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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140/161)

폭주 에스퍼 126화

남자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다지 예상한 대답은 아닌지 고민스럽게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그는, 반란군은 주현이 어떤 대답을 할 거라고 예상한 걸까. 협박하려고? 쥐고 흔들 수 있는 카드는 아껴 둬야 하니까? 주현도 반란군에 협력했다는 의혹을 피하기 위해?

미안하지만 주현은 그리 복잡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매칭 에스퍼일 뿐이다.

“아, 흠, 그것도 그렇네요. 차라리 목적이 있는 게 나은데…….”

남자의 작은 혼잣말은 선명하게 고막을 울렸다. 주현이 그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의견에는 동의했다. 감정은 믿을 수 없다. 언제 변심할지 아무도 모르는 이상, 중요한 정보를 걸고 가만히 앉아 상대의 마음이 지속되길 기다리는 건 멍청한 짓이다.

분명 똑같이 생각했을 남자가 검지와 중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차인호에게서는 본 적 없는 버릇이었다. 안대 속이 지독히도 간지러웠다. 주현은 의식적으로 표정을 지웠다.

“저희 매칭 얼마 안 남은 거 알고 있죠?”

모를 수가 없다. 이미 시한부가 된 상황에서도 그날을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이 모든 감정이 매칭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 때문인지, 혹은 정말로 차인호를 향한 호의인지. 이제는 구분조차 할 수 없다. 어쩌면 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결국 같은 결과를 도출하니까. 그를 보면 심장이 뛰고 가슴이 아파진다는, 그런 한심한 결과를.

“이번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매칭을 연장할 생각도 있습니다. 솔직히 가이딩 받기 어렵잖아요?”

토독, 토독.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남자는 지극히 선심 쓴다는 어투로 말했다.

“폭주 에스퍼를 가이딩한다는 사람은 좀처럼 없으니까요. 이곳에 오는 가이드는 무섭고 힘들 테고, 조금이나마 익숙한 제가 도와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C동에 오는 가이드 중에 정상적인 놈은 없다. 수많은 경험 끝에 도출된 사실이다.

몇 달 전, 차인호는 주현을 괴롭히고 모욕하던 가이드를 끌어낸 적이 있다. 주현보다도 훨씬 화난 얼굴로 역겨운 남자를 문밖으로 내동댕이쳤다.

‘내 매칭 에스퍼가 왜 네 거냐고 물었어.’

분노가 담긴 그의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가끔 떠올라 주현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목소리가 끔찍한 가이드들을 두려움에 떠는 불쌍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주현은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가이드를 사랑하는 게 본능이라는 에스퍼가 가이드를 혐오하게 될 정도로 몰아붙인 빌어먹을 범죄자들이. 셀 수 없는 모욕과 고통과 치욕과 인간임을 부정당했던 끝없는 나날이. 누군지도 모르는 놈이 내 가이드의 탈을 쓰고 멋대로 지껄이는 이 상황이.

“그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마. 죽여 버리기 전에.”

뇌가 명령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 낮고 떨리는 음성이 그가 듣기에도 궁지에 몰린 사람 같았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던 가짜가 빠르게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마치 재미있는 걸 봤다는 듯이.

“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 그쪽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여기 오는 가이드에게 시급도 아니고 초급으로 돈 쳐줘야 할 것 같은데.”

“닥쳐.”

“대화하려면 닥치면 안 되죠. 상대가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한다고 바로 공격적으로 나오면 안 돼요. 그러면 사람들이 싫어한다고요.”

“난 너랑 대화할 생각 없어. 네까짓 게 나를 싫어하든 말든, X도 상관없다고. 가르치려 들지 마. 가짜 새끼가.”

남자가 무표정으로 주현을 응시했다. 분명 차인호의 얼굴임에도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기질적인 눈빛이 끔찍했다. 차인호가 보고 싶었다.

“자존심 세우느라 상처 주는 말만 한다는 거 진짜였네.”

그가 툭 내뱉은 목소리에 주현은 말문이 막힌다는 표현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입을 벌려도 말은 나오지 않고, 그 전에 숨조차 똑바로 들이쉴 수 없었다. 주현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반란군은 한 사람밖에 없다. 차인호.

남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마치 커다란 웃음을 참는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이 꼴도 보기 싫었다. 분명 그런 표정을 지어도 눈이 시릴 정도로 예쁜 얼굴인데. 어쩌면 주현은 차인호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표정과 눈빛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풉, 그 표정은 뭐야?”

주현은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저 믿었던 주인에게 걷어차인 개 같은 표정이라도 짓고 있는 게 아닐까 예상할 뿐이다. 수치심이 아프게 달려들었다. 주현이 가장 싫어하는 감각이었다.

“왜 배신당한 표정이야? 내가 싫어하든 말든 상관없다면서.”

“……닥치라고 했어.”

“또 그런 말 하네. 자꾸 그러면 ‘진짜’한테 다 말할 거예요. 태도가 아주 불량하고 욕설만 늘어놓았다고. 매칭을 계속하기에는 위험하다고.”

“…….”

“매칭 계약을 조기 종료하는 게 좋겠다고.”

눈에 힘을 주고 어금니를 강하게 깨문 주현이 죽일 듯이 눈앞의 낯선 사람을 노려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겁에 질려 주저앉을 시선에도 남자는 무서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배를 잡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아. 아하, 아하하하! 역시 그런 거구나. 풋, 그래, 그런 거였어. 진짜 웃기네.”

“그 얼굴로 헛소리하지 마.”

“괴물 주제에 사랑이라니, 하하!”

이번에는 거울이 없어도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정곡을 찔린 비참하고 부끄러운 얼굴.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에게 덤벼든다.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쥐새끼가 고양이의 목을 비틀까 진심으로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이젠 짝사랑이라고 놀리지도 못하겠네.”

무어라 작게 중얼거린 남자가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주현을 바라보았다. 깔보는 듯한 재수 없는 시선이었다.

“불쌍하니까 서비스 하나 할게.”

“필요 없으니까 얼른-”

“주현 씨. 사랑해요.”

남자가, 차인호가 웃었다. 다른 건 다 달라도 연습이라도 한 듯 눈을 접으며 예쁘게 미소 짓는 얼굴만은 주현이 사랑해 마지않는 가이드와 아주 흡사해서 머릿속이 한순간 새빨갛게 물들었다.

“윽, 큭, 컥!”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남자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눈앞의 광경부터 미세한 바람의 흐름, 숨 막힌 목소리, 심지어는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까지 어딘가 멀리서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뻗어 나간 팔이 제 팔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버둥거리는 남자는 전혀 모르는 타인 같았다.

주현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거친 숨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걸 깨닫자 현실을 인식하는 건 금방이었다.

꿈에서 깬 기분으로 비틀거린 주현이 저도 모르게 손에서 힘을 풀었다.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약간의 산소를 얻을 수 있을 정도였다.

“큭, 콜록! 콜록! 이게, 무슨-”

“봐준다고 너무 기어오르면 안 되지.”

“괴물 새끼가……!”

“닥쳐.”

그 얼굴로, 그 목소리로 나를 괴물이라고 부르지 마. 주현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그러모아 애원을 삼켰다.

여기서 이 남자를 죽였을 때, 능력이 풀려 외모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가 차인호를 죽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란군에 대해 알릴 수는 없으니 진짜 차인호는 죽은 척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가능성만일지라도 그리 생각하니 손에 완전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손을 놓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미웠다.

“콜록! 나, 날 죽이면 너는 무조건 살해당해. 그리고 독단적인 행동으로 동료를 잃게 한 차인호는 처벌받게 되겠지.”

“내가 널 죽이는 것과 그 사람이랑 무슨 상관이 있지?”

“애초에 자기 대신에 날 보낸 게 그 자식이니까!”

이로써 차인호는 어쩔 수 없이 반란군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러니까 희망은 싫다. 애초에 기대가 없었다면 실망도 없었을 텐데.

잠시 주춤한 주현은 남자가 주머니를 뒤적이는 걸 멍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달칵. 시끄러운 머릿속 한구석에서 생각했다. 익숙한 소리라고.

여전히 목을 붙잡힌 남자가 씨익 웃었다.

철컹, 쾅! 거칠게 문이 열리며 단단한 부츠가 바닥을 밟는 소리가 여럿 울렸다. 들이닥친 직원들이 남자를 강하게 붙잡은 주현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쪽 잡아!”

“젠장, 무슨 힘이……!”

안전을 위해 손목에 채운 수갑이 지금은 명백한 방해물이었다. 등 뒤로 팔을 돌릴 수 없으니 제압은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주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직원의 지시에 따르는 게 좋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곧 있으면 죽을 텐데. 어차피 차인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텐데. 어차피 비참하게 끝날 인생인데. 어차피…….

“불쌍한 놈.”

작은 속삭임은 온통 시끄러운 고함 틈새로 선명하게 귀를 울렸다. 주현이 고개를 들었다. 멀찍이 떨어져 안전한 곳에 선 남자가 그를 비웃고 있었다.

주현의 수치심은 보통 열등감에서 나온다. 열등한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다 못해 자신보다 잘난 상대를 미워하게 되는 지저분한 마음. 어린 주현이 온 세상 어린이를 모조리 싫어하던 것과 같다. 그는 아무래도 초등학생 이후로 내면의 성장이라는 게 티끌만큼도 없었던 모양이다.

“으악!”

“뒈지기 싫으면 얼른 제압해!”

능력을 발동하자 수갑 때문에 극심한 격통이 몰아쳤다. 하지만 특수한 수갑은 역시나 고통만 줄 뿐 능력의 발동을 막지는 못했다. 모순적이게도 주현의 고통에 대한 역치를 한계까지 끌어 올린 이가 바로 협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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