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36화
소정이 효진의 손을 잡았다. 약지에 낀 반지가 형광등 아래에서 반짝였다.
복잡한 눈빛에 효진이 안심시키듯 웃었다. 그 미소에는 어딘가 차인호를 닮은 구석이 있었고, 주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
하지만 맹세를 굳이 입에 담을 필요는 없다. 주현은 턱을 약간 들고 표정을 굳혔다. 아무리 너덜너덜한 꼴을 하고 있어도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살인자이자 폭주 에스퍼다.
“나는 협회에 소속된 몸이고, 내 안전을 위협받으면서까지 비밀을 지켜 줄 의리는 없다. 그걸 알면서도 말하고 싶은 건가?”
“그래.”
“……어째서?”
“너는 폭주 에스퍼니까.”
거칠게 껍질이 일어난 입술이 다물렸다.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주현을 빤히 보던 소정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등 뒤의 소파에 팔을 걸쳤다. 껄렁한 자세와 남을 무시하는 표정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애송아. 여기는 쓰레기장이다. 에스퍼, 가이드, 일반인 구분 없이 뒤엉켜서 사는 곳이란 말이다. 그리고 경험상 협회를 좋아하는 에스퍼는 많이 없고, 협회를 좋아하는 폭주 에스퍼는 한 명도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소정과 효진은 애초부터 주현을 썩 의심하지 않은 모양이다. 어쩐지 오랜 시간 숨어 산 사람들치고는 지나치게 빨리 자신의 패를 드러낸다 했다. 별다른 검증 없이 쉬이 믿어 주기도 했고.
작은 미소를 지은 효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 능력은…….”
* * *
“이렇게 하는 거지.”
“괜찮네. 주현이 생각은 어때?”
“…….”
“주현아.”
“…….”
“신주현!”
어깨를 흔드는 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주현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를 바라보는 봄과 승철의 시선이 따가웠다. 무표정으로 콧등을 긁적인 주현이 툭 내뱉었다.
“나도 그걸로 먹을래.”
“……우리 무슨 대화 하고 있었는데?”
“점심 메뉴 정하는 거 아냐?”
“아니거든.”
한숨을 내쉰 승철이 주현의 더벅머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변장을 위해 지저분한 상태임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머쓱하게 시선을 피한 주현은 내심 잘못 찍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폭주 에스퍼가 밖에서 외식할 기회는 0에 수렴한다. 차갑게 식은 허접한 도시락만 먹다가 밖으로 나와 마음대로 메뉴를 골라 음식을 먹는다는 일에 세 에스퍼가 신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쓰레기장이라도, 아니, 오히려 여러 사람이 몰리는 쓰레기장이기에 괜찮은 식당이 많이 있었다. 위생은 의심되지만 그런 걸 가릴 처지도 아니라 매번 식사 시간마다 세 사람은 진지한 회의를 거쳐서 메뉴를 정했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라 회의 중일까 했는데 틀리고 말았다. C동에서 할 일 없이 놀 때도 아니고 엄연히 임무 중에 정신 빼놓고 있었다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았건만.
“네가 맡은 임무는 어떻게 되어 가?”
봄의 질문에 주현은 속으로 말을 골랐다. 어젯밤에 워낙 충격적인 일을 겪은 터라 보고하는 것조차 잊었다. 봄과 승철에게 사실대로 말한다면 그들도 잘했다고 말하겠지만, 위험한 정보는 짐이 된다. 결론을 내린 주현은 약간 뚱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에 턱을 기댔다.
“서류에 적힌 소문은 전부 거짓이었어. C등급의 환영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있었는데, 그 사람 때문에 소문이 부풀려서 난 것뿐이야. 복제 능력 에스퍼는 없는 것 같아.”
거짓말을 할 때는 진실을 어느 정도 버무려야 안 들키는 법이다. 주현이 조사한 C등급 에스퍼는 2년 전에 사망했다.
봄과 승철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 정보랍시고 받은 게 워낙 터무니없어서 누구도 정말 찾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은 탓이 컸다.
“봄이 네 임무만 신경 쓰면 되겠다. 이제부터는 셋이서 할 테니까 빨리 끝나겠어.”
“나 혼자서도 충분해. 대충 윤곽은 잡혔고, 확실한 정보인지 확인만 하면 끝나.”
다시금 회의를 이어 가는 두 사람을 힐끗 살핀 주현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도경에게서 들은 정보는 조금 있다가 전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지금은 너무 지쳤다.
고개를 돌리자 커튼 너머로 희미한 햇볕이 초라한 방 안을 밝혔다. 지저분한 벽지의 얼룩을 눈으로 따라가던 주현은 구석에 놓인 가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이딩 약물이 가득 들어 있던 가방도 어느새 절반으로 줄었다. 아주 많은 양이었지만, 워낙 폭주에 대한 불안이 커서 그런지 생각보다 소모가 빨랐다. 주현도 예언을 듣지 못했다면 시도 때도 없이 주사기를 찔러 넣었을 테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주현은 지금 당장 그것보다는 가이딩하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사람을 곱씹느라 바빴다.
‘차인호. 아니…….’
“오하경.”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점심 메뉴 생각 중이었어.”
“진짜 배고픈가 보네. 그럼 밥부터 먹고 이어서 할까?”
완전히 거지꼴에 익숙해진 승철이 C동에 있을 때보다 좀 더 길어진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든가. 나는 삼선짬뽕.”
“또 중국집? 봄아, 딴 거 좀 먹자.”
“난 잡채밥…….”
“주현이까지? 어휴…….”
투덜거리면서도 주문하는 승철을 곁눈질로 살핀 주현이 카펫이 깔린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냥 전부 잊고 싶었는데, 깨끗하고 맑은 머리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오하경. 하경이. 하경이 형.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장난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무척 상냥하게 웃는 소년이었다.
누군가 도려낸 듯 오직 그만을 깨끗하게 잊어버리는 건 어떻게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단 한 사람만을 머릿속에서 빼냈다는 점에서 다분히 의도적인 일이라는 게 느껴졌다.
기억을 없앴다는 건 정보를 차단하고 싶다는 뜻이고, 반란군의 정보를 지운 사람은 당연히 반란군일 터다. 하지만 주현은 과거 그들과 엮인 기억이 없다.
‘협회에 반란군이 잠입해서 머릿속을 뒤적인 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했을까. 알아챘다고 어디 가서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워낙 파격적인 정보라 지우고 싶은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주현 때문에 잠입한 게 아니라 애초에 잠입한 상태였다면 겸사겸사 기억을 지운다고 반란군이 손해 볼 건 없다.
더러운 바닥에 그냥 눕지 말라는 승철의 외침을 무시한 주현이 한껏 몸을 웅크렸다.
“하경이 형이었구나…….”
감탄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주현은 거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미소를 지으려는 듯 올라가던 입꼬리는 애매한 지점에서 멈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약간 싸늘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 * *
“……정화?”
“그래. 서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 ‘Purify’.”
“참고로 S등급이라고.”
자신의 능력도 아니건만 어깨를 으쓱이는 소정에 효진이 까르르 웃었다. 참 잘 맞는 한 쌍이었다.
능력에 상관없이 S등급 이상은 귀한 취급을 받는다. 특히나 전투에 특화된 능력도 아닌데 어쩌다 쓰레기장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의 과거를 파헤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주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정의 손을 주무르던 효진은 남은 손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그를 기민하게 눈치채고 공격한다면 방어하기 위해 긴장하던 주현은 효진의 목소리에 움찔 떨었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너 좀 더러워.”
“……아무래도 쓰레기장에 잠입한 거라서. 평소에는 좀 더 잘 씻고, 옷도-”
“하하, 그게 아니라 너에게 음, 네 것이 아닌 파장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게 느껴지거든. 두통이 심했을 것 같은데. 아니야?”
두통은 가이딩 부족의 대표적인 증상으로, C동에 있는 에스퍼라면 누구나 떨어지지 않는 친구처럼 여긴다. ……하지만 주현에게는 매칭 가이드가 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합리화로 물리치려던 주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의심스러운 일은 많았다. 다른 걸 다 제치더라도 일단 주현은 수년간 실험실 쥐새끼 신세였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협회가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주현은 아무것도 모른다.
“능력을 써 줄게.”
“…….”
“미리 말해 두지만, 이건 공짜가 아니야.”
주현의 머릿속이 어떻게 오염되어 있든, 자신이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말투였다. 그렇게 대단한 능력자인 걸까? S급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저 자신감은 오만이 아닐 터다.
효진이 가까이 다가왔다. 가녀린 몸이지만 기세만큼은 제법 대단했다.
“착한 아이라면 은혜를 모르는 척하지 않겠지?”
빚이라는 말이었다. 주현에게 빚을 달아서 좀 더 확실하게 입막음하겠다는, 무척 다정하고 힘없는 협박. 총구를 이마에 들이미는 협박밖에 모르는 주현은 어떠한 대답도 내뱉지 못했다.
부드러운 손이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 곧 그 손에서 흰빛이 터져 나왔고, 주현은 눈을 부릅떴다. 만약 그가 하늘이 되어 먹구름이 물러가는 걸 느낀다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말 그대로 둑이 터졌다. 쏟아지는 물이 머릿속을 채우고, 주현조차 모르게 쌓였던 불순물이 사라졌다. 가이딩이 채워지며 날뛰던 파장이 가라앉는 것과는 달랐다. 자물쇠가 풀리고 억지로 비틀어지던 사고가 올바르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