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41화
눈이 마주친 봄이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작게 눈짓했다. 오랜 교류가 아니었다면 인사라는 걸 못 알아챘을 터다.
“누나 왜 그래? 다쳤어?”
“이거 내 피 아니야.”
“나도 확인했는데 싹 다 남의 거였다. 걱정 말고 이리 와 봐, 주현아.”
승철의 부름에 주현이 빠르게 거실로 들어갔다. 맨바닥이 차가워 담요를 잘라서 직접 만든 방석에 앉으며 안경을 벗은 그가 테이블로 눈을 돌렸다.
“구해 왔다.”
봄의 목소리는 웬일로 자신만만한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 근엄하기도 했다. 주현은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원통형 캡슐에 시선이 빼앗긴 탓에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캡슐 안에는 연분홍색 액체가 가득 들었는데,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야광 도료보다는 옅지만, 어둠 속에 던져두면 분명히 눈에 띌 정도였다.
“워낙 중독성이 쩔어서 애들 병신 된다고 조직 내에서는 못 쓰게 했다더라. 그래서 구하는데 고생 좀 했어.”
“이거…… 그 마약이야?”
“그래.”
“이딴 걸 주사기로 몸에 넣는다고? 어흐, 색깔 봐라. 불길하지도 않나.”
“구하려고 환장을 한다더라.”
주현이 조심스럽게 캡슐을 집어 들었다. 가볍게 흔들자 부드럽게 흔들리는 액체가 제법 예뻤지만, 정맥으로 밀어 넣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굴리며 이리저리 살펴보던 주현은 라벨에 붙은 자그마한 글자를 발견했다.
“AC-11? 이거 뭐야?”
“그 약 이름인가 봐.”
“……나만 게이트 이름으로 보이나?”
봄도 승철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둘 다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골치 아프고 성가신 표정. 아마 주현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디테일은 좀 다르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게이트 이름은 단순하게 위치로 정해진다. 첫 번째 글자는 A에서 G 중 생성된 지역 이름, 두 번째 글자는 지역 내에서 동서남북 위치, 그리고 해당 지역에서 몇 번째로 발견되었는지에 따라 맨 끝에 숫자가 붙는다.
“쓰레기장은 지역 알파벳이 뭐였지?”
“공식적으로는 C인데, 사실 A에 훨씬 많이 속해 있어. 참고로 이 문제로 두 지역이 엄청 싸웠다더라.”
주현이 미간을 구겼다. 봄과 승철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나도 명백한 표시. 반대로, 지나치게 노골적이라 함정 같은 기분도 들었다.
“어…… 그냥 비슷하게 따라 한 거 아닐까? 그 왜, 향수 같은 데도 게이트 형식으로 이름 붙이고 하니까.”
승철은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자신 없는 얼굴이었다. 작은 등이 켜진 어둑한 방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단순히 에스퍼의 능력이 사용된 게 아니라 협회에 알려지지 않은 게이트까지 섞인다면 일이 커지고 만다. 그 말은 세 사람의 임무가 더욱 복잡해지고 길어진다는 뜻과 같았다. 주현은 그러다 쳐도 일반인 틈에서 언제 폭주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신경 줄이 타들어 가고 있는 봄과 승철에겐 엿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캡슐을 내려놓은 주현이 조금 떡 진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아까 우연히 들었는데, 이 약이 돈 후로 쓰레기장 내에서 가이딩 약물값이 폭등했다더라.”
소정을 슬쩍 떠올린 주현이 양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슬슬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1년의 끝. 흘러가는 사고를 황급히 털어 낸 그가 고개를 들었다.
“쓰레기장에 마약을 즐기는 에스퍼가 얼마나 있을까?”
“셀 수 없겠지.”
“가이딩 약물이 터무니없이 비싸질 정도로 그 수가 늘 가능성은?”
“어느 정도 늘었다 해도 기간이 너무 짧아. 그리고 에스퍼는 가이딩만 받으면 마약이든 뭐든 금방 회복되니까 일반인처럼 깊게 빠지지 않는다고.”
“그런데 왜 값이 올랐지?”
캡슐 속 분홍 액체는 쓰레기장을 혼돈에 빠뜨렸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천진난만한 색이었다. 애초에 마약이 빠르게 퍼지기 위해서는 주사기가 필요한 액체보다는 가루 형태가 지니기도, 보관하기도 쉽다. 단서가 잡힐수록 의문이 커져만 갔다.
한쪽 무릎에 팔을 얹고 골똘히 생각하던 승철이 입을 열었다. 요 며칠간 익숙해진 친근한 거지는 사라지고 수년 동안 사선을 구른 에스퍼가 튀어나왔다.
“가능성은 두 개야. 하나는 에스퍼에게도 제대로 통하는 개쩌는 약이라 해독을 위해 가이딩 약물이 전보다 많이 소모된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게이트가 열렸겠지. 그것도 제법 등급이 높은. 이 이상한 색은 게이트 너머에서 온 거겠고. 돈이 되니까 거길 넘나드느라 약물이 많이 필요한 걸 수도.”
날카롭게 덧붙인 봄의 말에 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나쁜 가정을 굳이 입에 담지 않은 세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면 마약도 일종의 오염이니 정화 능력으로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 가능할 것이다. 심지어 S급이니 안 되는 게 더욱 이상하다. 효진의 능력 한 번이면 인생이 달라질 사람이 무척 많이 있다는 말이다.
생각을 이어 가던 주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서 도망쳤군.’
그녀의 능력은 너무 유용하다. 지나치게 쓸모가 많다. 에스퍼를 도구로 보는 경향이 있는 협회에서 쓸모가 많다는 건 고통받는다는 말과 같다. 특히나 단순히 전투가 아니라 봄과 효진, 리아처럼 특수한 능력이라면 숨도 쉬지 못하겠지.
할 수 있다는 건 해야 한다는 말과 같지 않다. 부자가 기부하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나아질 텐데도 기부하지 않는다고 욕하지 않듯이, 효진이 나서지 않는다고 따질 수는 없다.
쉬운 길로 가려는 자신을 속으로 욕한 주현이 손톱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내일은 바쁠 예정이다.
* * *
그동안 컨테이너 창고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느라 와닿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마약 사태는 큰 모양이었다. 쓰레기장에서도 유난히 질이 안 좋은 지역을 쏘다니던 주현은 두 시간도 안 되어 거리 구석구석에서 약에 취한 중독자를 네 명이나 만났다.
처음에는 시체인가 했으나 가까이 다가가니 흐물흐물 기묘하게 움직이는 걸 보고 중독자인 걸 알았다. 하나같이 침을 흘리며 허공을 응시하는 얼굴이 거부감을 일으켰다. 죄다 상황과 맞지 않게 헤벌쭉 웃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게 좋을걸. 히끅!”
힐끔 옆을 보자 비틀거리며 넘어질 듯 아슬하게 걸어온 중년 남자가 술병을 든 채 웃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겋고 거리가 있음에도 맡아지는 알싸한 냄새를 보면 주정뱅이임이 틀림없다.
주정뱅이, 하물며 쓰레기장 주정뱅이의 헛소리에 어울려 줄 시간은 없지만, 단서가 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게 무슨 뜻이지?”
“정보를 원하면, 끅, 뭐라도 줘야지. 기브 앤 테이크 모르나?”
‘당장 두들겨 패서 아는 거 다 토해 내게 하는 수가 있어’라고 외치는 것과 주정뱅이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중 고민하던 주현은 해가 떠오른 하늘을 슬쩍 본 뒤 주머니를 뒤져 꺼낸 동전 몇 개를 남자에게 던졌다.
적은 돈이 불만스러운지 눈썹을 까딱인 남자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냄새나는 입을 열었다.
“녀석들이 팔에 꽂아 넣은 건 보통 약이 아니야. 무려 에스퍼로 만들어 주는 약이라고. 하하! 지갑 훔치려다 맞아 죽어도 모른다는 말이다. 히끅! 산 채로 내장을 뜯어내는 건 돈 내고라도 구경하고 싶은 광경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기분이 좋으니까 알려 주마.”
주현은 거들먹거리는 듯한 미소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맹수처럼 달려들어 주정뱅이를 붙잡아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벽에 밀어붙여 팔로 목을 누르자 남자가 컥컥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일반인인데 좀 심하다는 자각은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공포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주현은 남자가 얻어 낼 게 없나 머리 굴리는 틈을 주지 않고 곧장 겁먹게 만들어 진실을 말하게 해야 했다.
‘에스퍼로 만들어 주는 약?’
협회였다면 설령 주정뱅이의 헛소리라고 해도 티끌만큼의 의심만으로 당장에 붙잡아 진실을 토해 내라며 손가락부터 잘랐으리라. 그 정도로 큰 사안이었다.
버둥거리던 남자가 쥐고 있던 술병을 휘둘렀다. 정확히 머리 위에서 멈춘 병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술병에 시선조차 주지 않는 주현과 옴짝달싹 못 하는 자신의 팔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기울어진 병에서 싸구려 알코올이 흘러내렸다. 주현은 왼쪽 어깨가 젖어 가는 감각을 무시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하나밖에 없어도 제법 날카로운 인상이기에 충분히 협박이 됐을 것이다.
“약에 대해 알고 있는 거 다 불어.”
안 그러면 죽인다. 진심도 아니니 굳이 덧붙이지 않은 주현이 목을 누르던 팔에 조금이지만 힘을 풀었다. 그 순간, 다시금 움직인 술병이 이번에는 멋대로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 얼굴 옆 벽돌 벽에 그대로 들이박았다.
쨍그랑!
잘게 비산하는 유리 조각에 주정뱅이가 숨을 들이마셨다. 눈앞의 후줄근한 차림새의 남자가 에스퍼라는 걸 깨달은 탓이다. 좀 더 저항할지 고민하는 듯 찌푸린 미간에 주현이 선심 쓰듯 입을 열었다.
“정보만 주면 더는 손대지 않는다. 나는 협회에서 파견된 에스퍼다. 저 마약에 이상한 힘이 있다는 걸 안 협회가 나를 보냈지.”
“협회! 그런가…….”
“무슨 뜻인지 알겠나? 순순히 협력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은 말에 술이 깬 남자가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주현은 일이 쉽게 풀렸다고 속으로 즐겁게 웃었다. 세상에는 말이 통하는 사람과 힘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둘을 섞었을 때, 안 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