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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142/161)

폭주 에스퍼 128화

“……짜증 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난 걸지도 모르겠다. 갈라진 목소리는 분명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피가 말라붙은 손으로 얼굴을 닦자 축축하고 짠 냄새가 나는 액체가 묻어났다.

‘안 그래도 탈수가 심한 상황에서 이런 쓸데없는 일로 수분을 낭비하다니.’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주현은 자신이 상당히 미쳤다고 의심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뒈지게 아픈데, 진짜, 왜 안 오는 거야. 내 가이드라며, 이 X발…….”

갈 곳 없는 분노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주먹으로 벽을 후려쳐도 아프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아팠다. ……솔직히 모르겠다. 이곳이 어디인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그가 살아 있기는 한지.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경계가 흐릿했다.

“빌어먹을 놈. 내가 싫으면 애초에 매칭하겠다고 하지나 말든가. 가짜나 보내고. 젠장, 개 같은 자식이. 죽여 버릴 거야.”

그를 두들겨 팬 직원보다, 이곳에 가둔 태석보다, 이런 식으로 사는 자신보다, 차인호에게 훨씬 큰 분노를 돌린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주현이 얼굴을 문질렀다. 피 냄새가 났다.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실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멋대로 입이 열리고 목소리가 쏟아졌다.

“미안해. 미안해. 거짓말이야. 나 미워하지 마. 미워해도 되는데 싫어하지는 마. 손이라도 잡아 줘. 나 아파. 차인호. 나 무서워.”

손가락에 걸리는 천으로 얼굴을 가린 주현이 몸을 한껏 웅크렸다. 분명 아픈데 어디가 아픈지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아파. 그냥 너무 아파. 둔중한 머리가 마구잡이로 굴렀다. 발을 움직이자 벽에 부딪혔다. 좁은 방에서는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다.

어지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이상한 냄새는 분명 익숙해져야 함에도 여전히 거슬렸다. 마치 예전에 괴물의 몸속에서 기억을 헤집어지던 때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그때는 타의였지만, 지금은 자의다. 주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르는 채 입을 열었다.

“엄마, 죄송해요, 정말, 진심으로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다시는 안 태어날게요. 제발 집에 들여보내 주세요. 너무 추워요. 아저씨, 아, 아…….”

주현은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작고 지저분한 아이였고 주변에는 경찰이 가득했다. 무섭고 멍든 뺨이 아팠지만 의연하게 참은 주현이 수화기를 꽉 움켜잡았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아이가 코를 훌쩍였다.

“아빠를 죽여서 죄송합니다.”

툭.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 상관없는 일이다.

* * *

주현은 멍하게 하나뿐인 눈을 깜빡였다. 금이 간 회색 천장, 창살로 막힌 창문, 싸구려 섬유 유연제 냄새. 전부 익숙한 C동 가이딩 룸의 모습이지만,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크고 낡은 침대에는 웬일로 제법 푹신해 보이는 이불까지 준비되어 주현의 몸을 덮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휙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주현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작은 미소를 띤 채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차인호의 왼손과 주현의 오른손이 빈틈없이 맞닿아 있는 게 보였다. 틀림없는 ‘진짜’였다.

“부상이 심해서 가이딩을 퍼부어도 치료까지 시간이 좀 걸렸네요. 혹시 아직 불편한 곳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왜 왔어요?”

죽은 반란군의 유품은 여전히 주현의 방에 있다. 그의 죄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머물며 발목을 잡을 것이다.

“왜 여기 있어요?”

“……제가 당신 매칭 가이드인데 저 말고 누가 여기를 와요.”

차인호는 조금 지쳐 보였고 동시에 어딘가 아파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담은 눈동자가 아주 예뻤다. 거기에 닿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조용히 잊기로 했다.

한참을 침묵하고 나서야 대답해야 한다는 걸 떠올렸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바보가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좁은 방에서 나던 냄새가 여전히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아. 그래요.”

따뜻한 손이 이마에 닿았다. 눈가를 지나 광대를 문지르고 이내 턱까지 내려간 온기에 가슴이 술렁였다. 주현을 싫어하는 주제에 차인호는 늘 이리 다정하게 만졌다.

부드러운 손끝이 입술을 스쳤다. 까칠하게 일어난 껍질이 섬세한 지문에 걸리는 느낌이 생생했다.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주현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아닌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전 주현 씨의 생각을 물었어요.”

웃으면 화사한 꽃이 되는 차인호는 표정을 지우면 의외로 아주 싸늘한 얼굴이 된다. 죄를 고백하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다. 눈이 하나가 된 것의 장점은 시선을 조금만 돌려도 보기 싫은 게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점이다.

“……제가 당신 가족을 죽였으니까요. 당연히 내가 밉겠지. 나라면 죽였을걸.”

자조적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 떨림을 담고 있었다. 주현은 손을 빼고 싶었지만, 차인호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움켜잡았다. 압박이 강할수록 반대로 산소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역겨운 사랑 같으니라고.

“그렇지? 그게 맞는 일이지?”

“…….”

“가족과 친구를 살해하고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게 당연하지?”

평소 차인호가 뱉던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쩐지 드디어 그가 가면을 벗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의외로 털털하고 빠른 말투가 어쩐지 낯익게 들렸다.

“내가 널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그래.”

마침내 차인호가 손을 놓았다. 그 손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주현의 목을 감쌌다. 아무리 강한 에스퍼라고 해도 기도가 막히면 살아남을 수 없다. 머리에 피가 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주현은 저항하지 않았다. 차인호가 무어라 속삭였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운다고 바로 달려오는 나는 미쳐 버린 걸까?”

“큭, 콜록! 콜록!”

갑자기 들이닥친 산소에 본능적으로 몸을 말며 아픈 목을 감싼 주현은 뺨에 닿는 물방울에 힘겹게 눈을 떴다. 그 순간 차인호가 온몸으로 덮쳐 왔다. 웅크린 주현을 뒤에서 끌어안고 허리를 감싸는 팔이 제법 단단했다.

차인호가 주현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목덜미에 닿는 숨결은 아주 따뜻하고 조금 간지러웠다. 타인이 등 뒤에 있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주현은 저절로 힘이 빠지는 몸을 막을 수 없었다. 매칭 가이드의 위력은 대단했다.

‘어쩌면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런 걸지도.’

목이 졸렸는데도. 그를 증오하는 사람인데도. 인생이 거지 같은 신주현은 사랑마저도 거지같이 한다. 우스울 정도로 그와 어울린다.

회색 천장이 짙은 주홍색으로 물들었다. 분명 엿 같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는데도 차인호가 그를 끌어안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좋은 날이 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힐끗 본 팔은 상처는 사라졌어도 여전히 피와 먼지로 더러웠다. 차인호가 관자놀이 근처에 입술을 문질렀다. 부끄러움은 죄악감에 씻겨 내려갔다.

주현은 영원히 이렇게 있을 수 있었지만,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매는 먼저 맞는 게 낫다. 입술을 꾹 깨문 주현이 잠긴 목소리를 뱉었다.

“……<동백 보호소>에서-”

“주현 씨. 저 누군지 모르죠.”

부드럽고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선을 긋는 어투. 늘 듣던 차인호의 목소리. 주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차인호의 말이 맞다. 주현은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연우 형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 속 공백을 찾기 전까지는 무엇 하나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예상 말고 확실하게.”

“……네.”

“정확히 떠오를 때까지 이 얘기는 묻어 두기로 해요. 기억도 안 나는 사람 몰아붙이는 것도 웃기니까.”

“하지만-”

“앞으로 그 얘기 꺼내면 혼낼 거예요.”

아이 취급하는 말에 습관적으로 화가 났으나 곧 가라앉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무척 부드러웠다. 조금 전 목을 졸랐던 손은 아주 다정하게 주현에게 닿아 왔다. 그 차이가 등 뒤의 남자를 좀 더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다만 두 사람의 관계가 오직 매칭 에스퍼와 가이드일 뿐이라는 바보 같은 연극을 계속해야만 그가 옆에 있어 줄 거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살인자와 피해자가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 사람은 뭡니까?”

주현이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독방에 갇히게 된 원인인 가짜 차인호. 은근슬쩍 흘린 말에도 눈치 빠른 차인호는 곧장 뜻을 알아차린 듯했다.

“솔직하게 말할까요, 아니면 듣기 좋은 말을 해 줄까요?”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주현의 팔을 스쳤다. 이제는 수갑도 쇠사슬도 없는 손목을 따스한 온기가 감쌌다. 이상하게도 연약한 살과 뼈로 만들어진 손이 수갑보다 훨씬 벗어나기 힘들었다.

“제가 반란군이라는 걸 당신에게 들켜서, 내부에서 주현 씨를 처분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언제 그 사실을 말할지 모르니까요.”

“옳은 판단입니다.”

“네, 하아, 제가 당신을 회유하겠다고 했는데, 저를 믿을 수 없다지 뭐예요. 이미 한 번 실수하지 않았냐고. 그래서 대신 검증해 줄 사람을 보낸 거예요. 주현 씨가 반란군과 뜻이 맞을지.”

주현은 잠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다. 그는 차인호의 얼굴로 찾아온 반란군을 욕하고 때리고 목을 졸랐다.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차인호의 손가락이 주현의 손가락 사이로 기어들어 왔다. 간지럽고 따뜻해서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일단은 내버려 두자고 이야기가 끝났어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좀 험하게 굴었는데요.”

“그, 사실…… 도청기가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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