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27화
주현은 통증을 신경 쓰지 않으며 눈앞의 남자를 어떻게든 망가뜨리기 위해 애썼다. 의자가 구르고 직원이 날아갔다. 평소 짜증 나게 굴던 놈에게 한 방 먹여 줬다는 기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드디어 가짜의 얼굴에 공포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탕-
주현은 천천히 쓰러졌다. 넘어지며 테이블에 박은 이마가 찢어졌는지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고, 옆구리에 심장이 박힌 것처럼 강한 맥박이 느껴졌다. 화상을 입은 듯 뜨거운 상처를 만질 수는 없었다. 어느새 수갑이 풀린 두 손이 등 뒤에서 다시금 묶였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총알 한두 방 정도야 무시하고 움직이겠지만, 제압을 위해 약이라도 바른 건지 손끝부터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했다.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겠다 싶을 만큼 머리가 어지러웠다. 먹어 본 적은 없으나 술에 취하면 이런 기분일까 잠시 생각했다.
“성가시게 하고 있어.”
“가이딩 약물은…….”
“차인호 씨, 죄송…….”
“처벌을…….”
대화가 귀로 들어와서 반대쪽 귀로 곧장 빠져나갔다. 주저앉은 주현은 그를 거칠게 묶는 직원을 떼어 내고 싶었지만, 입술 하나 벙긋하지 못했다. 절로 아래를 향하는 시야에 바닥을 적시는 붉은 물결이 들어왔다. 그게 자신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라는 건 조금 후에 알았다.
“그 사람 살 수 있을까요?”
푹 숙인 주현의 고개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차인호가 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보기 싫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목숨 하나는 질긴 놈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런 짓을 당하고도 왜…….”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휙 들린 얼굴은 분명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을 게 확실해서 인상이라도 쓰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차인호. 아니, 가짜. 둔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아무튼 그가 싫었다. 내 가이드를 돌려놓으라고 외치고 싶었다.
주현이 입을 열었다. 엿이나 먹어라 망할 놈아. 있는 힘껏 외쳤지만, 사실 목소리가 나오긴 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묘한 감정을 담은 새까만 눈동자였다. 그가 방에 들어온 후로 계속해서 이어지던 평가하는 시선에 마침표가 찍혔다는 느낌이 들었다.
* * *
쿠당탕! 강한 힘으로 밀쳐져 바닥에 구른 주현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그대로 몸에서 힘을 뺐다. 몸을 감은 쇠사슬이 얼마나 두꺼운지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넘어진 충격으로 간신히 아물었던 옆구리의 상처가 빠끔히 열렸다. 비릿한 피 냄새가 C동의 부소장 집무실을 채웠다. 온 얼굴에 멍이 들어서 남이 보면 원래 피부가 파랗고 보라색인 사람이라 생각할 것 같았다.
입안에 피가 고였지만 뱉을 힘도 없어서 그냥 벌린 입술로 침과 섞인 혈액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제대로 사고를 쳤더군.”
태석의 목소리에는 생각보다 대단한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분 좋아 보인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주현은 태석이 남을 괴롭힐 때를 제외하고 기분 좋은 날이 있기는 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매칭 가이드의 목을 졸라? 이 이야기가 기자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너희 입장은 지금보다 훨씬 안 좋아지겠어.”
주현은 결코 모든 폭주 에스퍼를 대표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안 그래도 무섭고 위험한 이미지인 폭주 에스퍼는 가이드마저 위협하는 몹쓸 놈들이라는 소문이 날개를 달고 퍼져 나가겠지.
만약 지금 여기서 목을 졸린 사람은 차인호가 아니고 반란군 동료라는 걸 말한다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건 그가 아니라 차인호다. 하지만 주현은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그 가이드의 삶을 수도 없이 엉망으로 만든 주제에 한 번 더 그리할 수는 없었다.
카펫을 밟고 다가온 구두가 가까운 거리에서 멈췄다. 윤이 나는 구두코를 멍하니 응시하던 주현은 콜록, 가벼운 기침과 함께 눈가를 떨었다.
주현의 상처는 전부 직원이 만들었다. 태석은 얼마나 더 아프게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다 좋으니까 머릿속을 헤집지만 않았으면 했다.
“왜 그런 거냐. 가이드와의 관계는 양호했던 걸로 아는데.”
태석의 손은 크고 단단하다. 주현의 턱을 틀어쥔 손끝으로 미약한 가이딩이 흘러 들어왔다. 늘 생각했지만 참 보잘것없는 가이딩이다.
“……그 사람이, 매칭을 끊는다고 해서. 흥분했습니다.”
“한심하긴.”
손이 멀어졌다. 다시금 툭 떨어진 얼굴이 바닥에 닿았다. 차가운 온도에 아픈 줄도 몰랐던 볼이 욱신거렸고, 몸을 옥죄는 쇠사슬이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다.
비록 주현이 태석을 무척 싫어한다고 해도 그의 말에는 내심 동의했다. 매칭 가이드에게 버려져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날뛰며 자기 가이드를 다치게 한 에스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 또한 한심한 놈이라고 비웃었을 테니까.
그런 하찮은 오해를 받는 건 싫지만, 그의 가이드로 둔갑한 누군가에게 동정심으로 죽도록 바랐던 말을 들어서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다행스럽게도 너의 잘나신 매칭 가이드는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 습니까.”
“다만 조건이 있다.”
주현의 어깨가 굳었다. 태석치고는 부드럽던 분위기가 그 한마디로 일변했다. 말 그대로 뇌를 뒤흔들어 깊이 박힌 트라우마가 멋대로 주현의 몸을 떨리게 했다. 등 뒤로 묶인 손끝이 차게 식었다.
“그놈이 속한 회사에서 새로 추진할 사업이 쓰레기장과 관련 있다더군. 그곳에서 필요한 정보를 구해 달라고 했다. 민간인 주제에 협회의 인력을 멋대로 사용한다는 오만한 요구였지. 그래서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는가?”
“…….”
“알겠다고 했다. 싫다고 하면 멍청한 시민들은 폭주 에스퍼에게 자신의 안전을 위협받았다며 날뛸 테니까.”
콱!
“아, 으…….”
벌린 입에서 버러지의 단말마 같은 비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닦인 깨끗한 구두에 밟힌 등이 부러진 늑골을 짓눌렀다.
“도움은 못 될망정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철그럭. 사슬이 바닥을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불행히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리아의 예언을 듣지 못했다면, 주현은 그가 오늘 죽는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왜 나를 개새끼 한 마리 훈련시키는 것도 못 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냐.”
두려움은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약해진 주현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언제부터인지 마음속에 들어앉은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주현은 그대로 혀를 깨물었다. 두려움은 고통에 밀려 사라졌다.
간신히 목을 들어 올려다본 태석은 아주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나서야 주현은 눈앞의 남자도 인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수치심을 느끼고, 분노하고,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인간. 일말의 두려움까지도 끝까지 타 버린 성냥불처럼 재가 되어 사라졌다. 주현이 눈을 감았다.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독방은 좁고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그래도 몸은 편했다. 솔직히 말해 담요 한 장 없이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있는 건 그리 편하다고 할 순 없으나 적어도 끝없이 두들겨 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몸을 움직이면 부러진 뼈가 어긋나며 끔찍한 통증이 느껴진다. 다행히 움직여 봤자 할 일도 없다. 가만히 누워 귀청이 터질 것 같은 고요를 만끽하는 건 무척 지루하고 약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게 바로 주현이 받는 처벌이기에 내보내 달라고 외치며 문을 두드릴 수는 없었다.
“콜록, 콜록!”
나부끼는 먼지가 목구멍을 간질였다. 천천히 팔을 든 주현이 새로 지급된 빨간 스카프를 풀어 입에 둘렀다.
‘남들이 보면 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피식 흘러나온 웃음에는 어떠한 열의도 담기지 않았다. 약간이라도 편한 자세를 찾고자 조금씩 몸을 웅크리던 주현이 한순간 들이닥친 고통에 이를 악물며 비명을 참았다.
결국 다시금 처음과 같은 자세로 누운 그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이러고 있으니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물론 뭐든 상관없지만.
독방에 감금되는 건 상당히 드문 처벌이었다. 감금할 시간에 차라리 몇 대 때리고는 가이딩 약물을 맞혀 임무에 내던지는 게 훨씬 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아, 아파 죽겠다…….”
혼자 있을 때의 장점은 무슨 말을 해도 된다는 것이다. 주현은 마음껏 얼굴을 구겼다. 고통스러운 표정은 어둠에 먹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금은 달리 말해 생각할 시간이 아주 많다는 뜻과 같았다. 주현은 머릿속을 파고드는 사고에 힘없이 몸을 맡겼다. 차인호, 매칭, <동백 보호소>, 생존자, 살인자, 에스퍼, 가이드, 반란군, 협회.
끝없이 쏟아지는 생각은 부러진 몸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감정도 함께 끌고 왔다. 아련한 추억에 웃었다가 그걸 망친 게 자신이라는 걸 떠올리곤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사랑에 가슴이 저렸고, 끝내 겁에 질려 죽은 벌레처럼 웅크렸다.
“…….”
주현은 평소 시간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빛 한 줌 없는 곳에서 가만히 있을 때는 1초가 10분 같고, 한 시간이 열흘처럼 느껴진다. 기절인지 수면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잠에 몇 번 빠졌다 깨어난 후에는 낮과 밤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건은 그때쯤에 일어났다. 내내 침묵만이 가득하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주현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좁은 방을 울리는 소리는 분명 훌쩍임이었다.
방에 있는 사람이 한 명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냐고 누구에게라도 따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