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39화
“하아…….”
겨울은 얼른 가을을 몰아내고 싶은 듯, 차가운 바람에 죽은 나뭇잎을 담은 채 불어닥치곤 했다.
천천히 일어나 승철에게 담요를 덮어 준 주현이 다시금 주저앉으며 주머니에 식은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걸리는 작은 물건을 쓰다듬자 어떤 부분은 매끄럽고 어떤 부분은 뾰족했다. 쪼개진 플라스틱이라 어쩔 수 없다.
반란군의 유품을 가만히 매만지던 주현이 목을 젖혀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이라도 저를 좀 믿어 주면 안 돼요?’
함다솔과의 스캔들을 언급하자 차인호가 한 말이다. 그때 차인호는 보는 사람이 슬퍼질 정도로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무엇을 믿으라는 것이고, 또 주현이 믿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게 뭐라고 당신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차인호의 문제였다. 그가 하는 말을 듣다 보면 꼭 신주현이 무언가 중요한 사람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느껴지니까.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괴물을 위해 웃어 주고 울어 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방법이 있기는 한가. 있다면 꼭 좀 알고 싶다.
여기까지는 쉽다. 차인호가 겁이 없는 사람이라 폭주 에스퍼의 곁에서 두려움을 어느 정도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 된다. 하지만 그가 오하경이 되는 순간,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도대체 왜?’
원수라면 그저 미워하기만 하면 될 텐데 어째서 그를 위해 웃고 울었나. 가만히 뒀으면 알아서 죽었을 텐데 왜 밤을 새워 가며 가이딩을 퍼부어 기어코 치명상을 입은 신주현을 살렸나.
무지는 공포와 같은 말이다. 주현은 차인호가 무서웠다. 한 걸음 너머가 도저히 보이지 않는 그가 두려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일 수 있는 연약한 가이드에게서 공포를 느꼈다.
마치 낡은 옷장을 보는 듯했다. 안에서 들리는 사각사각 소리가 단순한 벌레인지, 귀신인지, 괴물인지 몰라 구석에서 울던 다섯 살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차인호의 증오는 진짜였다. 분노도 절망도, 전부 꾸며 낸 게 아니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진짜와 가짜에는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온기를 나누던 그 모든 시간이, 그 모든 미소와 목소리마저 거짓이었냐 묻는다면…….
‘주현 씨는 저를 제법 좋아하시나 봐요.’
만약 그가 주현의 폭주에서 살아남은 <동백 보호소>의 생존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주현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지 않느냐고.
남에게 호의를 받는 게 죽도록 서투른 주현이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차인호가 건넨 감정의 조각은 따뜻하고 달콤했다. 그게 전부 거짓이고 연기라면, 주현은 다시는 타인의 미소를 믿지 못하고 지독한 인간 불신에 걸릴 테다.
“나한테 뭘 원해?”
전부 줄 수 있다. 원한다면 분이 풀릴 때까지 고문해도 좋고, 목숨을 가져가도 좋다. 그런 걸로 죗값을 갚을 수 있을 거라는 배부른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손등으로 얼굴을 마구 문지른 주현이 차인호를 떠올렸다. 그의 눈이 휘어지는 방식, 앞니를 보이며 올라가는 입술의 각도, 손가락이 얽혔을 때의 간지러움, 가이딩과 함께 밀려오는 온기 등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을 생각했다. 신주현을 위해 흐르던 투명하고 맑은, 혀에 닿았다면 분명 짠맛이 났을 눈물. 주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나도 어지간히 미쳤구나.’
주현은 웃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에스퍼의 가이드에 대한 집착은 맹목적이다. 연승철이 가이딩 수치가 떨어져 기어코 폭주할 때까지 서보라의 손을 잡고 싶어 했던 것처럼, 자신이 상대에게 아픈 기억밖에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멀어질 생각이 없는 신주현처럼.
주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철과 봄만큼 가이딩 약물을 자주 맞지 않은 탓에 몸이 무거웠으나 이 정도면 C동에서는 날아다니는 컨디션이다. 거뭇해진 일회용 안대로 눈을 덮은 주현이 겉옷을 챙겨 입었다.
“나가?”
“응. 늦을 거야.”
“그러냐. 조심해서 다녀와라.”
인기척에 깼는지 목소리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주현의 몸보다는 임무와 폭주를 조심하라는 말일 게 분명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보지도 않았으면서 승철이 손을 흔들었다.
제 몫의 임무를 얼추 끝낸 터라 할 일은 없었으나 하고 싶은 일은 있었다. ‘현이 형’과 그가 가져올 음식을 기다리는 아이가 많았다. 마지막으로 안경을 걸친 주현이 문을 열었다.
* * *
쓰레기장도 사람 사는 곳이니만큼 있을 건 다 있다. 구석에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손님들을 감시하는 사람이 에스퍼라는 데 양손을 걸 수 있는 주현이 계산을 마쳤다. 오늘도 봉투가 묵직했다.
능력을 쓴다면 순식간에 도착하겠지만, 안타깝게도 폭주 에스퍼는 억누르는 데 익숙한 이들이다. 그중 대표 격인 주현은 성실하게 걸어서 쓰레기장의 동쪽, 버려진 컨테이너가 쌓인 곳으로 갔다.
녹슨 철문을 두드리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좁은 틈으로 작은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덜컹! 경계심이라곤 한 톨도 없이 입구가 활짝 열렸다.
“형!”
“안녕, 원준아. 기다렸어?”
“현이 오빠 온 거야?”
“오빠!”
원준의 뒤로 달려 나온 아이들이 주현의 손과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하나같이 싱글벙글 웃는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그가 한 일이라곤 가끔 와서 간식거리를 건넨 게 다인데 이토록 정을 붙인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동시에 조금은 과거의 자신이 떠오르기도 했다. 할머니와 나비의 곁에 있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어린 신주현도 비슷한 얼굴이었을까?
대체로 나이에 비해 작은 아이들은 먹성이 좋고 가리는 게 없었다. 주현과 같았다. 슬쩍 웃은 외눈 남자가 익숙한 벽에 등을 기대며 앉았다. 주변으로 모여든 아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자 금세 창고 안이 떠들썩해졌다.
아이들이 냉기도 열기도 잘 막아 주지 않는 컨테이너에 오는 건 대부분 숨을 곳이 필요해서다. 안전한 곳을 찾아 숨더라도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는 건 도망자의 기본 법칙이다.
그걸 사무치게 잘 알고 있는 주현은 아이들이 그를 안전한 보호자로 인식했다는 걸 은연중에 깨달았다.
“진짜? 빵을 세 개나 훔쳤다고?”
“그렇다니까? 그 가게에서 최고로 많이 훔친 애가 두 개인데, 내가 신기록을 세웠어!”
기세등등하게 웃는 얼굴이 땟국물로 더러웠다. 손으로 문지르자 잠시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던 지운이 수줍게 웃었다.
주현도 손이 재빠른 걸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거기에 능력까지 사용하면 못 훔칠 게 없다고 가히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어른이다. 그게 나쁜 짓이라는 것도 알고, 나쁜 짓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주기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주제에 떠들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아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 쓰레기장의 가게 주인이 틈만 나면 물건을 훔치는 쥐새끼를 싫어한다는 건 보지 않아도 알았다. 도망치지 못하고 잡히면 아픈 꼴을 보게 될 터다.
‘하지만…….’
“으음, 형? 뭐 해?”
여전히 볼이 잡힌 채 눈을 깜빡이는 얼굴은 청소년조차 되지 못하는 어린이였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가게 주인이나 쓰레기장의 깡패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아이의 피부는 따뜻했다. 아무리 더럽고 상처가 나도 그것만은 그대로다.
“너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한다고 했지?”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엄마는 누군지 모르고, 아빠는 감옥 갔어. 아! 윤재 아빠랑 같은 감방이다? 신기하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 준다는 듯 떠드는 지운과 옆에서 따라 웃는 얼굴들이 천진난만했다. 주현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밥과 간식을 먹이고 아이들에게 억지로 책을 읽게 한 주현은 작은 창문으로 주황빛이 비쳐 드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가려구?”
“응. 더 자, 아라야.”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온통 잠든 아이들 틈에서 아라가 조심히 기어 나왔다. 가정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귀가 밝은 아이 중에서도 아라는 손꼽을 만큼 예민했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자 아라가 다가왔다. 헝클어진 얇은 머리카락은 손가락 빗질 몇 번에 부드럽게 풀렸다. 가만히 머리를 대 주던 아라가 주현의 옷깃을 잡았다. 어린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사실 주현은 그날 후로 다시는 아이와 가까워질 거라 생각한 적 없었다. 다시 한번 리아의 예언에 감사한 주현이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있지, 요즘에 폭주하는 에스퍼가 많아졌어.”
“……폭주?”
“응. 예전에 비해 많아. 사람도 많이 죽었어. 진짜 조심해. 알았지?”
눈꺼풀이 가볍게 흔들렸다. 마른 입술을 혀로 문지른 주현이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제대로 만들어졌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차오르는 어둠이 얼굴을 숨겨 줬길 바랄 뿐이다.
“그래. 조심할게.”
몇 번 더 확답을 듣고 나서야 아라가 옷자락을 놓았다. 만약 그가 폭주 에스퍼라는 걸 알게 되면 아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지 않아도 알고 있는 주제에.’
괜한 생각을 멈춘 주현이 굽혔던 무릎을 폈다.
“내일 또 와.”
살랑살랑 흔들리는 손가락이 너무 작았다. 주현은 임무를 위해서라지만 멋대로 다가간 걸 후회했다. 이래서야 임무가 끝나고 돌아가면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만 더 얹어 주는 꼴이 된다.
“후…….”
밖으로 나오자 저 멀리서 태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온통 심홍색으로 물드니 쓰레기 더미도 제법 아름다워 보였다. 꼭 세상이 타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