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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143/161)

폭주 에스퍼 129화

“예?”

“반란군에는 에스퍼가 많아서, 매칭 가이드를 쉽게 배신하는 에스퍼는 없다면서 어떻게 잘 넘어갔어요.”

“도청기라고 했습니까?”

뒤에서 작은 끄덕임이 느껴졌다. 그 말은, 그 말은…….

“그런데 제가 그렇게 못되게 말하나요?”

차인호의 목소리는 약간 수줍었다. 쿵- 머릿속으로 커다란 돌이 떨어졌다.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말 안 해요. 얼굴만 같다고 같은 게 아니라고.’

‘진짜 쪽팔려서 말하기 싫은데, 지금은 가짜라도 감지덕지거든?’

‘그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마. 죽여버리기 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도청기 속 대화를 차인호 혼자서 들었을 리는 없다. 동료들과 둘러앉아서, 주현이 멋대로 떠들어 대다가 정곡을 찔리고 난리를 쳤던 소리를, 다 함께…….

수치심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면 주현은 이 순간 죽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어깨 뒤에서 힘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주현 씨는 저를 제법 좋아하시나 봐요.”

“아닌데요.”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가시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차인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어떤 감정인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애초에 그는 거짓말을 잘해서 얼굴을 봐도 속내를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못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자존심 세우느라 상처 주는 말만 한다는 거 진짜였네.’

불쑥 떠오른 목소리는 여전히 따끔거렸다. 깍지를 풀고 한 번 더 주현의 팔을 쓸어내린 차인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벗어나려는 듯 움직이는 가이드의 소매를 잡은 건 결코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제법이 아니라, 상당히…… 좋아하는데요.”

이젠 더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차인호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원수에게 고백받은 적이 없어서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

한참을 멍한 표정이던 차인호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그거 고맙네요.”

한순간이지만 그 표정에는 분명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주현의 들뜬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차라리 혐오였다면 예상이라도 했을 텐데.

“참고로 지금도 도청기가 있어요.”

“네?”

“농담이에요.”

차인호가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갔다. 아까까지 주현을 만지작거렸던 왼손은 내내 주먹 쥔 상태였다. 마치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처럼. 수없이 많은 임무를 해냈던 에스퍼는 그걸 모른 척했다.

“이미 망가졌으니까.”

작은 중얼거림은 주현이 이불을 정리하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

“…….”

이후론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와 함께 있을 때 대화가 사라지는 순간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대화의 첫 물꼬를 트는 건 언제나 차인호의 역할이었고, 그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가이딩 룸은 자연스레 침묵으로 가득 찼다.

주현은 슬그머니 시선을 움직이다 차인호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하기도 전, 먼저 휙 사라진 눈동자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차인호는 꼭 주현의 눈치를 보듯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있잖아요, 남세준, 그러니까, 여기 왔던 가이드……. 처음부터 회유하다 안 되면 도발하라고 명령받고 온 거예요.”

어쩐지 초조함이 담긴 목소리는 평소보다 자신감이 없었다. 바닥을 응시하던 차인호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아름다운 얼굴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즐거움보다는 상대를 신경 쓰는 듯한 미소였다.

“그 자식이 한 말 전부 주현 씨 성질 긁기 위한 도발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정말,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거짓말도 막 하는 놈이니까.”

주현은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조금만 긴장을 덜 했어도 입꼬리를 올리며 바보처럼 웃었을 게 분명하다.

힘껏 밀어내다가도 이렇게 또 훅 잡아당기는 차인호가 미운데 동시에 좋아서, 나뭇잎처럼 쉽사리 흔들리는 자신이 우스워서, 그래서 주현은 그 가이드의 말 중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깨물어 미소를 죽이곤 슬쩍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하지만 차인호는 그 작은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드물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화난 건 아니지만 미묘하게 구겨진 눈썹이나 힘을 준 턱이 찝찝함을 드러냈다. 주현은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해야 그가 만족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잠시 조용히 있던 차인호가 한숨과 함께 얼굴을 문질렀다.

“……반란군에서는 임무를 위한 정보 제공이 의무 사항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알려 주고 싶었어요. 이유는 없지만, 그냥, 예.”

주현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다. 라이터를 켠 것도 아닌데 어쩐지 가슴께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한기에 익숙한 주현에겐 지나치게 뜨거웠으나, 결코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변명 안 해도 당신을 입 가벼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거 참 고맙네요.”

차인호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웠으나 더 말을 얹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남몰래 달아오른 가슴팍을 긁적인 주현은 위로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짓궂어서 미안하다고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는 원래 이렇게 태어난 모양이니까.

주름진 이불을 만지작거리길 한참, 차인호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이번에는 망설임도 불편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괜찮아요?”

“그쪽이 가이딩해 줘서 이제 괜찮습니다.”

“아, 그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이요.”

주현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침대에 앉아 있던 그는 의자로 돌아간 차인호를 애원하듯 바라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쩌다 들었는데, 이번에 주현 씨를 처벌하며 협회에서 겸사겸사 새로 개발한 자백제를 실험했대요. 공기 중에 퍼지는 형태라 밀도를 낮춘 대신 마시면 마실수록 쌓이고, 결국 뇌에 직접적인 자극이 간다고 해서 걱정했거든요.”

“……반란군은 그런 것도 압니까?”

“알려고 노력하죠.”

공기에 노출된 피는 짙은 갈색이 되어 피부에 딱 달라붙는다. 온몸에 남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주현은 오랜 시간 샤워 호스 아래에 서 있어야 할 터다. 그는 자신이 좁고 어두운 방에 갇혀서 무슨 말을 했는지 확실히 떠올리지 못한다. 다만 버려진 아이처럼 비참하게 울었던 기억밖에는.

“괜찮습니다.”

살면서 괜찮았던 적이 없는 남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늘 외로운 사람은 외로움이 뭔지 모른다.

소매 아래로 슬쩍 드러난 차인호의 팔목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주현은 자신의 정신건강보다 그게 훨씬 더 궁금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느리게 흘러나온 말이 부드럽게 회색 방을 울렸다. 그다지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주현은 그의 거짓말을 알아챈 걸 티 내지 않았다.

늘 똑같이 흐른다는 시간은 어디서 누구와 무얼 하느냐에 따라 각자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누구도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에서, 주현은 두려움을 삼키며 매칭 가이드와 눈을 마주쳤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토할 것 같았다.

“혼내도 되니까 딱 하나만 묻겠습니다. ……다른 생존자는 없습니까?”

그는 자신이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 모른다. 다만 각막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날 밤의 참상에서 살아남은 이가 더 있다면.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면…….

“좀, 애매해요.”

체념해서 편해지는 것도, 희망으로 기뻐하는 것도 추악한 살인자에게는 과분한 처사인 모양이다. 차인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은 채 주현의 흉진 손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현이 조금만 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면, 그가 손을 잡고 싶어 한다고 착각할 법한 시선이었다.

의미 없는 대화가 몇 차례 지나가고, 차인호는 가벼운 안부 인사 끝에 가이딩 룸에서 나갔다. 이유는 몰라도 쇠사슬 없이 방으로 돌려보내진 주현은 별이 흩어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동백 보호소>에 함께 있었다는 차인호. 주현을 증오하면서 손길만은 다정한 차인호. 그의 목을 조르고 입을 맞춘 차인호.

어깨를 끌어안으며 몸을 숙이자 정신을 잃기 전까지 주현을 괴롭혔던 어떤 부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라앉은 배는 생각했다. 숨 막히고 두렵고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바닷속 풍경은 가끔 예뻐 보인다고. 침몰은 절망스럽지만 때로는 물속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고. 그는 가라앉는 게 아니라 헤엄치는 중이라고 착각하게 된다고.

흔들리는 물결 너머로 햇빛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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