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52/161)

폭주 에스퍼 137화

“정확히 뭐라고 생각해?”

“잘은 모르겠지만, 세뇌나 암시 종류인 것 같아요.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쯧, 쓰레기 조직답네.”

고개 숙인 채 웅크린 주현은 두 사람의 목소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두개골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감당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협회의 명령은 절대적? 웃기고 있네. 테이블에 엎드려 머리카락을 움켜쥔 주현이 이를 악물었다. 손에서 힘을 풀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잔뜩 굳은 몸이 가늘게 경련했고, 마침내 가장 안쪽에 묶여 있던 무언가가, 기억이, 사고의 뒤틀림이 붕괴했다.

“윽…….”

붕대를 얼굴에 감은 소년이 나왔다. 원장 선생님이 나왔고, 뒤를 따라 부원장 선생님, 혜린, 민재 등 동백의 아이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제멋대로 빗은 갈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주현을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하경. 신주현이 잊고 있던 소년. 거칠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얼굴도, 목소리도, 심지어는 성격마저도 다르다. 그런데 어째서 주현은 그가 차인호라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이 강렬한 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지?

‘우리, 자살만은 하지 말자.’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 아이답지 않은 지친 눈동자. 동백 보호소 뒤로 펼쳐진 낮은 산에는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다. 근처 바위에 앉은 주현은 굳건한 목소리에 잠시 숨을 멈췄었다.

그 말을 한 건 홍연우가 아니었다. 왜 그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아마 주현의 뇌가 억지로 잠긴 기억의 공백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은 기억을 자연스럽게 연결한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쿵! 테이블에 강하게 부딪힌 이마가 욱신거렸다. 그래 봤자 지금까지 감당하던 두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주현은 한 번 더 이마를 내리찍었다.

“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설마, 폭주?!”

“언니,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차인호는 그가 누구인지 주현이 알게 될 때까지 과거 이야기를 하지 말자고 했었다.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지만, 그때 주현은 안도하고 말았다. 그의 죄악을 피해자 앞에서 마주 볼 용기가 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르는 척 눈감고 있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하경은 눈을 감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잊고 있었나 궁금할 정도로 피로 흠뻑 젖은 갈색 머리카락이 생생히 떠올랐다.

쿵! 찌르르한 이마를 무시하며, 주현은 테이블에 다시 한번 머리를 박곤 눈을 꾹 감았다.

* * *

“하아…….”

“밥상머리 앞에서 한숨 쉬지 마라.”

봄의 타박에 고개를 까딱인 주현이 다시금 숟가락을 움직였다.

봄의 능력으로 그럭저럭 쓸 만하게 변한 테이블은 크기가 작아서 그릇이 다닥다닥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겠지만, 주현은 그게 좋다고 생각했다. 11년 동안 혼자서 밥을 먹었으니까.

“돌아가면 또 맛대가리 없는 도시락만 먹어야 하네. 그거 생각하면 가기 싫다.”

승철이 탕수육을 집어 들며 말했다. 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면서 썩 영양가 있고 맛있는 걸 먹으며 자라지 못한 주현에게 식사란 그저 죽지 않도록 배를 채우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협회의 도시락에도 별 불만이 없었다. 정확히는 11년 동안 먹어 왔기에 완전히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다.

주현이 제 그릇을 바라보았다. 중국집 음식을 먹어 본 적이 거의 없어서 이곳에 있는 동안 도장 깨기를 하듯 매번 다른 걸 시켰다. 오늘은 잡채밥 차례였다. 솔직히 썩 맛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따뜻해서 좋아.”

“그렇지? 하다못해 좀 데워 주기라도 하면 어디 덧나나.”

“전자레인지 하나 들여놓으라고 두식이한테 항의하든가.”

“다 같이 한 번 뒤집어엎어 봐?”

그랬다가는 제 안위를 무지하게 챙기는 두식이 폭탄을 터뜨리는 버튼을 눌러 죄다 머리가 날아갈 것이다. 전자레인지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봄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가 드물게도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런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마약 유통 경로만 알아내면 임무는 끝나고, 봄의 말에 따르면 거의 잡았다고 했으니까. 길어야 나흘이면 C동으로 돌아가게 될 터다.

‘그리고 차인호를 만나겠지.’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과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마음속에서 뒤얽혔다. 그가 이렇게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나? 아니면 상대가 상대라서 그런 건가.

차인호. 오하경. 갈색 머리에 늘 장난만 치던 한 살 위의 형.

주현은 늘 자신을 놀려 먹는 하경에게 자존심이 상해서 웬만하면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싫었던 건 아니다. 한편으로는 의지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연애 감정을 가진 적은 없는데. 그렇지만 차인호는…….

“너 왜 얼굴이 빨개?”

고개를 들자 봄 특유의 안쪽으로 갈수록 붉어지는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주현은 시선을 피하며 볼을 문질렀다.

“이게…… 좀 맵네.”

“뭐? 잡채밥이 맵다고?”

주현은 대답하지 않고 서비스로 딸려 왔다는 만두를 입에 밀어 넣었다. 이틀 전 주문했던 짬뽕을 먹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씹은 만두에서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났다.

* * *

“그럼 다녀올게. 사고 치지 말고 있어.”

임무를 위해 오늘도 어딘가 졸부 같은 옷을 입은 봄이 집에서 나갔다. 지나치게 빛을 반사하는 보라색 정장과 선글라스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별로 웃기지 않았다.

“나는 잠이나 더 자야겠다.”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한 승철이 배를 벅벅 긁으며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우리가 잠입 임무를 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열불을 터뜨리던 사람치고는 무척 만족스러운 모양새였다.

애초에 임무를 수행할 생각이 없었던 주현과 가장 쉬운 제비를 뽑았던 승철은 봄이 돌아오는 오후까지 할 일이 없었다. 주현은 거실 커튼을 슬쩍 열어 밖을 살폈다. 봄이 아무 일 없이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그가 커튼을 여미곤 승철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자 어쩐지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구멍 난 옷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무릎을 긁적이곤 라디오를 집어 드는 손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얼마 전 승철이 버려져 있던 걸 주워 온 고물 라디오는 봄의 능력으로 중고같이 변했다. 비록 새것 같지는 않아도 최소한 쓰레기는 벗어났다.

잠시 지직거리던 라디오는 곧 주파수를 찾아 그럭저럭 괜찮은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주현은 승철을 생각해 볼륨을 줄일까 하다가 그만뒀다. 이 시간이면 그게 시작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셨군요. 저도 바다 좋아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경험하고 오신 것 같아서 부러워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어둑한 방을 부드럽게 채웠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라디오 쇼로, 이름은 <서보라의 모닝커피>다. 우연히 찾은 날 후로 누구도 말하지 않았으나 자연스레 이 시간이 되면 라디오를 켜게 되었다.

-1108님께서 보내주셨네요. ‘보라 언니, 가이드로서 많은 에스퍼를 만났을 텐데 기억에 남는 에스퍼가 있나요?’ 어우, 물론이죠. 에스퍼분 중에 워낙 개성 강한 분들이 많아서 깜짝 놀란 적도 많거든요.

잔다던 승철의 숨소리는 느리고 일정했으나 잠든 사람의 숨결과는 달랐다. 주현은 굳이 꼬집지 않고 무릎에 턱을 올렸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째깍째깍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음, 그래도 한 명만 고르자면, 딱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요. 그분은 그다지 말투나 겉모습이 특이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네요. ……이제는 못 만나게 되어서 그런 걸까요?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전파를 타고 폭주 에스퍼들에게 닿았다.

주현은 승철이 어떤 기분일지 잠시 생각했다. 그가 서보라를 좋아하는 마음이 연애적인 것인지, 혹은 연예인을 향한 팬의 마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뭐가 되었든 좋아하는 가이드가 누군지도 모를 에스퍼를 언급하고 있는 현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으리라.

만약 차인호가 같은 행동을 했다면, 주현은 홀로 화를 냈다가 이내 자괴감에 빠져 방구석에서 등신처럼 웅크릴 것이다.

-만약 이 라디오를 듣고 계신다면,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B급이다 보니 가이딩 출력이 약하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그런데 항상 아주 좋다고, 정말 고맙다고, 막, 날아갈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해 준 에스퍼는 당신이 처음이었어요. 별것 아닌 말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정말 기뻤거든요.

서보라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냥 싸구려 라디오의 음질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단 듣기로는 제법 진정성이 있었다.

주현은 가이드의 기분을 모른다. 딱히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만나서 좋았던 적이 없던 놈들의 입장을 상상하며 이입하고 슬퍼하는 데 시간을 쓸 바엔 퍼질러 자는 게 훨씬 낫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란 본디 자신의 입장만 눈에 들어오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제 신주현에게는 매칭 가이드가 생겼다.

‘……B급이 많이 힘드나?’

지문이 닳을 정도로 힘든 일을 거친 손가락이 턱에 닿았다. 주현의 미간이 가볍게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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