 들어오라지, 폭주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폭주의 끝은 죽음이 압도적으로 많다. 살아남은 C동 에스퍼들이 끝내주게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경우에는 끔찍한 불운과도 같았지만.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이상한 가면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봄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든 봄은 찡그리지도 웃지도 않았다. 늘 그렇듯 냉철한, 채경이 말하길 뚱한 표정을 지었다. 주현과 세트라는 말도 들었던 표정이다.
“엿이나 먹어.”
와자작, 얼음이 부서졌다. 봄이 손을 뻗어 코트를 잡아챘다. 순식간에 실로 변한 옷에 훌쩍 멀어진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들었다. 코트 주머니에 들어 있던 건 손가락이었다. 푸르다 못해 새하얀 시체의 손가락은 남자의 바지 주머니로 들어갔다.
아쉽게도 봄은 도망치지 못했다. 남자는 최소한 A급은 될 것이다.
‘열 받네.’
몇 걸음 도망치지 못한 봄이 다가오는 분홍색 주사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전에 훔쳤던 것보다 몇 배는 짙은 색이었다.
손은 얼었는데 팔은 얼지 않았다. 남자의 장갑 낀 손이 팔뚝을 움켜쥐었다. 폭주에 대해 생각한 바는 있으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봄이 마지막 반항을 하기 위해 몸에 힘을 준 그때였다.
“야.”
영웅은 도둑처럼 조용히 나타났다. 그의 능력이라면 발소리 하나 없이 그야말로 하늘을 걸을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손 떼.”
어둠 속에서 단 하나의 붉은빛이 번뜩였다. 주현은 반팔 티셔츠 하나만 걸친 가벼운 차림새로, 머리도 젖어 있었다. 목욕이라도 하던 중 달려온 모양이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렌즈도 안 끼고 하다못해 겉옷도 없어 그토록 부끄러워하는 목줄이 그대로 보였다.
봄을 위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뛰어온 그가 기꺼웠다. 살았다는 안도보다는 여전히 정이 많다든가, 어찌 저리 희생적이냐라든가, 해 준 것도 없는데 왜 그리 따르냐라든가. 많은 생각이 드는 가운데…… 결국 남은 건 그런 주현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라서, 봄은 흐린 입김을 내뿜으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 * *
주현의 공격은 확실히 들어갔다. 다만 얼음이 부서지면 곧장 새로운 얼음이 만들어질 뿐이었다.
봄의 신호를 받은 주현은 잠입 임무에 오고 처음으로 능력을 힘껏 사용했다. 허공에서 쏜살같이 튀어 나가느라 몸이 바람에 쓸려 따끔거렸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몸을 띄우는 부유감에 얼음 채찍으로 주현을 공격한 남자가 이상한 가면을 흔들었다.
“아, 그래. 신주현이로군. 요즘 네 이름을 듣는 일이 많다.”
“알 바야?”
“아는 게 좋을 거라고는 생각한다. 나와는 상관없지만.”
“어디서 내 이름을 들었는데? 반란군 양반.”
상성은 평범하다. 능력에 있어 우위가 없다는 말이다. 주현의 공격이 막히고, 남자의 공격이 막힌다. 남자의 공격이 들어오고, 주현의 공격이 들어간다. 이렇게 되면 남은 건 센스와 경험, 그리고 순간적인 판단이 승부를 가른다.
크지 않은 찰과상을 몇 개 얻은 주현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몸을 움직인 곳에 얼음벽이 갑자기 솟아올라 강하게 부딪힌 탓이다.
삐뚤어진 가면을 고쳐 쓴 남자가 말했다.
“아지트에서. 많이들 말한다.”
“어쩐지 귀가 간지럽더라니. 뭐라든?”
“너는, 흠……. 사랑받고 있다.”
“또라이 새끼가.”
남자는 얼음에 감기며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주현의 공격에 맞은 컨테이너 하나가 바다에 풍덩 빠졌다.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그만한 남자는 흔하지 않다.”
반란군 내에서 주현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퍼져 나간 모양이다. 물론 어차피 욕이나 떠들어 대고 있을 테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주현이 차인호를 좋아하는 것과 반란군은 별개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 해서 그 사람의 직장 사람들까지 좋게 봐야 하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지금은 살의를 품고 있다.
임무 보고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승철도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으니 주현은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다가 둘이서 함께 잡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봐도 반란군은 마약 조직과 깊이 연관된 것 같으니 털면 다양한 정보가 나올 터. 협회를 위해 일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동료를 다치게 한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진봄을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 비키지 않으면 죽이겠다.”
“나 거기서 사랑받는다며? 죽여도 돼?”
“정확히는 한 사람이다. 나는 널 사랑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사과하겠다.”
문득 떠오른 얼굴을 털어 낸 주현이 다시금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반란군에는 강한 사람만 모인 건지, 아니면 강하기에 밖으로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뭐가 되었든 상관없지만. 남자의 주먹을 피해 움직인 순간, 날카로운 얼음 끝에 볼이 긁혔다. 남자 또한 주현의 능력으로 바닥을 뒹굴었으니 나쁘지 않은 공방이었다.
“아, 더럽게 춥네.”
가을의 끝자락, 서늘한 밤공기에 냉기까지 뒤섞이니 드러난 팔뚝이 상처 없이도 따끔거렸다. 문득 지독히도 더웠던 화산 지대가 떠올랐다.
‘그곳이 그리워질 줄이야.’
하지만 그 잿더미 지옥은 숨 막히게 더워도 귀여운 새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이상한 가면을 뒤집어쓴 이상한 놈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
얼어붙은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주먹을 쥐었다 편 주현이 짐승처럼 몸을 낮추며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