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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158/161)

폭주 에스퍼 143화

쿵! 컨테이너 위로 착지하자 속이 빈 얇은 철판에서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곧장 어둠 속으로 뛰어내린 봄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대상은 그녀를 쫓는 남자, 태석, 마약, 협회, 온 세상 등등 중구난방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거기 서라!”

“서란다고 서는 놈이 어디 있냐.”

작게 중얼거린 봄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바닥을 피해 다른 컨테이너 위로 뛰어올랐다. 달밤의 술래잡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떠올렸다.

어젯밤, 옷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주현은 심각한 얼굴로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웬 주정뱅이가 말하길, 분홍 액체의 마약은 일반인을 에스퍼로 만드는 약이라고.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몇몇 사람이 에스퍼의 힘을 쓸 수 있게 된다고. 본 사람이 제법 있어서 그럭저럭 신빙성 있는 소문이라고.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있나.’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봄과 승철의 대꾸에 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뿐인 눈이 인공적인 불빛을 담고 반짝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 실제로 에스퍼로 발현하는 거라면 가이딩 약물이 비싸지는 것도 맞아떨어져. 단정 짓지는 말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기억해 두자.’

그 이야기를 머릿속에 잘 간직한 봄은 일터, 즉 마약을 불법 입수하는 뒷세계 조직에 출근했다.

말단 중의 말단, ‘보미’라는 이름으로 잠입한 지 몇 주가 지난 근래 상당한 신뢰를 얻었다고 확신한다. 특히 얼마 전 사수라고 할 수 있는 남자와 쓰레기장을 돌아다니며 수급하던 중 그에게 날아오던 배트를 막아 준 후로 그는 특히나 봄을 아끼기 시작했다.

오늘도 촌스러운 양복을 입은 봄이 선글라스를 검지로 밀어 올리곤 사수, 병근에게 다가갔다. 왁스로 떡칠 된 머리가 햇볕에 반짝였다. 평소처럼 시시한 일상과 말단의 임무 이야기를 하던 봄은 저 멀리 항구 근처에서 커다란 상자를 짊어지고 가는 깡패들을 발견했다.

이곳 전체가 항구지만, 특히 선박이 오가는 끝부분은 말단이 갈 수 없는 구역이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들어간 적은 있으나, 새벽에도 감시가 삼엄해서 기껏해야 약 하나를 쥐고 돌아오는 게 다였다.

봄은 병근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선글라스를 슬쩍 내렸다. 그는 봄에게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는 데다 단순한 구석이 있어서 뜬소문을 입에 담는다고 큰일이 되지는 않을 터다.

‘형님, 제가 지나가는 길에 들었는데, 저 약을 먹으면 에스퍼가 될 수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뭐? 아하하! 보미 니도 그런 소문을 믿는 기가?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그렇지만도 않네.’

눈앞의 깡패를 몰래 노려본 봄은 헛기침을 하며 병근의 어깨를 툭 쳤다. 병근은 지식을 자랑한다는 게 기쁜지 한껏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건 에스퍼로 만드는 약이 아이다. 기냥 윽수로 기분 좋은 마약인디, 에스퍼에게 부작용이 쪼금 더 있을 뿐이다.’

‘부작용이 뭡니까?’

‘뭐, 가이딩을 떨어뜨린댔나 그랬던 것 같다. 그래 가꼬 여 있는 놈 중에 에스퍼만은 절대로 약에 손도 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아이가. 여서 폭주하면 난리가 날 테니께.’

조직에 속한 에스퍼도 드문드문 있다. 힘을 사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업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봄이 조직에 들어왔을 때 교육받은 것 중 하나가 분홍색 약만은 결코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반 조직원에게 퍼져 나가면 자연스럽게 에스퍼에게도 닿을 테니 당연한 규칙이었다.

병근의 설명을 들은 봄은 역시 형님은 대단하시다며 파리처럼 손을 비볐다. 머릿속은 걱정으로 난리가 났지만.

‘가이딩 수치를 떨어뜨린다는 건, 강제로 폭주시킨다는 거랑 같잖아…….’

생각보다 사안이 심각했다. 얼른 돌아가서 알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남의 목숨을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폭주만은 싫었다. 자신이 해도 싫고, 남이 해도 싫다.

‘가이딩 약물값이 치솟은 이유가 이건가?’

중독된 에스퍼는 수치가 떨어져 가이딩 약물이 필요하고, 마약에 중독되어 계속 주사기를 밀어 넣는다면 필연적으로 더더욱 많은 가이딩 약물이 필요하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에스퍼의 폭주는 혼자만 사망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능력에 따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휘말려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되는 자연재해와 같다. 생각에 잠긴 봄이 이를 으득 갈았다. 알면서 한 건지, 우연히 그런 효과가 나왔는지는 몰라도 뿌리째 뽑아야 했다.

하지만 봄의 능력으로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건 도박이었다. 마약을 보내 성분 분석을 하고 있겠다, 대략적인 전말도 알았겠다, 그냥 이대로 임무를 마치려던 그녀의 생각이 바뀐 건 조직원들이 오후에 폭주한 에스퍼에 대해 말한 때였다.

물난리가 났다고 즐겁게 웃는 얼굴을 보며, 봄은 성가시고 위험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힘내 보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봄은 늦은 밤, 은밀하게 몸을 숨긴 채 항구를 돌아다녔다.

이상한 점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조직원들이 적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중요한 게 있다면 지키기 위해 더 사람이 많아야 할 텐데, 왜 이곳은 텅 비어 있나. 의문이 들었으나 금방 해결되었다.

세상에는 감이라는 게 있다. 어, 쟤 좀 싸한데? 하는 기분이 들게 하고,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그런 애매모호한 감각은 의외로 에스퍼에게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게다가 에스퍼의 뇌는 복잡하다. 아메바가 아니고서야 누구나 복잡한 뇌를 가지고 있겠지만, 에스퍼는 좀 더 그렇다. 마법 같은 힘은 뇌에서 나오니 사고가 빠른 것도 당연한 일이다. 무의식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신호를 보내는 직감은 에스퍼에게는 제법 신뢰도 높은 화살표란 말이다.

그런 봄의 직감이 외쳤다. 컨테이너 두 개로 교묘히 가려진 구석, 이런 곳에 천 뭉치가 왜 있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장소가 수상하다고.

봄은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낡은 천을 관찰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때마침 천을 걷고 나오던 사람과 정면에서 마주쳤다.

‘…….’

‘…….’

처음에는 괴물인 줄 알았다. 이상한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는 커다란 자루를 등에 멘 채 굳어 있었다. 봄의 출연을 예상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마찬가지인 봄의 눈이 남자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그곳에는 게이트가 있었다. 하나의 색으로 정의할 수 없는 빛무리가 부드럽게 일렁이는 원형 게이트였다. 크기는 일반 게이트에 비해 약간 작아 성인은 고개를 기울이며 지나가야 했다.

허리를 숙인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멈춰 있던 남자가 작은 헛기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큰 눈이 양쪽에 달린 외계인 같은 가면만 아니었으면 등에 멘 자루 때문에 산타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봄은 미리 준비해 둔 변명을 입에 담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여기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나가는 길 아십니까?’

‘처음 만나는군, 진봄.’

봄의 얼굴이 굳었다. 선글라스 너머로도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그에 비해 가면은 흐흐, 하고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툭, 자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봄은 휙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 * *

한 시간, 어쩌면 두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봄은 죽어라 도망치는 중이다. 임무에 방해가 된다면, 혹은 정체를 들킬 바에는 죽이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으나 도망치기를 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쩌적- 곧 있으면 겨울이 오기에 안 그래도 쌀쌀한 밤공기가 솜털이 일어설 정도로 차게 가라앉았다. 얼음을 사용하는 에스퍼는 드물지 않다. 불이나 물을 다루는 능력은 흔하고, 얼음은 좀 더 드물지만 그래도 간간이 보인다. 하지만 이토록 범위가 넓은 건 처음이었다.

“단순히 이야기만 하자는 거다. 너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미안하지만 그런 말을 믿을 만큼 어리지 않아서.”

“안 믿으면 아픈 꼴을 당하게 될 텐데.”

입을 벌리자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제법 시끄러운 소리가 남에도 가까이 오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 사람이 적은 건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바닥을 굴렀다가 곧바로 일어난 봄이 불편한 겉옷을 내던졌다. 찬 공기가 훅 밀어닥쳤으나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번 임무를 위해 지급된 호출기는 무척 작아서 가지고 다니기에 좋지만, 작은 만큼 신호가 닫는 거리가 좀 짧다는 단점이 있었다.

‘아까 이걸 눌렀을 때 녀석들이 어디에 있었을까, 신호는 받았을까.’

그걸 걱정하던 순간이었다. 봄의 앞을 얼음덩어리가 가로막았다. 그에 주춤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자가 능력을 썼는지 두 다리가 얼어붙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발목이 분리될지도 모른다. 능력을 사용하면 없앨 수 있겠지만, 결국 다시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뿐이다.

“너는 폭주 에스퍼이니 협회에 반감을 품고 있겠지. 그렇다면 너와 나는 적이 아니다.”

“하, 사람을 얼려 놓고 잘도 말하는군.”

“신뢰를 얻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되지?”

이상한 가면이 다가왔다. 남자의 검은 코트 끝에 살얼음이 껴 있었다. 봄은 가장 최적의 결정을 내렸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 봐. 솔직히 불면 들어줄지도 모르지.”

“그렇군. 일리가 있다.”

얼어붙은 피부가 찢어질 듯 아팠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 봄의 동생이라면 설령 양다리가 절단된다 해도 아픈 티를 내지 않을 터다. 미련한 걸 넘어 대단하다 싶을 정도의 자존심을 떠올리던 봄은 남자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내 이름은 비밀이다. 나이도, 취향도, 사는 곳도 비밀이다.”

“장난해?”

“그리고 반란군에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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