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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157/161)

폭주 에스퍼 142화

사실 주현은 남자에게 협회의 이름을 팔아넘긴다고 큰 후환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누가 주정뱅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또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한들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협회가 쓰레기장에 숨어든 사람이나 물건, 정보 등을 목적으로 은근슬쩍 손을 뻗친다는 걸 모르는 주민은 없다. 컨테이너 창고에 사는 코흘리개들도 아는 사실을 어른들이 모를 리 없고, 협회의 심기를 더럽혀서 인생 난도를 올리고 싶은 사람은 흔하지 않을 터.

거기다 곧 있으면 이 거지 같은 임무가 끝나고, 폭주 에스퍼 세 명은 쓰레기장을 벗어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안대 쓴 남자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소문이 돌 때쯤 주현은 이곳에 없을 거란 뜻이다.

‘그럼 결국 뜬소문으로 그치겠지.’

애초에 이곳은 쓰레기장이다. 쓰레기장은 물건을 받아들이는 곳이지 밖으로 내보내는 곳이 아니다. 터무니없는 소문이 밖으로 나갈 가능성은 한없이 작다.

협회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남자가 주현을 우습게 보고 거짓 정보를 흘릴 가능성은 상당히 줄었다. 그저 과장된 소문을 주워들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지만, 그래도 악의적으로 이야기를 비트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

“자, 이제…… 아는 걸 말해 봐.”

이질적인 검은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 * *

에스퍼의 폭주는 결코 흔한 게 아니다. 게이트는 발견되는 대로 등급이 매겨지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에스퍼를 보내기에 가이딩이 바닥날 때까지 능력을 퍼붓는 경우는 적다. 설령 한계까지 쥐어짜인다 해도 무조건 폭주하는 건 아니다. 제대로 재수 없는 경우에만 폭주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도 평소 꾸준히 질 좋은 가이딩을 받았을 때의 이야기지, 늘 목마른 상태로 허덕이며 사는 에스퍼에게 폭주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C동 에스퍼들처럼, 그리고 쓰레기장 에스퍼들처럼.

콰아아!

승철은 솟구치는 물길을 피해 훌쩍 뛰어올랐다. 9층짜리 낡은 건물의 모든 창문에서 거센 물길이 쏟아져 나와 순식간에 거리가 물바다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에 이를 악문 승철이 물길에 휩쓸려 가던 사람을 잡아 안전한 곳에 내려놓았다.

“콜록, 콜록!”

등을 두드려 주기도 전에 도망가 버린 사람을 구태여 붙잡지 않은 승철이 다시금 물이 쏟아지는 건물을 노려보았다. 이런 식으로 무식하게 능력을 사용하는 에스퍼는 없다. 애초에 도시 한가운데에서 능력을 남용하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도 하고.

“젠장…….”

축축한 머리를 쓸어 넘기자 C동에 있을 때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물에 젖은 채 손가락에 걸렸다. 여전히 물은 쏟아지고 있다.

승철은 이 불길한 느낌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폭주. 낡은 건물 안에서 이름 모를 에스퍼가 폭주하고 있다.

“그나마 불 같은 능력이 아니어서 다행인가.”

다량의 물도 충분히 위력적이지만, 건물째로 타올라 사방이 불바다가 된 장면을 상상하면 물인 게 고마울 지경이다.

시계를 본 게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으나, 건물 밖으로 물이 뿜어지기 시작한 지 대략 10분 정도 지났다.

폭주는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힘을 버티지 못한 몸이 망가지거나 제압하러 온 에스퍼에게 사살되거나. 길어 봐야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의, 더불어 휘말린 사람들의 인생을 망가뜨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안 돼, 안 돼!”

“우리 집이……!”

“엄마, 어딨어?”

“도, 도와주세요!”

갑작스러운 물벼락에 사방에서 비명이 넘쳤다. 아주 드물게 도시에서 에스퍼의 폭주가 일어나면 죽은 목숨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피해는 협회와 국가에서 보상한다.

하지만 이곳은 쓰레기장이다. 버려진 것들이 모이는 곳. 누구도 내버린 쓰레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쓰레기장의 복지 현황을 조사하며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녔던 승철은 안 그래도 없는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져 속이 쓰렸다.

“형!”

탁, 옆에 내려선 사람이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길에 휘말리지는 않았는지 아침에 본 그대로 보송한 주현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폭주겠지?”

“적어도 수도관이 터진 건 아닌 것 같다.”

폭주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고 있는 두 사람이 표정을 굳혔다. 물은 여전히 쏟아지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휩쓸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멈춰야 했다.

“물줄기가 위로도 솟구쳐서 멀리서도 잘 보이던데. 신고 들어가서 협회 오는 거 아냐?”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세 사람의 임무는 당연하지만 기밀이다. 협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도 독자적으로 분리된 조직으로 취급되는 C동의 임무를 들켜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다.

주현이 대놓고 혀를 찼다. 그 심정에 깊이 공감한 승철이 초조하게 건물을 응시했다. 기분 탓인지 물줄기가 조금 약해진 것 같다. 폭주가 끝나 간다는 신호. ……에스퍼가 죽어 간다는 뜻과 동일하다.

“어떡할까.”

“내가 다녀올게. 형은 여기서 사람들 좀 도와줘.”

“괜찮겠어?”

“내 능력이면 안 휘말리고 들어갈 수 있다는 거 알잖아.”

단언한 주현이 입술 끝을 슬쩍 위로 올렸다. 썩 즐거운 미소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미소는 미소라서, 이런 상황임에도 약간 마음이 풀렸다. 어깨를 두드리자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제법 든든했다.

기실 주현의 능력은 범용성이 무척 크다. 일반적인 염동력보다 형태 변화가 구체적이라서 건물의 창문을 모두 막거나, 몸 근처에 방어막처럼 둘러 물길에 휩쓸리지 않고 폭주 에스퍼를 찾을 수 있을 터다.

“도, 도와줘!”

날카로운 외침에 승철이 곧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물속에서 넘어진 남자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를 잡아 올린 승철이 곧장 떨어졌다. 감사 인사는 받지 못했으나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다.

승철의 능력은 ‘Ashes’로, 무엇이든 순식간에 재로 만들 수 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연소시켜 불꽃은 보이지 않으면서 재만 남는 능력. 상당히 무시무시한 능력인지, 에스퍼 중에서도 슬슬 피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그래도 강한 능력임에는 틀림없다. 잘만 다루면 거대한 괴물마저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으니까. 문제는 폭주 후 그가 상대하는 게 사람이라는 데 있다.

“…….”

폭주한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일반인들과 어울려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좋아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유는 상관없다. 승철은 능력이 새어 나오지 않게 조심하며 또 다른 사람을 부축했다.

주현이 돌아온 건 건물이 완전히 잠잠해지고 수십 분이 지난 후였다.

“형.”

안에서 일이 있었는지 온통 푹 젖은 그가 지친 얼굴로 옥상에 있던 승철에게 다가왔다.

현재 C동에서 가장 어린 주현은 때때로 삶에 체념한 노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곤 한다. 차인호를 만난 후로 좀 나아지나 했는데, 최근에는 그것도 아닌 모양이라 승철은 동생이 걱정스러웠다.

다만 굳이 입에 담는 것은 어쩐지 쑥스럽고, 무엇보다 야생 살쾡이도 아닌 주제에 약한 모습 보이는 걸 무척 싫어하는 주현을 위해 티 내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냐.”

“죽었어.”

신고가 들어간 게 맞는지, 밑을 내려다보자 협회 문양이 찍힌 자동차가 건물로 향하는 게 보였다. 무척 늦은 출동이었다. 안경을 잃어버린 주현이 안대를 벗어 눈을 문질렀다. 움푹 들어간 눈꺼풀을 더는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리자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체 팔에 주사 자국 엄청 있더라.”

“중독자였나 보다.”

조사 중인 마약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봄이 얻어 온 마약은 성분 조사를 위해 C동으로 보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염병할 놈들. 빨리도 오네.”

물 때문에 자동차가 진입하지 못해 결국 차에서 내린 이들을 보며 주현이 투덜거렸다. 늘 거만한 얼굴들이 찌푸려진 게 괜히 반가웠다. 그중에서도 가이드를 나타내는 밝은 조끼가 눈에 띄었다.

“꼴에 가이드라고 호위받는 것 봐.”

“너 인호 씨한테도 그럴 거야?”

“차인호는! ……다르지.”

“그거 편애야, 인마.”

“뭐 어쩌라고. 그 인간은 내 매칭 가이드인데. 당연히 편애하지.”

사람 일이란 참 알 수가 없다. 승철이 폭주하고, 일상이 무너지고, 주현이 매칭 가이드에게 푹 빠져 귀엽게 굴고, 그 모습이 싫지 않다니.

팔을 뻗어 젖은 머리를 거칠게 문지르자 주현이 짜증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늘 그렇듯 손을 털어 내지는 않았다. 주현도 나이가 있으니 마냥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야 하나 싶지만, 승철이 생각하기에 그는 어른이 될 기회를 박탈당한 어린애였다.

‘……곧 있으면 나 죽는대.’

그렇기에 봄과 주현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러나 동시에 당연하다는 듯 밀어닥친 체념에 스스로도 놀랐다.

주현은 C동에서 11년이나 살았다. 폭주 에스퍼로서는 아주 장수했다고 할 수 있다. 고작 스물다섯 살인 신주현이 장수라니.

“하.”

작은 코웃음에 주현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으나 승철은 모른 척했다. 주현이 오직 봄에게만 그런 소식을 전한 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만큼 현명한 대답을 돌려줄 수 없었을 테니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못난 어른이라 미안했다.

“윽, 이제 손 떼!”

“왜 그러냐, 형님의 손길인데.”

“형님은 무슨…….”

역시나 스킨십을 거절하지 않는 주현을 보며, 승철은 그 예언이 틀리기를 잠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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