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31화
“그럼 일단 거점부터 가자. 작전이라도 짜야 뭘 하든가 하지.”
미리 받은 지도를 보며 사람들을 피해 은밀하게 움직인 세 명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한 낡은 아파트 앞에 섰다. 7층짜리 아파트의 6층 가장 끝 방. 그곳이 반란군이 준비해 준 세 사람의 거점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세 사람은 한순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찡그린 미간에는 경멸과 체념이 담겼다.
낡은 아파트는 엉망이었다. 누워 있는 소파, 뜯긴 벽지, 바닥에 떨어진 커튼, 거기다 매트리스는 갈기갈기 찢겨 스프링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네가 누굴 건드렸는지는 몰라도 썩 협회 마음에 드는 상대는 아닌가 보다.”
승철의 말대로, 엉망이 된 방은 분명 협회 짓이었다.
에스퍼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면 다른 방법이 많았을 텐데 굳이 폭주 에스퍼를 사용하겠다고 한 건 이상한 일이었다. 때마침 주현이 벌인 사건으로 기회가 왔다고 해도 협회는, 특히 남을 믿지 않는 태석은 의심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거실뿐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방과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폐허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지만, 사실 사람이 살 수 없는 게이트 너머에서 몇 번이고 밤을 보낸 에스퍼에겐 못 견딜 만큼 끔찍한 환경이 아니었다.
심지어 세 사람은 이런 환경을 견디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짓 할 거면 그냥 임무도 그쪽에서 맡지. 어휴, 아무튼 고쳐 놓을게.”
“벌써 그렇게 능력 써도 괜찮아?”
“가이딩 약물도 많으니까 괜찮아. 어차피 내 능력은 쓸 곳도 잘 없어.”
봄은 가장 먼저 뒤집힌 채 다리가 부러진 소파를 매만졌다. 희미한 빛과 함께 소파가 새것 같은 모양새로 돌아왔다. 이미 고쳐진 건 다시 고칠 수 없다. C동에 있는 소파를 잠시 떠올린 주현은 임무 동안 실수로라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어 커튼, 벽지, 매트리스, 변기 등. 봄은 좁은 방에 있는 모든 걸 고쳤다.
에스퍼의 능력은 파괴적인 게 많다. 주현은 물론이거니와 곁에 있는 승철도 무언가를 망가뜨리기 위한 능력이다. 그렇기에 봄의 능력은 특별했다. 새로운 기회를 주는 능력에 약간의 부러움을 느끼며, 주현이 가방에서 주사기를 하나 꺼냈다.
“혹시 모르니까 맞을래?”
“아직 괜찮아.”
“그러다 큰일 나. 그냥 하나 맞아. 협회에서도 쫄았는지 셋이 다 쓰지도 못할 만큼 지급했으니까. 그렇지, 주현아?”
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철의 말대로 가이딩 약물은 가방을 가득 채울 만큼 많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봄이 주사기를 받아 들었다.
소매를 걷는 봄에게서 시선을 돌린 주현이 깨끗해진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발린 지 꽤 됐는지 여전히 때가 묻은 벽지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거점 삼기에 나쁘지 않은 방이었다.
사실 얇은 벽 너머 위아래 사방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불안하게 가슴이 뛰지만, 주현은 자신이 이곳에서 폭주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에스퍼가 폭주하면 등급을 훌쩍 뛰어넘는 힘을 발휘한다. 같은 에스퍼라고 해도 휘말리면 손가락 하나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현이 죽을 때 사지가 멀쩡했다 하니, 봄과 승철도 이곳에서 폭주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가 슬그머니 피어올랐다.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어깨가 조금 가벼워지기에는 충분했다.
“이제 어떻게 할지 한 번 회의해 볼까?”
봄은 가이딩 약물 덕인지 피로가 약간 사라진 얼굴로 말했고, 두 남자가 동의하며 작은 테이블로 모여들었다.
“다들 알겠지만, 이번 임무의 가장 결정적인 목적은 정보 수집이야. 그것도 큰 줄기를 나눠서 세 가지. 그중 둘은 의뢰자가 원하는 거고, 나머지 하나는-”
“협회가 원하는 거.”
“그래. 연승철, 지도 펼쳐 봐.”
“네, 보스.”
테이블 위로 지도가 펼쳐졌다. 쓰레기장을 돌아다니며 상세한 지도를 만드는 사람은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평소 임무 때 보는 지도보다 훨씬 간략한 그림을 다섯 개의 이질적인 검은 눈이 응시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있을 거야. 그나마 치안이 괜찮은 남쪽.”
“항구가 있는 북쪽이랑 서쪽이 특히 위험하다고 했지? 아, 형. 펜 좀.”
볼펜을 받아 든 주현이 지도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건물 위를 몇 번씩 뛰어넘어 왔기에 지리는 얼추 파악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의뢰자가 협박해서 준 임무보다 협회가 겸사겸사 준 임무가 더 어렵냐?”
승철의 목소리에는 황당함이 담겨 있었다. 봄도 주현도 같은 심정이었기에 자연스레 한숨이 터져 나왔다. 주현은 다시금 흘러내린 안경을 벗어 까끌까끌한 안대 밑을 긁적이곤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마약 유통 경로를 외지인 셋이 어떻게 알아내라고.”
‘쓰레기장의 서쪽을 중심으로 에스퍼의 능력이 사용된 불법 마약이 떠돌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태석의 얼굴에는 불쾌감이 가득했는데, 불법 마약으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는 쓰레기장 주민을 걱정하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지은 죄가 있는 주현은 브리핑이 끝날 때까지 고개도 들지 못했었다.
쓰레기장에서 마약은 상당히 흔한 것이지만, 에스퍼의 능력이 사용된 탓에 정부가 아닌 협회의 단속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협회는 직접적으로 나설 수 없다. 약 15년 전, 정부와 협회가 손을 잡고 쓰레기장을 개혁하려 했다가 거대한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보금자리를 잃고 쫓겨난 쓰레기장 주민들의 분노는 돈 몇 푼으로 잠재워지지 않았고, 분노는 여러 형태로 발현되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쓰레기장 주민, 운 나쁘게 휘말린 시민, 제압하려던 에스퍼와 경찰.
결국 물러선 건 협회와 정부였다. 덕분에 일반 시민들도 쓰레기장은 그냥 이대로 두자는 의견이 많다. 버려지고 쓸모없는 것들이 모인 곳을 굳이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다.
“그나마 확실하게 찾아서 마약상을 다 잡아 죽이라는 명령은 아니니까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여기 몇 달은 있어야 했을걸.”
“뭐,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니까 좀 돌아다니다 보면 대충 꼬리 정도는 잡을 수 있지 않겠냐. 협회도 우리를 썩 믿지는 않을 거고. 이거 말고는 또…….”
승철이 임무 파일을 뒤적였다. 흔히 내려지지 않는 장기 임무라 종이 뭉치는 무척 두꺼웠다. 마침내 원하는 걸 찾아낸 승철이 종이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쓰레기장의 복지 현황. 이런 걸 일반 기업이 왜 궁금해해?”
“그 기업에 무슨 봉사 단체가 속해 있대. 그쪽 일 아닐까? 이름이-”
“프리 가이딩.”
날카로운 음성에 봄과 승철의 시선이 주현에게 닿았다. 벗어 둔 안경을 다시 쓴 주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나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날까 걱정되어 해산의 유품은 현재 그의 주머니에 들어 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망가진 USB가 허벅지를 아프게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내 눈에는 마지막 게 제일 성가셔 보인다.”
봄의 손가락이 종이를 톡톡 건드렸다. 주현은 손가락 밑의 글자를 천천히 읽었다.
“‘복제’ 능력을 사용하는 에스퍼에 대한 정보 수집. 되게 의미심장하네. 협회에서는 이걸 가만히 두나?”
“몰라. 잡으면 둘이 나눠서 쓰지 않을까?”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찾기 싫어진다.”
주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임무를 의뢰한 게 반란군이라는 걸 알고 있다 보니 하나같이 찜찜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그들에게는 어떠한 거부권도 없다. 그나마 사람 죽이는 일은 아니라 고맙다는 생각마저 드는 건 봄의 말대로 세뇌받은 탓일지도 모른다.
“각자 하나씩 맡을까? 그게 효율적일 것 같은데. 우리가 원래 떼 지어서 일하는 사람들도 아니잖아.”
“나는 봄이 말에 찬성.”
“나도.”
각자 어떤 일을 할지는 제비뽑기로 정했다. 능력이 크게 필요한 일이 없어 상성을 따질 수도 없고, 그야말로 발품을 팔아야 하는 임무라 누가 뭘 맡든 상관없기에 정당한 방법이었다.
주현은 손에 잡힌 쪽지를 부루퉁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아무리 노려봐도 적힌 글자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복제]
의외로 단정한 승철의 필체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날 때부터 운이 없던 남자가 이제 와 원하는 걸 뽑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럭저럭 만족한 듯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주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타다닥! 작은 발이 빠르게 땅을 박찼다. 좁은 골목을 익숙하게 달려 나간 아이가 도착한 곳은 쓰레기장 동쪽 구역에 유독 많은 컨테이너 창고였다. 버려진 지 오래되어 녹슬고 낡았지만, 그래도 지붕이 있다는 점에서 좋은 안식처였다.
아이는 그중에서도 안쪽에 있는 세모 모양 지붕이 달린 커다란 컨테이너로 다가갔다. 몇 번이고 수선한 샌들 너머로 풀이 발가락을 간질였다. 괜히 낡은 옷을 털어 주름을 최대한 편 아이가 문을 열었다.
창문이 작아서 낮인데도 어둑한 창고에 먼지가 뿌옇게 날았다. 아이는 원하던 사람을 찾고는 활짝 미소 지었다.
“현이 형!”
느릿하게 고개 든 남자가 하나밖에 없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상당히 무서운 인상인데 웃으면 순식간에 달라지는 분위기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눈을 가리며 흔들리는 까만 머리카락이 희미한 빛을 받아 반짝였다.
“도경이 왔어? 이리 와.”
아이, 도경은 곧장 현의 곁으로 달려갔다.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아이들이 조금씩 움직여 틈을 만들었다. 도경은 먼지와 땀으로 더러웠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꼴이기 때문이다.
도경은 현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가을이 한창이지만 춥다고는 할 수 없는 날씨임에도 늘 목 끝까지 싸매고 있는 그는 온기를 좋아하는지 다가오는 아이들을 한 번도 밀어내지 않았다.
“아기야?”
놀리는 말투지만 올려다본 얼굴은 아주 다정해서, 도경은 정말 아기가 된 것처럼 더욱 가까이 몸을 붙였다. 더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손은 아주 크고 단단했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건 열흘 전, 풀벌레가 울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