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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138/161)

폭주 에스퍼 124화

“얼마 전까지 좀 줄이더니 요즘엔 예전보다 배로 피우네.”

세화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으나 그 안에 담긴 미약한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의문이나 호기심일지도 모른다. 주현은 뭐든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필터를 빨아들였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녹음이 가득해서 평화롭다고 착각하게 될 때가 있다.

“진봄보다 많이 피우잖아. 이 골초 새끼야.”

“어쩌라고. 썩어도 내 폐가 썩어.”

“간접흡연 몰라?”

“누나부터 끊고 말하든가.”

“이거라도 없으면 살 수 있겠냐.”

말을 마친 세화가 후- 긴 숨을 내뱉었다. 숨결에 섞인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녀가 몸을 기댄 난간이 조금 기울며 끼익 소리가 났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화의 말대로 최근 주현의 흡연 빈도는 훨씬 높아졌다. 그에 따라 담배와 성냥 소모도 커서 매점이 문을 연 날에는 왕창 털어 오기 일쑤였다. 어딘가 핼쑥해진 희록은 곳곳에 멍이 든 몸과는 반대로 전보다 자주 웃고 있었다.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차인호 때문이야?”

벽에 기대앉아 있던 주현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세화는 여전히 난간에 팔을 걸친 채 머나먼 어딘가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간 찡그린 미간,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다시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니 제법 넓은 옥상이 눈에 들어왔다. 가끔 이불을 널곤 하는 빨랫줄이 바람에 흔들렸다. 타일이 깨진 바닥 곳곳에는 이름 모를 잡초가 자라 있었다. 이 광경을 보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티 나?”

“숨길 생각도 없는 주제에.”

끝까지 타들어 간 필터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던 주현이 티셔츠 소매를 걷었다. 칙, 날카로운 통증은 금방 가라앉았다. 번쩍 뜨인 정신이 다시금 침몰해 가기 시작했다. 최근 몇 달간 팔이 이토록 얼룩졌던 적은 없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등신처럼 구는 건 그놈이랑 연관될 때밖에 없잖아.”

“……나 등신 같아?”

“어. 네 꼴을 봐라.”

천천히 한쪽 무릎을 끌어안은 주현이 아침에 욕실 거울로 봤던 자신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섬뜩한데 마치 죽은 생선처럼 생기 없는 눈, 창백한 피부, 숨길 수 없는 상처, 살이 내린 얼굴, 동그란 흉터로 뒤덮인 양팔. 더럽고 비루한 남자는 시체 같은 낯짝으로 거울을 응시했다.

“그게 사람 꼴이냐? 걔가 뭐라고 했는데. 이제 안 온대?”

마지막으로 만난 날, 차인호는 떨리는 숨결만을 남기고 가이딩 룸을 나갔다. 그래서 앞으로 매칭 계약이 어떻게 되는지조차 주현은 알 수 없다. 차라리 깔끔하게 끝났으면 하는 마음과 그래도 마지막 인사라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번갈아 그를 괴롭혔다.

하나뿐인 눈을 찡그린 채 아픔을 견디던 주현이 다시금 품에서 담배와 성냥을 꺼내 들었다. 옆에서 세화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 임무 타깃이 그 사람 가족이었어. 유품, 하, 유품 보고 알아챘어.”

“아.”

연기가 넘어갈 때마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주현은 다른 무엇보다 그 감각에 중독된 걸지도 모른다. 자신을 죽이는 감각. 느린 자살. 발 옆에 피어난 잡초를 힘껏 밟았지만 상처받은 기색은 없었다. 그게 좀 부러웠다.

“운 한번 더럽게 없네.”

“…….”

“걔도, 너도. 특히 너는 진짜 지지리도 운이 없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다음 생이 끔찍해져?”

“몰라. 어쩌면.”

“그럼 난 다음 생에도 이렇게 살겠네.”

세화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팔에 얼굴을 파묻자 아늑한 어둠이 주현을 덮쳐 왔다. 약간 서늘하게 느껴지는 가을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날아갔고, 이내 잠잠해진 공기에 조금 쓸쓸해졌다.

홀로 타들어 가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 시간을 내다 버리는 이 순간에도 죄는 쌓이고 있다. 태어나서 첫 숨을 들이쉬자마자 등에 업은 죄악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다음 생이 두려워졌다.

“죽기 싫다.”

스스로가 들어도 겁에 질린 볼품없는 목소리였다. 작은 중얼거림이어도 둘밖에 없는 옥상에서는 선명하게 울렸다. 멋대로 빠져나간 속마음이 부끄러웠다.

“그러냐.”

담백한 대답은 씁쓰레한 냄새와 함께 들려왔다. 위로도 공감도 없지만 그렇다고 차갑게 내치지는 않는, 세화만의 거리가 기꺼웠다. 그에 힘입어 조금 더 몸을 웅크린 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에 문질러진 이마가 따끔거렸다.

* * *

차인호가, 혹은 그의 소속사나 반란군에서 무슨 말을 한 건지는 몰라도 주현에게 가이딩 약물이 처방되었다. 언뜻 듣기로는 차인호 쪽에서 일주일에 한 번은 온다던 약속을 깬 거라 그가 약값을 부담한다고 했다. 어쩌면 남은 계약 기간 내내 약값을 대주다 매칭이 끝날지도 모른다.

주현은 이 상황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차인호를 만나지 못하는 건 싫었지만, 매칭이 끊겨 역겨운 가이드와 만날 시간이 미뤄지는 건 반길 만한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차인호가 반란군이라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가 반란군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애초에 협회에 애착이 있는 것도, 반란군에게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예전에 반란군과 싸우다 죽을 뻔하기는 했으나 그건 주현이 약한 탓이지 반란군 전체의 잘못이 아니었다.

“윽…….”

주현은 혈관으로 흘러 들어가는 약물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인위적인 가이딩이 목덜미의 솜털을 쭈뼛 솟게 했다. 지금껏 수백 번은 더 맞았음에도 여전히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어쩌면 최근, 매칭 가이드의 질 좋은 가이딩만 받아들였기에 더욱 거부감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채경이 형은 이걸 어떻게 반기는지 모르겠네.’

늘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동료를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연구소 소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실험당하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쥐새끼.

곧 폐기될 쥐가 한숨을 내쉬었다. 갈 곳 잃은 분노가 안에서 썩기 시작했다.

이젠 아득하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 새아빠가 상한 귤 하나 때문에 상자 속의 다른 귤도 상해 버렸다고 투덜거렸던 게 뒤이어 떠올랐다. 부패는 전염된다. 주현은 그에게 더 이상 무엇이 멀쩡히 남아 있는지 모른다.

가이드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날로부터 나흘이 지난 오전이었다.

“그쪽 손도 내밀어.”

직원의 명령에 따라 얌전히 손을 내민 주현은 철컥- 소리와 함께 수갑이 채워지는 걸 묵묵히 바라보았다.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비위 맞추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 같은데.”

평소 살갑지는 않아도 일부러 폭주 에스퍼를 괴롭히지는 않는 직원이 단단히 채워졌는지 수갑을 확인하며 툭 말했다. 역시 이건 차인호의 요구인 듯했다.

주현은 그 사실에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자신을 속으로 꾸짖었다. 차인호가 정말로 <동백 보호소> 출신이라면, 주현의 폭주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면 두려운 게 당연했다. 주현도 고작 그를 결박했던 남자를 아직까지 꺼리고 있으니까 감히 그를 타박할 수 없다.

의도적으로 <동백 보호소>를 머릿속에서 가라앉힌 주현이 직원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에 눈이 부셨다. 다행히도 이 길은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다. 눈꺼풀을 닫아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했다.

“들어가라.”

철컹, 끼익- 문이 열렸다. 차인호는 아직 오지 않았는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의자에 앉은 주현이 습관적으로 안주머니를 매만졌다. 하지만 담배를 꺼내지는 않았다. 담배 냄새가 싫다던 그의 목소리가 이제 와 떠오른 탓은 아니다.

새삼스럽게도 오른쪽 허벅지가 무거웠다. 실제로 물리적인 무게를 느끼는 건 아니다. 그야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든 거라고는 손가락 크기의 망가진 USB뿐이니까. 그러나 뾰족한 돌덩이라도 든 것처럼 답답하고 무거웠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고마웠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중얼중얼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어색했다. 아무리 연습해도 말할 때마다 꼴사납게 눈이 빨개지고 만다. 진짜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화낼까?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끼이익,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을 움켜쥐자 마디마디가 지끈거렸다. 차인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주현은 아는 척하며 돌아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였다. 차인호의 모든 인기척을 고막으로 세세히 관찰했다.

“안녕하세요. 주현 씨.”

건너편 의자에 앉은 차인호는 웃고 있었다. 주현이 상상했던 장면은 아니었다. 울지는 않아도 굳은 표정으로 싸늘하게 바라볼 거라 예상했기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름다운 남자가 조금 더 밝게 웃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그렇네요.”

“이런 날에는 나들이라도 가야 하는데 말이에요.”

차인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 손목에는 고급스러운 시계가 감겨 있었다. 웅크리고 있던 주현이 허리를 세웠다. 찰그락. 수갑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거슬렸다.

“나들이 좋아하십니까?”

“하하,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제법 많을걸요.”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주현은 결국 품에서 담배와 성냥을 꺼내 들었다. 새빨간 성냥 머리가 불꽃에 휩싸였다. 깨끗한 공기보다 백해무익하다는 연기를 들이쉬는 게 훨씬 쉬운 이유를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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