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35화
“이야, 와, 이야! 많이 컸네! 그땐 진짜 쪼그맸는데!”
남자의 말투가 바뀌었다. 방금까지의 경계심은 어디 갔는지, 호탕하게 웃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던 여자가 남자의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응? 아, 맞다. 크흠, 그런데 10년 만에 불쑥 찾아올 정도로 우리가 친밀한 사이던가?”
“왜 얼굴이 그대로인지 털어놓으면 나도 말할게.”
주현을 노려보던 남자가 슬쩍 몸을 틀어 효진과 시선을 맞췄다. 두 사람은 눈짓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곤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오래된 인연임이 틀림없었다.
찌이익- 남자가 자신의 턱 부근을 잡고는 그대로 뜯어냈다. 적진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으로 긴장하지 않았다면 주현은 입을 떡 벌렸을 것이다. 살가죽, 아니, 가면을 벗어 낸 에스퍼가 개운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흔들렸다.
“총 다섯 개의 가면이 있고, 이게 그중 하나야. 몇 년씩 돌아가면서 쓰는데 용케 타이밍이 맞았네.”
드러난 건 어딘가 호쾌함이 느껴지는 여성의 얼굴이었다. 주름이 많지는 않지만 노련함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40대 정도로 추정되는 여자는 약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얼굴은 그렇다 쳐도 목소리와 체격은 왜 같이 바뀌는 거지?”
“에스퍼가 만든 거니까. 옛날 친구들이 함께 만들어 줬다.”
“그런 능력은 들어 본 적 없는데.”
“능력 여러 개가 섞인 거니까 모를 수밖에.”
능력을 섞었다고? 주현은 그런 게 가능하냐는 생각을 일단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은 호기심을 채울 때가 아니었다.
“민낯을 나에게 보여 줘도 되는 건가?”
눈앞의 노련한 에스퍼가 웃었다. 살인에 익숙하지 않다는 말은 전투에 낯설다는 말과 같지 않다. 상대는 주현을 ‘인간’으로 보고 있기에 움직임에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없애야 할 적, 즉 괴물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쪽이 까발렸으니까, 그쪽도 다 뱉어 내야 공평하지.”
이야기를 듣고 주현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목적인지 안 후에 망설이지 않겠다는 의지. 주현은 이게 협박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까 그녀를 말렸던 효진도 동의하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위협을 살려 두느니 동료의 원망 몇 마디 듣는 게 낫다.
“안 그래? 폭주 에스퍼.”
주현은 놀란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한 얼굴로 두 사람을 살피던 효진이 놀라서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한때 주현에게 용돈이랍시고 원래 주기로 한 돈에 몇 장 더 얹어 지불하던 에스퍼가 검지를 까딱였다. 그 끝이 향한 곳은 주현의 목 부근이었다.
“그 목줄에 관한 이야기가 쓰레기장까지 흘러 들어왔다. 협회는 여전히 지저분한 모양이군. 아무튼, 이제 말해 봐라 꼬맹아. 왜 여기에 온 거냐.”
정체를 들켰어도 아직은 주현이 훨씬 유리한 입장이다. 밖에서는 쓰레기장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고, 안에서는 각자 살기 바빠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거기다 두 사람은 도망자 신분이다. 말 잘 듣는 개, 혹은 아무 곳에나 벅벅 닦는 걸레 취급을 받더라도 일단 협회 소속인 주현이 갑이었다.
“……복제 능력을 가진 에스퍼의 정보를 가져가는 게 임무였다. 당신이-”
“누님이라고 불러라. 소정 누님.”
“당신이 그 에스퍼인 줄은 몰랐어.”
“버릇없는 녀석.”
소정의 입가에는 미소가 있었으나 즐거움은 담기지 않았다. 분위기가 차게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그것도 협회가 자신을 노린다는 소식에 떨지 않을 사람은 없다.
온기가 거의 사라진 컵을 손으로 감싼 주현이 검은 렌즈로 덧씌워진 눈동자를 움직였다. 심각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효진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제 와 그 정도로 양심이 찔리는 건 아니지만, 조용히 살던 이들의 집에 들이닥친 건 주현이다. 상황을 생각해 봤을 때 좀 더 정보를 푼다고 대단한 뒤통수를 맞지는 않을 터다.
“이건 협회에서 내린 임무가 아니야. 민간 기업에서 협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준 임무다. 그래서 반드시 데려오라는 말도 없었고, 그저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느낌이었어.”
“민간 기업? 협회도 갈 데까지 갔군.”
혀를 차면서도 소정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협회는 한 번 갖기로 정한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으려 애쓰는 미운 일곱 살짜리와 같다. 잔인하고 이기적이라는 말이다.
“저기, 그 소문이라는 건?”
내내 침묵하고 있던 효진이 몸을 약간 내밀며 물었다. 폭주 에스퍼에 대한 공포가 소정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흐려졌을지도 모른다.
“하나같이 터무니없고 추상적인 것뿐이라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럼 여기는 어떻게 찾아온 거냐.”
주현은 고민했다. 벽 너머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도경을 생각하면 입을 닫는 게 맞다. 물론 말한다면야 두 사람은 비교적 쉽게 경계심을 풀겠지만, 그게 아이의 안전을 위협하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날뛰었다면서? 특히 철물점 앞에서는 난리도 아니었다던데.”
뜬금없는 말에 비슷한 각도로 고개를 갸웃하던 소정과 효진이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효진이 소정의 팔뚝을 잽싸게 꼬집었다.
“그러게 제가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요!”
“아야, 아야! 시비가 걸렸는데 어떡해, 아!”
“당신이 에스퍼라고 소문이 쫙 나서 찾다 보니까 이 집에 에스퍼가 한 명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어서 찔러 봤을 뿐이지, 정확히 알고 온 건 아니야.”
“그럼 효진이 능력이 뭔지는 모른다는 말이냐?”
방금까지 엄살 피우던 사람답지 않은 진중한 목소리였다. 눈앞의 여인은 상대를 물어뜯을 준비가 된 에스퍼다. 아무리 전투에 쓸모없는 능력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에스퍼의 신체는 일반인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인하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걸 본능으로 알았다. 가뜩이나 주현은 협회에서 보낸 폭주 에스퍼니까 말이 퍼지기 전에 해치우는 게 쉽고 빠른 일이긴 하다. 혹시 모를 싸움에 대비해 은근히 상체를 숙인 주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가정이었을 뿐이니까. 복제 말고 다른 능력에 대해선 못 들었다.”
두 에스퍼의 시선이 허공에서 진득하게 이어졌다. 먼저 눈을 깜빡인 건 소정이었다. 그녀는 힘이 들어가 근육이 부풀어 오른 팔로 자신의 곱슬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디서 어쩌다 우연히 들었냐고 더 캐물을 줄 알았건만. 분위기가 풀어진 걸 느낀 주현이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방석 모서리에 달린 술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협회에서 복제 능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일단 정보가 들어간 이상 좀 더 몸을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사정은 알았다. 그런데 우리가 너를 어떻게 믿지?”
“나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야. 믿든 말든 상관없어. 그저 협회 좋은 꼴을 보기 싫을 뿐이다. 물론 복제 능력자를 찾았다는 걸 알릴 생각도 없어.”
머리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팠다. 협회의 명령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마음속 외침이 거슬렸다. 스스로의 바람이자 당연한 상식으로 느껴짐에도 감정은 정반대를 토해 내는 게 이상했다.
감정의 손을 들어 준 주현이 하나뿐인 눈을 깜빡이며 두 사람을 살폈다.
믿든 말든 상관없다는 말은 사실이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신뢰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소정은 괜한 일에 휘말리지 않아서 좋고, 주현은 후에 복제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실제로 쓰레기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켜서 임무를 소홀히 했다며 혼나지 않아도 되어서 좋고.
‘혼나기 전에 죽을 것 같기는 하지만…….’
끝은 머지않았다. 주현은 이유도 모른 채 확신했다. 세상은 그를 더 오래 살려 둘 이유가 없다. 애초에 태어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최근 주현은 그에게 무척 익숙한 감각인 체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없앨 방법은 없고, 차인호는 주현을 원망하고, 주현은 젊어서 죽고, 심장은 여전히 뛰어 대고. 무엇 하나 좋은 일이 없다.
예전에는 매칭 계약이 끝날 때까지는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아니다. 주현의 존재가, 그가 살아 숨 쉬는 자체가 차인호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니 욕망조차 싱거워졌다.
“믿으마.”
“언니!”
“괜찮아. 옛날에 대화를 많이 나눈 건 아니지만, 나쁜 꼬맹이는 아니었거든. 사람은 쉽게 안 변해.”
지저분하고 늘 뚱한 표정을 짓고 다니는 삐쩍 마른 어린애를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동백 보호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할머니를 제외하고 어른의 호의를 받아 본 적 없는 주현은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가슴 속에 들어앉은 어린 자신이 슬쩍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썹을 약간 구긴 채 골똘히 생각하던 효진이 고개를 들었다. 결심이 깃든 단호한 눈빛이었다.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 능력에 대해 알려 줄게. 나만 입 다물고 있는 건 싫고, 또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것 같지는 않으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 나도 성의를 보여야지. 그리고 차에 약 넣은 게 미안하기도 하거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가 컵 안에서 출렁였다. 워낙 험한 꼴을 많이 겪은 탓에 주의했을 뿐, 효진의 태도가 자연스러워서 정말로 뭔가를 넣었을 줄은 몰랐는데. 아연한 주현의 시선에 효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냥 수면제야. 에스퍼도 잠재우는 엄청 강한 수면제. 네가 잠들면 내던지고 야반도주할까 했지. 결과적으로는 안 마셔서 다행이지만.”
살벌한 내용과는 달리 무척 부드러운 중얼거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