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55/161)

폭주 에스퍼 140화

멍하게 발을 옮기다가 버려진 쇳조각을 밟았다. 밑창이 달랑거리는 신발 너머로 제법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피가 나거나 상처가 난 건 아니지만, 둔중한 통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주현에게 어린 시절이란, 이런 눈에 띄지 않는 고통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멍은 이미 지워졌고 흉터는 임무로 생긴 게 훨씬 많다. 이안의 가이딩 덕에 굶고 자란 흔적마저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때때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곤 한다. 10년도 전에 헤어진 사람들이 여전히 밉고 두렵고 미안했다.

주현은 자신이 받은 게 학대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래, 머리로는. 스스로가 피해자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건지, 아니면 마땅한 벌을 받았을 뿐인지 그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아이의 세상은 부모가 전부라는 말이 있다. 새하얀 백지에 가장 먼저 그려지는 건 양육자이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주현의 도화지는 처음부터 새카만 먹물로 뒤덮여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못 했다. 어린 주현은 자신이 아프고 배고픈 게 당연하다고, 모두가 이렇게 산다고 믿었으므로. 그러다 처음으로 그 믿음이 깨진 게, 초등학교에 들어가 온통 사랑받고 자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후다.

여덟 살의 주현은 자존심이 상했다. 배를 곯는 것도, 큰소리로 혼나는 것도, 더러운 옷을 입는 것도, 보살핌받지 못하는 것도, 시선 한 줌 얻을 수 없는 것도, 그 사실에 무척이나 화가 난 것도. 주현은 그 어느 것 하나 용납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 달라붙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현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엄마의 손길도, 새아빠의 미소도 필요 없다. 그는 혼자서도 살 수 있으니 비굴하게 머리 숙이지 않을 것이다. 틀어박히는 차가운 시선을 생각하면 말을 걸고 싶지도 않다. 단지 그런 마음이었다.

결국 온 세상 사람이 부모에게 사랑받는데 나만 못 받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학대라는 걸 인정하면 주현이 부모마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므로.

결국 인생의 첫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말이다.

‘아빠를 죽여서 죄송합니다.’

투둑- 고개를 숙이자 잡초로 뒤덮인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진 게 보였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자 불그스름한 혈액이 자국을 남겼다.

이럴 때면 차인호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다가와 입을 맞췄다. 뜨거운 혀가 상처를 쓰다듬고, 가끔 예쁜 손가락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닥쳐, 꺼져. 그만해.”

질금질금 흘러나오는 피를 거칠게 혀로 핥아 꿀꺽 삼킨 주현이 손등을 옷에 문질렀다. 원래 더러웠기에 얼룩이 더 생긴다고 티가 나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오래 남는다. 세상을 배우는 시기에 각인된 건 긴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아이들은 물건을 훔치는 법과 덜 아프게 맞는 법, 나쁜 어른의 손에서 도망가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학교에 가야 한다. 주현에게 학교란 재미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집보다는 나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계속 살다가 아이들이 에스퍼의 폭주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 번 더 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인 주현이 비릿한 입안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지금은 다른 할 일이 있었다.

* * *

쿵쿵쿵! 쿵, 쿵, 덜컹!

기름칠이 필요한 철문이 슬쩍 열렸다. 수염을 기른 50대 남자가 얼굴만 빼서 재빠르게 주변을 살피곤 주현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조용한 옆집을 힐끔 본 주현이 소정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또 올 줄 몰랐는데. 무슨 일이야?”

효진은 외출했는지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면을 벗은 소정이 의아함과 경계가 반쯤 담긴 눈으로 그를 훑었다.

주현은 말없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밀었다. 의심스럽게 살피던 소정이 낚아채듯 가방을 받았다. 그게 꼭 12년 전 불법 약물을 배달했던 때와 겹쳐 보여서 묘한 감상이 들었다.

“……가이딩 약물?”

“이번 임무로 지급된 거라 질은 좋아. ……아마.”

쓰레기장에 잠입한 첫날. 주현과 봄, 승철은 가이딩 약물을 세 명 몫으로 나누었다. 폭주에 대한 불안함으로 비교적 자주 약물을 맞는 두 사람과 달리, 믿는 구석이 있는 주현의 약은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가방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시선에 괜히 낯간지러워진 주현이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손가락에 목줄이 턱턱 걸렸다.

“괜히 폭주라도 해서 동료가 되는 건 사절이거든.”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내가 폭주를 왜 해?”

“그러니까 그냥 받아.”

소정에게 큰 애착이나 호의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길거리 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돈을 준 사람이 그녀였다. 집에서 뛰어나온 후 밤이 두렵지 않고 허기가 두렵지 않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 안도는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정은 기쁘게 가방을 품에 안는 대신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주현은 헛소리하지 말라고 가방을 내던졌을 테니 상당히 온건한 반응이었다.

주현이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주사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팔뚝을 타고 스며드는 가이딩에 무거운 몸이 조금 가벼워졌다. 사라지는 약물과 주현의 반응을 끈질기게 보던 소정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팔에 걸었다.

“대가는?”

“이미 받았어.”

훨씬 더 과거 일을 칭한 것이지만, 소정은 효진이 그에게 사용한 정화 능력을 말한다고 이해한 듯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야 뭐든 받아 주기만 한다면 상관없다. 주현의 마음이 몇 그램쯤 가벼워졌다.

“안 그래도 요즘 가이딩 약물값이 너무 치솟아서 골 아프던 상황이었는데, 고맙게 받으마.”

“가이딩 약물이 비싸졌다고?”

“그래. 처음 값이 오른 반년 전부터 계속 오르기만 해서 돌 지경이다.”

반년 전이라면 신종 마약이 떠돌기 시작한 시기와 비슷했다.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상황이 퍼즐처럼 딱 맞았다. 설령 그저 신기한 우연으로 끝난다 해도 조사해 볼 가치는 있었다.

“아무튼 이건 이사 선물로 받을게.”

“이사?”

“그래. 현지인조차 아닌 놈이 손쉽게 찾아냈으니 더 꼭꼭 숨어야지.”

두 사람을 위해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과 옆집에 강한 에스퍼가 있어서 안전하다며 웃었던 어린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추스른 소정이 약간 머뭇거리더니 이내 씨익 웃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안 죽고 잘 살아남았구나.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안 와서 틀림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죽을 뻔한 적은 많은데.”

“뭐, 결국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냐. 우리도 그러려고 도망 다니는 거고.”

살아 있다고 칭찬받은 게 처음인 주현이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왜 죽지 않냐고 원망받은 적은 많은데. 주제도 모르고 볼이 간지러웠다.

“늦었지만, 이름이 뭐냐?”

아무리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어도 그런 걸 쉽게 알려 줄 수 없다든가, 어차피 전국에 얼굴 팔린 지 오래라 금방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닦달하지 않고 기다리던 소정은 여전히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쓰레기장에서 오래 산 도망자 에스퍼치고는 퍽 다정한 미소였다.

“……신주현.”

“신주현. 그래. 죽지 말고 오래 살아라.”

폭주 에스퍼의 사망률은 심각하게 높다. 그걸 생각하면 주현은 이미 충분히 오래 살았다. 그리고 예언에 따르면 정말로 죽음이 코앞이다. 그러나 주현은 이 모든 걸 말하는 대신 미래가 있는 사람인 척하며 웃었다.

“누님도.”

“하하!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긴 인사는 필요 없었다. 주현은 망설임 없이 돌아섰고, 소정은 붙잡지 않았다. 길어도 3일이면 집은 텅 비어 사람이 살았던 흔적조차 남지 않겠지. 소정과 효진은 늘 그래 왔듯 이번에도 도망쳐서 협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살 것이다.

“…….”

‘같이 도망칠래요? 다 두고, 차인호와 신주현만 들고 그냥 둘이서 떠날까요?’

고개를 들자 좁다란 골목길 크기의 짙은 검보랏빛 하늘을 어지러운 전선이 가로지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딱 하나 떠 있는 빛나는 점은 별일까 인공위성일까.

‘……그 말은 진심이었을까.’

그때 손을 잡았으면 정말로 함께 도망쳐 줬을까? 아무리 따져도 차인호가 백배는 손해 보는 제안인데. 도망쳤다면 차인호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노력해야 할 터다. 아니, 그전에 목에 걸린 폭탄부터…….

주현이 뜨거운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제법 긴 머리카락이 손등을 스쳤다. 생각해 봤자 이제는 답을 알 수 없다. 썩 알고 싶지도 않고.

스스로를 속인 주현이 안경을 고쳐 쓰며 골목을 벗어났다.

* * *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손톱 모양 달이 선명히 빛을 내며 떠오른 후였다. 봄과 승철에게 알릴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조심스레 집으로 들어간 주현은 훅 풍겨 오는 피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거실에는 어느새 돌아온 봄과 승철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피 냄새의 주인공은 봄이었다. 그녀는 말라붙은 피로 적갈색이 되어 있었는데, 공포 영화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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