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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147/161)

폭주 에스퍼 132화

버려진 컨테이너는 쓰레기장 아이들의 훌륭한 모임 장소다. 멍을 달고 찾아오거나 주린 배를 잡으며 기어든 아이들은 암묵적으로 서로의 곁을 지켰다.

열세 살 도경은 그날 밤 컨테이너에 있던 아이 중 그래도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다. 따라서 알루미늄 방망이를 옆에 둔 채 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잠들었다. 스모그에 가려진 달로 세상이 어두운 시간, 철문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그는 방망이를 들고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건 열 살짜리 여자아이, 아라였다. 멍이 든 볼을 바라보던 도경은 이내 아라의 손을 잡고 있던 키 큰 남자를 발견하곤 순식간에 방망이를 치켜들었다. 이렇게 덩치 큰 남자를 어떻게 바로 눈치채지 못했는지 의문이었다.

“너 뭐야. 떨어져!”

“그만해! 아까 이 오빠가 도와줬어. 빚쟁이 다섯 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니까? 아는 사람도 아닌데 그냥 지나가다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구해 줬다고.”

“뭐?”

“쓸 만해 보이지 않아?”

작게 속삭인 아라의 표정은 밝았다. 호구 하나 잡았다는 눈빛이었다. 힘들게 살아온 탓에 영악한 구석이 있는 아라지만, 나이답게 순진한 부분도 있었다.

안대를 쓰고 거기다 안경까지 쓴 남자는 너덜너덜한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단순한 거지로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혼자서 빚쟁이 다섯을 해치웠다는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도경이 있는 힘껏 남자를 노려보았다.

“왜 아라를 도와줬지?”

“별 이유 없어.”

“헛소리하지 말고. 이유 없이 도와주는 놈이 어딨냐?”

“……내가, 애들이 두들겨 맞는 것만 보면 피가 거꾸로 솟거든.”

황당한 이유였으나 어쩐지 진심이 느껴졌다. 도경은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이지 않았다. 쓰레기장에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 널리고 널렸으니까. 남자도 맞고 자란 걸까?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서 나섰다면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아라를 도와줘서 고마워. 이제 그만 꺼져.”

“뭐? 그러지 마! 우리 호위로-”

“처음 본 사람을 어떻게 믿어? 그 손 놓고 이리 와.”

아라는 입술을 내밀었지만, 15분 전에 만난 남자보다는 도경을 따르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손을 놓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제야 약간 긴장을 내려놓은 도경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180은 확실히 넘어 보이는 키, 빛을 흡수하는 듯한 새까만 머리카락. 목 끝까지 지퍼를 채운 낡은 카키색 점퍼에는 군데군데 꿰맨 자국이 있고, 힘없이 늘어진 손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흉한 흉터가 가득했다.

경계심을 조금 더 높인 도경이 시선을 올렸다. 묘하게 이질적인 검은 눈과 정확히 마주친 그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동안 수많은 위험한 어른을 만났지만, 이토록 두렵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인상을 쓰거나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라를 컨테이너 안으로 밀어 넣은 도경은 쾅! 문을 닫았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노을이 저물어 가는 오후. 도경은 문 앞에 선 키 큰 남자를 노려보았다.

“……뭐야?”

“맛있는 거 사 왔는데 들여보내 주라.”

봉투를 흔들며 씨익 웃는 남자의 미소는 어젯밤과 다른 사람인가 착각할 정도로 부드럽고 싱거웠다. 도경이 잠시 망설인 찰나, 뒤에 있던 아라가 달려 나왔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아이들도 간식거리를 향해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렇게 ‘현이 형’은 아이들만 들어올 수 있는 컨테이너에 자리 잡게 되었다.

쓰레기장의 아이들은 누구나 어른을 싫어한다. 그중에서도 덩치 큰 성인 남자는 최악인데, 이상하게도 현은 아이들의 호감을 쉽게 샀다. 먹을 걸 사 오는 것 말고는 크게 하는 일도 없는데, 어느샌가 아이들은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오빠는 왜 이렇게 책을 좋아해?”

그중 한 사람인 소희가 현의 무릎 위에 팔을 기댄 채 물었다. 그가 사 온 막대 사탕을 물고 있느라 톡 튀어나온 볼을 잠시 보던 현이 대답했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책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별로 안 좋아해.”

“거짓말. 그럼 왜 맨날 읽어?”

“글쎄. 왜일까?”

“제대로 대답해 줘.”

나흘 전 범죄자 삼촌에게 현이 한 번만 더 얘한테 다가오면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후로 그를 무척 따르는 원준이 어리광 부리듯 매달렸다. 슬쩍 웃은 현이 한 번 더 페이지를 넘겼다.

“이것도 모르냐는 말 듣기 싫어서.”

도경이 고개를 들었다. 현의 눈은 오른쪽밖에 없어서, 왼쪽에 있던 도경은 그의 표정과 감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어렸을 때, 아홉 살이었나? 인어공주를 몰라서 크게 창피당한 적 있거든.”

“인어공주는 나도 아는데!”

“그래? 형은 몰랐어. 아무튼, 아는 건 많을수록 좋아.”

평소와 다름없는 그 목소리가 무척 슬프게 들려서 도경은 슬그머니 현의 팔을 잡았다. 웃음 섞인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그들 옆에서 늘 긴장하는 현의 어깨가 아주 조금, 힘이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두 요일이 되면 도경은 안 감기는 눈을 억지로라도 감아 낮잠을 잔다. 왜냐하면 밤에는 한숨도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 쓰레기장을 바쁘게 뛰어다니기 위해서는 미리 잠을 보충해 놓아야 한다.

오늘은 목요일이지만, 도경은 소희와 원준의 방해로 낮잠을 자지 못했다. 벌써 세 번째 하품을 마친 도경이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나 아무리 졸리다 해도 도경은 일을 끝내기 전까지는 결코 잠들 수 없다. 까딱하다가는 그대로 영원히 자게 될 테니까.

‘늘 하던 대로 해. 한 군데라도 빠뜨리면 죽는다.’

매번 똑같은 말로 위협하는 깡패를 잠시 떠올린 도경이 주변을 둘러보며 빠르게 골목을 쏘다녔다.

쓰레기장은 언제나 위험하지만, 낮보다는 밤이 좀 더 위험하다. 범죄가 일어나는 수는 사람이 많은 낮에 더 높으나, 한 건 한 건의 위험도는 밤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런 위험한 밤에 도경이 커다란 가방을 품에 안고 돌아다니는 이유는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다.

그는 현재 마약을 딜러들에게 배달하는 중이다. 벌써 1년 하고도 4개월째 해 온 일이라 나름대로 베테랑이라고 자부한다. 기억력이 별로거나 운이 나쁘면 일주일 만에 끝나는 아이도 있으니까.

쓰레기장이라고 해도 경찰은 있다. 적극적으로 일하지는 않아도 사건이 일어나면 수사하고, 가끔은 수상한 사람을 불심검문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의심을 피할 수 있는 어린애를 사용하는 것이다.

‘좀 더 크면 이 일도 못 하겠네.’

막막한 미래를 잊기 위해 좀 더 빠르게 다리를 놀리던 도경은 골목을 돌자마자 곧장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작은 발소리는 범죄 현장의 가해자로서 한껏 예민해진 깡패들의 귀에 닿은 모양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을 바닥으로 던진 이들이 목격자를 잡기 위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짐을 든 어린애와 긴 다리를 가진 어른들. 짧은 달리기 시합의 승패가 정해졌다.

“쥐새끼 같은 게, 도망가고 난리야.”

“저 아무것도 못 봤어요!”

“그딴 말에 속을 것 같냐?”

도경을 둘러싼 세 남자의 눈은 엉성하게 풀려 있었다. 술, 아니, 약이다.

쓰레기장에는 크고 작은 조직이 많이 있지만, 이들에게서는 딱히 소속감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일 처리도 너무나 엉성했다. 평범한 양아치들이지만, 약에 취한 양아치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엉? 이건 또 뭐야.”

마약을 유통하는 건 대게 쓰레기장을 꽉 쥐고 있는 큰 조직들이다. 도경에게서 약을 빼앗으면 원수를 그냥 두지 않는 이들의 손에 늦어도 이틀 안에 시체가 될 테지만, 약에 취한 남자들은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방을 잃어버리면 도경까지 양아치 셋과 함께 시체가 된다. 얼굴이 창백해진 도경이 가방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이거 놔!”

“악!”

어깨를 잡고 있던 남자의 팔을 힘껏 깨문 도경이 손이 풀린 틈을 타서 내달렸다.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으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억지로 삼킨 그가 낡은 건물의 비상계단으로 기어 올라가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어디 갔지?”

“이쪽이야.”

“확실하냐?”

도경은 눈을 감고서 제발 못 보고 지나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길 한참, 문득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곤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해?”

숨을 들이켠 도경이 황급히 뒤로 돌았다. 녹슨 난간에 걸터앉은 남자의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그 빛은 하나밖에 없었다.

* * *

주현은 살기를 지우고 최대한 선량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열세 살이라기엔 너무 마른 아이의 몸이 안도로 풀리는 게 보였다. 아이들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을 씹어 삼킨 주현이 입을 열었다.

“왜 이런 데 있어? 위험하게.”

“나는 괜찮아. 형이야말로 이런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지 마. 범죄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유감이지만 내가 범죄를 저지르는 쪽이야……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두들겨 패서 남의 집 담장 밑에 던져 놓은 양아치 세 사람을 잠시 떠올린 그가 도경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낡은 옷에 감싸인 어깨와 커다란 가방을 끌어안은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 표정만은 평소처럼 쾌활함을 담고 있는 게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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