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34화
“거짓말 아니야! 쓰레기통 뒤져서 깨진 접시랑 비교도 했는걸?”
“……옆집이었냐.”
“응?”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마법 같은 일이네.”
“그치?”
싱글벙글 웃는 도경에게 마주 미소 지은 주현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에스퍼를 잡아간다면 반란군은 몰라도 협회 쪽에서는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못 찾았다고 넘길 생각이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서 얻은 정보는 죄다 터무니없거나 관련 없는 헛소문들이기도 했고.
하지만 바로 옆집에 타깃이 있다는 말을 들어 버렸으니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수년간 말 잘 듣는 개로 살며 강박이라도 생긴 걸까? 어쨌든 도경을 비롯해 근처 주민을 위해서라도 확인 정도는 해 두는 게 좋았다.
생각을 마친 주현이 천천히 일어났다.
“나는 이만 갈 테니까 너도 얼른 자.”
“벌써 가게?”
“지금 몇 시인지 알아? 곧 있으면 해 뜨거든.”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인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고민한 주현은 그냥 손을 내렸다. 만약 옆집에 있는 사람이 정말 타깃이라면 더는 아이들의 아지트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진다. 주현은 어딘가 허전한 손을 말아 쥐곤 도경의 배웅과 함께 집에서 나왔다.
끼이익- 쿵!
음산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고, 그 앞에 선 주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지워졌다. 차게 식은 시선이 옆집에 닿았다. 스스로가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 주현은 큰 기대는 하지 말자고 자신을 다독였다.
이왕이면 해가 뜬 낮에 차분하고 정중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그리 원활하게 진행되지는 않을 터다. 그렇다면 차라리 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이 애매한 시간이 낫다.
‘도경이네 집에 가려다 실수로 집을 잘못 찾았다고 하자.’
이런 좁은 곳에서 싸울 수는 없고, 설령 바로 쫓겨난다 해도 일단 얼굴만이라도 봐 두겠다는 작전이었다. 쓰레기장치고는 건실한 놈으로 보이기 위해 옷매무새를 다듬은 주현이 안경을 추켜올리곤 철문을 두드렸다.
콩콩콩.
“…….”
콩, 콩, 콩.
“…….”
쿵! 쿵!
덜컹, 문이 열렸다. 주현은 최대한 선량하면서도 당혹감을 내포한 표정을 지었다. 아는 꼬마 집을 잘못 찾은 멍청한 놈 연기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여기 도경…….”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주현은 눈앞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50대 남성.
“뭐냐?”
어쩐지 낯이 익었다.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라고 자부하는 주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의 미간이 조금 더 구겨졌다. 한 번 더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은 주현이 눈을 깜빡였다.
“아저씨. 왜 얼굴이 그대로야?”
“뭐?”
“벌써 10년이나 지났는데.”
눈앞의 남자는 가출 청소년 주현이 불법 가이딩 약물을 배달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과거와 똑같은 얼굴이 당황으로 굳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주현에게 처음으로 큰돈을 건네준 사람이니 잊었을 리가 없다. 어렸을 때는 올려다보았던 사람을 지금은 내려다본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침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주현을 살피던 남자가 문을 닫으려고 했다. 주현은 황급히 발을 끼워 넣어 묵직한 통증을 견디며 다시금 문을 열었다.
“안 꺼져?”
“잠시 대화나 좀 합시다.”
“두들겨 맞고 싶은가 보군.”
“일단 들어 두는 게 좋을걸.”
반란군이 내준 임무로 인해 쓰레기장에 ‘복제’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협회가 그 에스퍼를 탐낼 수도 있다. 미리 경고라도 들어 둬야 도망치기도 쉬울 터다. 양쪽에서 잡아당겨 가늘게 떨리는 문틈으로 무릎까지 밀어 넣은 주현이 사납게 웃었다.
“당신 에스퍼지?”
남자가 조금이지만 손에서 힘을 뺐다. 그게 뭐 어쨌냐는 눈빛이었다. 옆집 사는 도경도 능력을 모르는 걸로 보아 에스퍼라는 걸 철저히 숨기는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힘 좀 쓴다던데.”
“깡패 권유냐? 난 그런 거 관심 없다.”
“그럼 저 안에 있는 에스퍼는?”
남자의 기세가 변했다. 귀찮다는 듯 찡그리던 눈에 명백한 살의가 담겼다. 슬쩍 찔렀을 뿐인데 단번에 미끼를 잡아당기는 모습에 내심 놀라고 말았다. 아무래도 오늘의 운은 진짜인 모양이다.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고 기대를 눌러 죽인 주현이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설령 복제 능력이 아니더라도 함께 사는 사람이 에스퍼인 건 확실해 보였다. 에스퍼-가이드 조합이면 좋았으련만. 에스퍼-에스퍼는 가이딩도 두 배로 필요하지 않은가.
‘어떻게 나올까.’
남자는 말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한 분위기와는 반대로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아직 상대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이상 패를 보여 주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주현이 남몰래 전투 태세를 갖춘 순간이었다. 휙, 쿵!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멱살을 잡힌 채 들어선 집은 도경의 방보다는 훨씬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애초에 구조부터 다른 게, 얼기설기 지어진 만큼 내부도 집마다 다른 모양이었다.
주현은 거친 손길에 순순히 끌려갔다. 벽에 등이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벽에 걸린 꽃 사진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다행히 깨지진 않았다. 주현의 목을 조르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어디서 정보를 얻은 거냐.”
“……다 방법이 있지.”
퍽, 제법 강한 주먹에 고개가 돌아갔다. 입술은 찢어졌지만, 맞기 직전에 어금니를 깨물어서 살을 깨물지는 않았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냐고? 옆집 꼬맹이. 물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주현이 상처 난 입술 끝을 혀로 문질렀다.
“숨길 거면 제대로 숨겼어야지.”
“말하지 않으면 죽인다.”
시간을 질질 끄는 걸로 미루어 살인에 익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진심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참에 남자의 능력도 파악해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주현이 다가올 공격에 대비한 순간이었다.
“그만해요!”
주방 옆에 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가벼운 실내복 차림의 여성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기껏해야 30대. 눈앞의 주름진 얼굴을 힐끗 본 주현이 가볍게 혀를 찼다.
“효진아, 들어가! 이딴 놈 하나 때문에 널 위험하게 할 수는 없어!”
“그렇다고 사람을 죽일 수는 없잖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소문이 퍼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이 능력을 가지고 도망친 시점에서 각오한 일이에요.”
“효진아…….”
“언니도 지금까지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했잖아요. 손에 피까지 묻히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언니?”
주현이 중얼거렸다. 언니라고? 어딜 봐서? 풍성한 턱수염을 노려보던 주현은 절절한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에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체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생각보다 온건하게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았다.
스르륵 풀린 손에서 벗어난 주현이 목폴라 너머로 목줄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워낙 꽁꽁 싸맨 터라 들키지는 않은 듯했다. 주현은 옷을 정리하곤 아까부터 궁금하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복제’가 그렇게 대단한 능력인가?”
“복제?”
“그래. 도망칠 때 각오까지 해야 할 줄은 몰랐는데.”
“뭔 소리냐. 복제는 내 능력인데.”
“……뭐?”
* * *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진 집의 거실 한복판에서는 강도가 들어왔다가도 울면서 나갈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던 주현은 앞에 놓인 컵을 잡았으나 마시지는 않았다. 뭐가 들었을지 모른다.
경계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컵을 매만지던 주현이 눈을 굴렸다. 건너편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는 인상을 쓴 채 주현을 노려보았고, 여자, 효진은 초조하게 떨면서도 표정은 굳건했다.
간단한 대화를 통해 복제 능력을 가진 에스퍼는 남자라는 걸 알았다. 눈앞에서 동전이 두 개로 늘어나는 걸 봤으니 확실했다.
‘그럼 이곳 주민들은 그냥 몸싸움한 걸 보고 에스퍼의 능력이라고 단정 지은 건가.’
보는 눈이 없는 건지 감이 좋은 건지, 어쨌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대어를 낚았으니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주현은 긴장된 어깨를 이완시킨 척하며 정체 모를 차의 온기를 즐겼다.
“그래서. 그쪽은?”
“음?”
“날 아는 모양이던데.”
남자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숨길 수 없는 경계가 담겨 있었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 주현은 짧은 망설임 끝에 안경을 벗었다. 도수 없는 안경이라 시력에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가이딩 약물 배달하던 비실비실한 어린애. 기억 안 나?”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주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몸을 하도 내밀어서 옆에 있던 효진이 어깨를 잡아당길 정도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주현은 남자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괘념치 않기로 했다. 이안의 가이딩으로 영양실조가 사라지며 불쑥 커 버린 걸 제외해도 그는 과거와는 너무 많이 달라졌으므로.
“아. ……아아아!”
“언니, 기억났어요?”
“그래, 네가 걔구나! 인상 나쁜 꼬맹이!”
인상 나쁜 꼬맹이. 확실히 그때 주현은 늘 미간을 구긴 채 살기는 했었다. 지금이라고 썩 많이 웃는 건 아니지만.
남자는 활짝 핀 얼굴이었다. 주현이 반갑다기보다는 과거의 인연을 다시 만난 게 신기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