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25화
“차인호 씨.”
“네?”
“죄송해요. 당신, 담배 싫어하는데.”
차인호가 말없이 웃었다. 까만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주현은 절망스러운 기분을 감추기 위해 깊은숨을 내뱉고는 반쯤 남은 담배를 테이블에 비볐다. 희미하게 흘러 들어오는 방사 가이딩에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죄송하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가이드의 몸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 앞으로 기울었다. 주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거의 깜빡이지 않는 붉은 눈이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는데도 차인호는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C동 부소장, 류태석. 아시죠?”
“……알죠.”
“제가 그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었거든요. 아주 나쁜 소문이요.”
태석이 무척 못되고 성질 더러운 아저씨라는 건 C동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돈은 밝히지만 그다지 야망은 없는 소장, 두식과는 달리 태석은 언제나 조급하게 임무를 맡겼다.
주현은 아무것도 입에 담지 않으며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승철이 시무룩한 얼굴이라고 곧잘 말하는 표정으로 타 버린 성냥개비를 손끝으로 굴리며.
말을 잇던 차인호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좀 알아보고 싶은데,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니까 도움이 필요하거든요. 그러니까-”
“저기요.”
수갑에 묶인 양손이 휙 나아갔다. 들쥐를 사냥하는 매처럼 빠르게 옷깃을 잡아챈 주현이 강한 힘으로 그를 잡아당겼다. 테이블로 넘어진 남자가 아픈 듯 인상 썼으나 주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연기를 할 거면 잘 좀 하시던가요.”
“네, 네? 그게 무슨…….”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말 안 해요. 얼굴만 같다고 같은 게 아니라고.”
코앞까지 바짝 잡아당긴 얼굴은 명백한 공포와 거부감을 담은 채 떨고 있었다. 이목구비, 냄새, 옷차림, 모든 게 차인호와 같았지만 동시에 지독히도 닮지 않았다. 미소 짓는 근육의 움직임까지도 달라서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못 알아보기엔 주현은 차인호를 너무나도 좋아한다. 그에게 대단한 관심을 쏟을 만큼.
‘겉모습을 바꾸는 능력인가?’
하지만 본인의 능력은 아닌 듯, 흘러나오는 가이딩이 평소 받아들이던 차인호의 가이딩과 약간 달랐다. 매칭 가이드이기 때문에 다르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이딩까지 완벽하게 따라 한 게 아닌 걸 보면 외형만 바꾸는 능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가설이 맞다면 이자는 가이드인 게 분명했다.
주현이 손에서 조금 힘을 풀었다. 일반인은 느끼지도 못할 변화라는 건 모르는 척했다.
“진짜 쪽팔려서 말하기 싫은데, 지금은 가짜라도 감지덕지거든?”
까만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꼭 미치광이 살인마 같았다. 벌건 눈을 크게 뜬 채 인간미 없는 표정으로 노려보는 게 상당히 섬뜩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이 분위기를 한층 살벌하게 만들었다. 주현이 어금니를 깨물며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그러니까 제대로 좀 해 봐.”
“윽…….”
“속아 줄 기분이라도 나게.”
반란군인지 뭔지는 몰라도 주현은 차인호가 부탁하는 거라면 귀찮은 척 연기하면서도 들어줄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주현이 보기 싫어서 가짜를 대신 보낸 차인호라 해도 여전히 그 마음은 같았다.
분명 가이딩 수치가 낮아 몸 여기저기가 아팠음에도 흘러 들어오는 가이딩을 할 수만 있다면 토해 내고 싶었다. 매칭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가 벌써 일어난 걸까? 뭐든 상관없다. 다만 주현은 진짜 차인호의 따뜻하고 어딘가 달콤한 가이딩을 원할 뿐이다.
비록 하나밖에 없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가짜를 바라보길 한참, 침을 꿀꺽 삼킨 남자가 씨익 웃었다. 그럭저럭 감정을 숨기는 게 익숙해 보였다.
“하하……. 주현 씨,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네요.”
“좀 더 예쁘게 웃고, 좀 더 못되게 말해야지. 할 생각이 있는 거야?”
“……저를 가짜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모르겠는데요. 자꾸 이러시면 입장이 불리해질 수도 있어요.”
“이제야 좀 비슷하네. 아직 멀었지만.”
주현이 거칠게 손을 놓자 남자는 뒤로 훌쩍 물러섰다. 목이 졸렸는지 기침을 흘리며 목덜미를 문지르는 손이 떨고 있었다. 표정, 말투, 행동. 그 어디에도 차인호가 없었으나 얼굴만은 차인호라서, 주현은 오래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저 당신 가이드 맞아요. 뭐, 추억이라도 얘기할까요? 라이터. 라이터는 잘 가지고 있어요? 그거 제가 줬잖아요.”
주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가이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멍한 표정을 순식간에 갈무리하곤 테이블 밑에서 손을 말아 쥐었다.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추억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벌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거 버린 지가 언제인데.”
“……그래요?”
“아니면 라이터 썼겠지, 왜 성냥개비나 들고 다니겠습니까?”
가짜의 눈이 가늘어졌다. 테이블에 대충 놓인 성냥을 힐끗거린 그가 가볍게 혀를 찼다. 마치 임무 현장에서 지급된 정보에 오류가 있다는 걸 깨달은 요원과 비슷했다.
“하하, 뭐,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죠. 아무튼 주현 씨. 이상한 망상에 빠져서 저를 위협하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건 당신에게도 저에게도 좋지 않아요. 그 정도는 아시잖아요?”
신랄한 말투가 꼭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차인호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가끔 툭툭 쏘아붙이는 말은 연우를 떠올리게 했다.
주현은 문득 새하얀 붕대와 예쁘게 빛나던 눈을 떠올렸다. 고개 들어 바라본 가짜의 기다란 속눈썹은 기분 탓인지 연우의 눈과 닮아 보였다. 붕대 때문에 한 번도 연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게 이상하지 않았다.
떠올렸다가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상처 입을까 봐 무서워 감히 곱씹지도 못했던 옛날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었다.
차인호는 <동백 보호소> 출신이다. 그는 주현의 가족이었다. 같이 웃으며 떠들고 즐겁게,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좋았던 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에 함께 있었다. 주현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도망쳤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물꼬는 막을 수 없었다. 질문이 많았다. 그 지옥을 봤으면서 어떻게 나를 만나러 온 건지, 무슨 마음으로 나에게 웃어 줬는지, 이곳에서 지었던 미소는 전부 가짜였는지. 물음표가 없는 목소리는 하나뿐이었다.
‘살아서 다행이다.’
주현은 내내 혼자였는데 차인호는 그래도 새로운 가족을 만나서 다행이다. 건강하게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정말, 정말로 다행이다.
그가 홍연우든 다른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저 선생님과 가족들이 아끼던 누군가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약간이나마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차인호는 인생을 망친 주현이 끔찍하게 싫겠지만, 그래도.
“저는 이곳에 올 때마다 목숨을 걸고 와요.”
생각에 잠겨 있던 주현은 귀를 스치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가이드는 여전히 방사 가이딩을 뿌리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본인 일이니까 잘 아시잖아요. 언제 폭주할지 모른다는 거. 그래도 저는 주현 씨를 가이딩하기 위해 매주 이곳에 왔습니다. 오직 당신을 위해서요.”
긴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남자는 협박과 회유에 능하다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죄책감을 건드리는 건 가장 기본적인 수법 중 하나였다.
“충격받았다는 거 알아요. 믿었던 가이드가 반란군이었다니. 배신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죠. 안 그래도 당신은 저희 일원의 손에 죽을 뻔하기도 했으니까. 엉망으로 당했다던데, 무서웠죠? 대신 사과할게요.”
죄책감 자극 다음에는 공감과 위로. 그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속으로 반란군에 대한 위험도를 조금 더 높인 주현이 유순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미안하게도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로에서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에게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주현은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차인호는 그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사실을 걱정하기까지 했다.
주현의 소중한 추억을 짓밟은 남자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사람은 원래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자기방어로 사고가 이상하게 튀기도 한대요. 저를 가짜라고 우기는 것도 주현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배신감에 슬퍼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네. 그냥 천천히 현실을 받아들이면 돼요. 저는 반란군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당신의 가이드니까요.”
“그럼 가이딩만 하고 꺼질 것이지 계속 지껄이는 이유나 말해 보세요.”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분노보다는 성가심이 담긴 눈으로 주현을 응시하던 그가 손끝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어쩌면 가짜는 긴 시간을 들여서 확실하게 속아 넘길 만큼 주현이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손을 내렸다. 주현은 피곤한 표정만큼은 차인호와 약간 닮았다고 생각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죠?”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차인호와 가깝게 마주 앉을 기회가 없던 사람은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로 숙련된 연기였다. 주현이 조금만 차인호를 덜 좋아했다면 의심스러워하면서도 그냥 넘어갔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가이딩만 받으면 에스퍼는 병에 걸리지도 않으니 이건 정신적인 문제일까. 눈앞의 남자가 반란군에 소속되어 있다면 주현과의 대화도 차인호에게 닿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바로 주현이 솔직하게 대답한 유일한 이유였다.
치미는 패배감을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 연약한 목소리가 흘러 나갔다.
“……자신의 매칭 가이드를 팔아넘기는 에스퍼가 어디 있습니까?”
이미 애착이 형성된 이후라면 웬만한 에스퍼는 매칭 가이드의 치부를 기꺼이 품을 것이다. 다만 다른 누구도 아닌 주현이 그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세상은 역시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