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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153/161)

폭주 에스퍼 138화

가이드의 등급을 따지며 살아올 환경이 아니었던 주현은 A급이고 B급이고, 차이점도 잘 모르고 솔직히 관심조차 없었다.

SS급 정도가 되면 아예 급이 다르니 모를 수가 없지만, 그 밑으로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폭주 에스퍼 따위에게 C동에 온 가이드의 등급을 말해 준 사람이 없던 탓도 있지만, 여하튼 주현은 에스퍼치고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다.

게다가 차인호의 가이딩이 약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는 걸 보면 대놓고 출력이 약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가끔은 가이딩 시간이 길어지도록 좀 더 약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었다.

살다 살다 신주현이 가이드 등급을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망상을 펼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만큼 가이드가 에스퍼에게 끼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그때 유독 자주 만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저와 만나기 위해 다른 가이드를 거부하며 며칠이고 기다리셨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하나도 티를 안 내서 몰랐지 뭐예요.

주현은 잘 모르지만, 그건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가이드가 자주 접촉하며 가이딩을 나누어 준 에스퍼에게 끌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단순히 상대를 자주 만남에 따라 드는 인간적인 호감과는 다르다. 호르몬과 뇌파가 엮인 복잡한 영역이라 아직 정확히 밝혀 낸 사람은 없다고 떠들어 대는 걸 TV 너머에서 봤다.

그나저나…….

“저런 멍청한 짓거리를 왜 한대?”

서보라는 누군가와 매칭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센터에 가서 여러 에스퍼를 가이딩한다. 승철에게 수도 없이 들어서 알고 있다. 스킨십의 정도가 강해질수록 적은 수의 에스퍼를 가이딩하면 되는데, 서보라는 직업 때문인지는 몰라도 만나는 에스퍼가 많은 대신 가장 가벼운 접촉만 한다고 했다.

“악수 한 번 하겠다고 며칠을 기다리긴 왜 기다려. 배가 불러 터졌네. A동 에스퍼는 다 저러나?”

거칠게 흘러나온 말에는 진심도 어느 정도 있지만, 실은 등 뒤에서 착잡해하고 있을 승철을 위로하려는 의도였다. 승철이 움직였는지 옷과 소파 가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말이다. 순 얼간이 아냐.”

“저러다 폭주해 봐야 정신 차리지.”

“미안하다. 정신 못 차려서.”

주현이 머리카락이 흔들릴 정도로 빠르게 몸을 돌렸다. 팔로 제 눈을 가린 승철은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저 사람, 형이야?”

“저런 놈이 한 명 더 없다면, 아마.”

“아, 완전…… 순정이네.”

“솔직하게 말해도 돼.”

“형 등신이야?”

그동안 C동 가족들에게 숱하게 들어왔기에 주현은 A동 에스퍼가 받는 가이딩의 질과 양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받을 수 있는 걸 두고 굳이 참아 가며 염병 떨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폭주했잖냐. 에휴,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주현이 입을 벌렸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틈으로 보이는 귀가 어쩐지 분홍색이었다. 우웩! 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과 등신이냐고 한 번 더 묻고 싶은 마음 사이를 줄타기하던 주현은 불현듯 무언가를 깨닫곤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만약 형이 매칭하자고 했으면 지금 여기 안 있었겠네.”

“엉?”

“그렇잖아. 받아 줬으면 가이딩 잘 받아서 폭주 안 했을 테고, 설령 차였더라도 마음 접고 다른 가이드 만났을 테니까.”

“으음, 그럴지도 모르겠네.”

너무나도 희망적인 가정이었다.

기실 주현을 포함한 폭주 에스퍼는 누구나 자신이 폭주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하곤 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평화롭고, 행복하고, 미래가 있었던 시절이 박살 나지 않고 쭉 이어졌다면, 그랬다면. 그리고 상상의 끝은 늘 차가운 현실이다.

괜히 기분이 가라앉은 주현이 다시금 몸을 돌려 끌어안은 무릎에 턱을 올렸다.

“결국 내 잘못이니까 원망하는 건 없는데, 후회는 좀 있다.”

-1408님, 그거 사랑 아니냐고요?

커다란 손이 머리 위에 턱 올라왔다. 주현은 쓰다듬는 건지 머리를 잡고 흔드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손짓을 거부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겠어요. 한번 물어보고 싶네요.

승철이 말하는 후회가 뭔지 알면서도 모르겠다. 좀 더 용기 내지 않은 거? 괜한 고집 부린 거? 가이딩 수치를 더 신경 써야 했다는 거? 전부 맞는 것 같기도 했고, 죄다 오답 같기도 했다.

-저 사랑하셨어요?

사랑했다. 폭주할 만큼, 그러고도 사랑할 만큼 연승철은 당신을 사랑한다. 저 얼굴을 보면 모를 수가 없다. 팬심 따위가 아니다. 그 어떤 팬이 연예인을 보며 그런 표정을 짓겠는가.

옆에서 보는 주현이 안타까워질 정도로 절절한 마음을 대신이라도 전해 주고 싶었다. 내가 당신 사인 한 장 구해다 주려고 얼마나 얼굴을 붉혔는지 아냐고 따지고 싶었다.

명백한 화풀이다. 주현은 라디오를 켜지 말 걸 그랬다고 혀를 찼다. 차라리 아예 상관없는 에스퍼를 말하며 웃었다면 나았을 텐데. 이래서야 후회만 커진다.

주현은 승철이 기쁨과 설렘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만약 주현이 같은 상황이었다면 딱 그리 느꼈을 테니까. 어쩌면 거기에 분노가 추가될지도 모른다.

가이드는 다 이런가? 남의 속도 모르고 멋대로 헤집는 건 가이드의 버릇이자 공통된 습관 같은 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름 모를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부드러운 멜로디를 멍하게 듣던 주현은 등을 때리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조금만 더 긴장을 풀었다면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이제 와 뭐 어쩌겠냐. 이미 지난 일인데.”

“……표정도 안 보이면서 뭐래.”

“안 봐도 알지. 넌 감정이 얼굴에 다 떠오르니까.”

슬쩍 얼굴을 매만진 주현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늘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다고 자부했기에 선뜻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내가 그런다고?”

“어? 몰랐냐?”

깜짝 놀란 목소리가 아무리 봐도 과장스러워서 주현은 농담으로 치부하며 입을 다물었다. 안대를 벗어 시원한 피부를 문지르며 눈을 감자 조금은 평화롭다는 착각이 피어올랐다. 승철도 생각에 잠겼는지 말이 없었다. 희미한 먼지 냄새가 코를 스쳤다.

머릿속을 ‘정화’ 받은 후로 두통이 확연히 사라졌다. 가이딩 부족에 따른 따끔따끔한 고통은 어쩔 수 없지만, 마치 뇌 안쪽을 주먹으로 때리는 듯한 둔중한 통증은 씻은 듯이 없어졌다.

뇌를 갈아 끼운다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정확히는, 끄집어내서 물로 씻은 다음에 다시 밀어 넣었다는 게 맞으려나? 기분 탓인지 시야마저 선명했다. 주현은 수년 만에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머리로 오래도록 반추했다.

차인호, 오하경, <동백 보호소>, 홍연우, 선생님, 폭주. 문제가 생기면 도망치는 버릇이 있는 주현은 지금이 아니면 더는 곱씹을 기회마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한폭탄은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줄어드니까.

하지만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미궁이었다. 주현은 차인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당신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오로지 심증뿐이니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동안 괴물의 공격과 날아드는 총알을 숱하게 피하게 해 준 직감이 차인호는 오하경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왜 홍연우와 닮은 눈, 닮은 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 그건 일단 넘겨두고, 차인호가 오하경이라면 그는 왜 주현의 앞에 나타났을까. 우습게도 거기서부터 막혔다.

‘화제성 좀 얻겠다고 원수와 매칭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만약 주현이 그의 입장이었다면 물 떠다 놓고 상대가 고통스럽게 죽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가짜로라도 웃어 주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매칭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현은 차인호가 왜 하필이면 폭주 에스퍼와 계약한 건지 의심했었다. 마땅한 의심이었다. 다만 무언가 깨달음을 얻기도 전에 달콤한 가이딩에 푹 빠져 뭐든 상관없다며, 그저 내가 운이 좋았나 보다 지껄이며 생각 없이 웃었다.

“멍청하긴…….”

만약 그때 더 의심했다면, 그래서 차인호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경계심이 더 컸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나았을 텐데. 미련이 생기지 않아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 텐데. 좀 더 단순하게 살다 갈 수 있었을 텐데.

폭주 에스퍼가 한껏 몸을 말았다. 목에 채워진 금속 목걸이가 어깨에 닿아 불편했으나 이제 와 신경 쓰기에도 지쳤다.

‘왜 말하지 않았을까. 왜 나에게 왔을까. 왜 모른 척했을까. 왜 제대로 숨기지 않았을까. ……날 보며 재밌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불현듯 미움이 차올랐다. 차인호는 그저 입을 다물었을 뿐인데 꼭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까닭으로. 차인호가 듣는다면 억울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뒤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승철이 확실하게 잠들었다. 어느새 라디오에서는 이름 모를 남자가 사연을 읽고 있었고, 두 커튼이 닿는 약간의 틈으로 나른한 햇살이 밀려들어 기어코 이 꿉꿉한 방까지 비추었다.

정화. 더러운 걸 깨끗하게 하는 힘. S급도 별것 아닌가 보다. 이 더럽고 불순한 감정은 무엇 하나 지워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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