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30화
“신주현.”
자기소개까지 무뚝뚝한 그 애에게 관심을 가진 유일한 이유는 그의 나이였다. 그는 폭주 에스퍼로 살기엔 너무 어렸다. 아무리 개인적인 성향인 봄이라도 어린애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돌아다니는 걸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봄이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오며 가며 한 번씩 말을 걸고, 애들이 좋아할 만할 걸 얻으면 슬쩍 내밀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봄 나름대로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자기방어였을지도 모른다. 이 지독히도 외로운 곳에서 이유를 붙여서라도 사람과의 정을 나누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발악.
주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애는 깜짝 놀랄 만큼 눈치가 빠르니까. 하지만 그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분명 같은 처지이기 때문일 터다. 자신이 아닌 서로를 위해 친한 척하는 것. 그게 두 사람 사이의 규칙이었다.
“주현이 눈은 내 거랑 좀 다르네.”
“뭐래. 다 똑같은 빨간색인데.”
“아니야. 네 눈이 좀 더 예쁘게 섞였어. 꼭 잘 익은 체리 같아.”
낡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코웃음을 치던 주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창고가 붙은 볼이 처음 만난 날보다 젖살이 빠진 게 보였다.
“체리?”
“그래.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내가 그것도 모르겠어? ……먹어 본 적은 없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봄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체리가 그리 드문 과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의 과거를 털어놓고 이야기한 적은 없으나 은연중에 나오는 발언으로 봄은 주현의 과거가 썩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며칠 후, 임무에서 돌아온 봄은 주현에게 체리 맛 사탕을 내밀었다. 놀란 얼굴로 그걸 보던 주현은 봄과 눈을 마주치곤 이를 보이며 씨익 웃었다. 처음으로 그 애가 제 나이로 보였다.
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봄은 종종 주현의 곁에서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오래 살아라.”
“누나나 잘해.”
“싸가지 없기는.”
욕을 먹고는 슬쩍 올라가는 볼이 귀여웠다.
봄이 자신의 능력을 주현에게 사용한 건 어느 여름, 그 애가 테러 조직에 잡혔을 때였다.
보름간 고문받은 그 애는 말로 다하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몰골이 되어 돌아왔다. 가장 그녀를 분노하게 한 건 죽어 가는 주제에 한마디도 안 했다고 자랑스럽게 속삭이던 얼굴이 여전히 어려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 멍청아.”
봄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주현은 늘 그렇듯 슬쩍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 순간 봄은 처음으로 폭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폭주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C동에 오지 않았다면 이 착하고 불쌍한 아이는 오늘 의미 없이 죽었을 테니까.
C동에서 봄은 유일하게 위험하지 않은 임무에 나간다. 폭주하기 전부터 알음알음 유명했기에 그녀는 폭주 에스퍼임에도 썩 두려움을 받지 않았다. 폭주보다 젊어지는 게 훨씬 중요한 인간들만 만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현은 C동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에스퍼였다. 아무리 위험한 임무가 들어와도 그 애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왔다. 아무리 피를 흘려도 어리게 웃는 얼굴만큼은 그대로였다. 살그머니 가늘어지는 사탕 같은 눈동자는 무척 사랑스럽다.
바로 그러한 까닭으로, 그 애가 피로 물든 붕대를 얼굴에 감고 나타난 날. 예쁜 체리 하나가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진 날. 봄은 약간의 상실감을 느꼈다. 사실 약간이 아니라 아주 컸다. 세상이 조금 더 못생겨졌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래서 봄은 불가능에 도전한다는 비논리적이고 충동적인, 그야말로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 * *
“그러니까, 우리 보고 쓰레기장에서 잠입 임무를 하라는 거야?”
“그렇지.”
“흠, 미쳤네.”
“그렇지.”
“드디어 류태석이 완전히 돌아 버렸어.”
“내 말이 그 말이야.”
주현은 봄과 승철의 대화를 무시한 채 묵묵히 짐을 챙겼다.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종이를 팔락이던 승철이 주현에게 물었다.
“주현아, 너는 웬일로 조용하냐? 제일 먼저 욕했을 녀석이.”
탁. 신발 끈을 묶고 바닥에 발을 디딘 주현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임무는 저번에 주현이 가짜 차인호에게 달려든 결과, 어쩔 수 없이 내려진 임무였다. 덕분에 죽어라 두들겨 맞고 독방에 갇혀 질질 짰지만, 그래도 차인호와 만나 그리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봄과 승철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주현은 자신 때문에 하게 된 임무라고 실토해서 구박받을 생각 따윈 없었다. 주현이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류태석 개새끼. 언젠가는 내가 죽인다.”
“나도 끼워 줘라.”
“걔는 진짜 좀 맞아야 해.”
당한 게 많은 에스퍼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쓰레기장은 흔히 말하는 하층민이 모여 사는 뒷골목으로, 범죄자와 도망자가 몰려들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시와 국가에서 여러 번 손을 뻗었으나 하나같이 실패하고 말았다. 어둠은 이미 너무 짙었다.
일반인은 범죄가 판치는 위험한 쓰레기장에 발도 들이지 않는다. 어리숙하게 서성였다가 소매치기로 끝나면 운 좋은 수준인 그곳에 잠입하게 된 폭주 에스퍼 세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곁눈으로 훑었다.
“정말 이게 통할까?”
“걱정 마라. 너는 누가 봐도 거지니까.”
“봄아. 오빠라고 부르는 건 바라지도 않는데 거지는 좀 심하지 않아?”
“아무리 봐도 거지인데 어떡해.”
“좀 거지 같기는 해.”
“주현이 너까지…….”
티 나는 연기로 우는 척을 하는 승철은 사실 겉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렌즈를 끼고 낡은 옷을 입었을 뿐이다. 늘 더벅머리에 삐죽삐죽한 턱수염을 달고 다니는 덕에 무척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반면 타고나길 귀티 나는 봄과 다른 이들에 비해 얼굴이 더욱 많이 팔린 주현은 가발과 안경 등 조금 더 이것저것 걸친 차림이었다. 주현이 흘러내린 뿔테 안경을 밀어 올렸다. 흰색 싸구려 안대와 두꺼운 안경의 조화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구렸다.
“주현이는 키 큰 거지네.”
“뭐야? 기분 나쁜데.”
봄이 주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두꺼운 옷 때문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낙서가 가득한 지저분한 벽에 등을 기댄 주현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그의 옷에서 나는 건지 골목 바닥에서 나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누나는 왜 거지가 아니야?”
“맞아. 우리는 거지 형제인데 왜 너만 반짝반짝해?”
두 사람의 말대로 봄은 평소보다 훨씬 더 비싼 물건들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보석을 잘 모르는 주현의 눈에도 절반 이상은 가짜로 보였다. 과한 반짝임이 좀 촌스러웠다.
봄은 보라색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곤 깔보는 말투로 말했다.
“그야 나는 아무리 누더기를 걸쳐도 가난뱅이로는 안 보일 테니까. 반대로 약간 돈이 있는 깡패 조직원으로 변장했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이런 옷을 받은 건데 내가 뭘 어쩌겠어?”
인정하기는 싫지만 맞는 말이었다. 봄이 어울리지도 않는 가난뱅이 옷을 입어 봤자 임무가 가능할 정도로 섞여 들 수는 없을 터. 그러니 따져 봐야 아무 의미 없다. 그저 임무 전 긴장을 풀기 위한 농담일 뿐이다.
“그런데 이 임무는 뭐길래 이렇게 허술하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주어진, 가이드 약물이 가득 든 가방을 고쳐 메던 주현이 승철을 바라보았다. 봄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승철의 말대로 이번 임무는 사전 정보부터 시작해 방법, 목적 등 모든 부분이 미흡하고 허술했다. 거의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내던진 수준이었다. 베테랑 폭주 에스퍼인 승철은 물론, 이것저것 많은 걸 알고 있는 봄의 눈에도 이번 임무는 과하게 대충이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협회에서 그들을 엿 먹이기 위해 준비한 함정이 아닐까 긴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상당히 마모된 주현의 양심이 가슴을 찔렀다. 괜히 협회를 의심하며 제약적으로 행동했다간 안 그래도 위험한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슬쩍 좁은 하늘을 올려다본 주현이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어쩌면 류태석도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몰라.”
“뭐?”
“어쩌면 류태석도 이 임무를 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뭐라고?”
“어쩌면 류태석도-”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여자치곤 낮은 봄의 목소리가 골목을 울리곤 사라졌다. 주현은 천천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떤 높은 분에게 실수해서 사죄의 의미로 이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고?”
“두 사람도 휘말릴 줄 알았으면……. 그래도 똑같이 하긴 했겠다. 아무튼, 뭐…….”
멋쩍게 발 앞의 깡통을 걷어찬 주현이 가방을 가볍게 흔들었다.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쨌든 주현의 난동으로 거절할 수 없는 임무를 하게 된 건 사실이니까.
안경이 다시금 미끄러졌다. 왼쪽 눈을 가린 안대의 솜털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차마 사과는 못 하고 봄과 승철을 힐끔거리자, 의외로 두 사람은 한숨을 쉬기는 해도 대단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협회와는 상관없는 임무라는 거네?”
“응. 그래도 실패하면 쪽팔리게 했다고 난리 날걸.”
말할수록 죄책감이 커졌다. 이런 허술하고, 귀찮고, 위험한데다 심지어 반란군을 도와주는 임무를 나눠 들게 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물론 봄과 승철이 딱히 협회에 호감이 있어 보이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형태로든 후에 반란군을 도왔다는 의혹으로 나쁜 일에 휘말릴까 봐 걱정이었다. 후회는 하지 않으나 반성은 하는 주현이 지저분한 바닥만 응시하던 순간이었다. 승철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어떤 임무를 실패해도 난리 나는데 이거라고 다를 게 있겠냐.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지.”
“맞아, 신주현. 네 탓 아니니까 어울리지도 않게 청승 떨지 마.”
슬그머니 고개 든 주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무리 쓰레기장이라 해도 이곳은 많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폭주 에스퍼가 세 사람 있다는 건 폭탄이 세 개 있다는 말과 같지만, 어쩐지 주현은 깊은 안심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