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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137/161)

폭주 에스퍼 123화

언제나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흘리는 차인호에 대해 주현이 확실히 알게 된 게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는 눈치가 빠르다는 사실이다.

USB와 딱딱하게 굳어 버린 주현을 번갈아 보던 차인호가 입을 다물었다. 보지 않아도 그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의와 살기를 감지하는 능력만큼은 상처 입은 들짐승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부하니까.

“당신이 그랬어요?”

가이딩 룸을 채웠던 따뜻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돌변한 공기는 폐를 아프게 찔렀다. 꿈에서 깬 느낌이었다.

“당신이 죽인 거야?”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부츠 속으로 파고드는 모래. 아름다운 오아시스와 추악한 별장으로 채워진 게이트. 그곳에서 주현은 무효화 능력을 가진 에스퍼와 싸웠고, 끝내 그를 죽였다. 살리려 했다든가 말리고 싶었다든가. 그런 건 이제 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주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인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희미한 체념이 초콜릿색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주현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것이야말로 확실한 대답이었다.

“또?”

“…….”

“하필이면, 하필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는 잘만 나왔던 사과가 이번에는 목구멍이 들러붙은 듯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건 알았으나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뱉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과한다고 마음이 편해질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분노와 죄책감이 사라지나? 당신 지인인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살렸을 거라는 변명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있나?

어떤 말도 소용없었다. 의미 없는 말들이 떠올랐다 혀에 올라타지 못하고 가라앉길 반복했다. 주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뜨끔한 손바닥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차인호는 주현의 피부를 감싸 쥐었던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입을 다물었다. 손끝이, 어깨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떨리는 게 보였다. 저도 모르게 뻗었던 손을 되돌린 주현이 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고개 숙였다.

‘동백꽃은 천천히 시들지 않고 가장 아름다울 때 한 번에 뚝 떨어져. 마치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것처럼.’

비밀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속삭이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가장 아름다울 때 뚝 떨어진 붉은 꽃이 바닥을 나뒹구는 게 보일 것 같았다.

주현은 손바닥을 펼쳤다. 줄줄이 이어진 손톱 모양 상처는 천천히 아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가이딩을 빨아먹고 있는 기생충 같은 자신이 역겨웠다.

천국과 지옥은 한 끗 차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1분도 안 되어 천국에서 지옥으로 곤두박질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주현이 몸을 웅크렸다. 추락이 아팠다.

“넌 항상 빼앗아 가기만 하는구나.”

그야말로 죽고 싶을 만큼.

떨림을 담은 낮은 목소리엔 명백한 분노가 스며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답을 바라는 것 같은 간절한 눈빛을 하는 까닭으로, 주현은 눈앞의 가이드가 꼭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꿋꿋이 모른 척하긴 했지만, 주현은 차인호가 그동안 많이 노력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폭주 에스퍼와 매칭하고 두려울 텐데도 손잡는 걸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가이딩을 나누어 주었다. 전화를 받아 주고, 웃어 주고, 주현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기 위해 나서 주기까지 했다.

갚을 수 없는 은혜는 기어코 원수가 되어 돌아갔다. 만약 그 임무에 주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갔다면, 만약 해산이 죽지 않았다면, 만약 USB를 모르는 척했다면. 그랬다면 신주현과 차인호는 지금도 웃고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을 다루는 에스퍼는 들어 보지 못했고,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므로 갈림길의 반대쪽에 어떤 결과가 있을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차인호의 고동색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흔들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닦아 주고 싶은 마음을 밟아 죽인 주현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당신…… 반란군이었습니까.”

목이 졸린 듯한 쉰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낯설어서 자신의 목소리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간신히 뱉은 말에 차인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완벽한 오답이었다는 걸 주현은 그 짧은 코웃음으로 깨달았다.

“네, 맞아요. 어느 에스퍼의 폭주로 가족이 싹 다 죽었거든요. 저도 죽어 가던 차에 운 좋게 반란군에게 발견되어 살아남았죠. 궁금증은 풀렸어요?”

“……그 에스퍼는 접니까?”

차인호가 입을 다물었다. 주현은 고개 숙여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가 <동백 보호소>에 있던 누군가가 아닐까 하는 의심은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시처럼 남아 때때로 주현을 거슬리게 했다.

홍연우의 손을 가진 차인호. 전혀 닮은 곳 없는 두 사람. 머릿속에서 지워진 소년. 주현은 정답이 무엇인지 모른다. 불쌍한 차인호. 하필이면 이런 놈에게 잘못 걸려서.

“……제 가족을 두 번이나 죽인 기분이 어때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뜨거운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린 주현이 비루한 개처럼 몸을 웅크렸다.

“지금껏 그런 마음으로 여기에 왔습니까? 원수를 가이딩하러?”

“…….”

“그거, 진짜…… 엿 같았겠네.”

이마에 박힌 손톱이 살갗을 긁어내렸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안 좋은 징조라는 걸 어렴풋이 생각하며, 주현은 비어 버린 안구에서 눈물 대신 절망이 흐르는 걸 느꼈다.

이로써 새로운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차인호가 보잘것없는 폭주 에스퍼와 매칭한 이유. 복수. 소중한 걸 앗아 가는 게 가장 큰 복수라는 말이 있으니, 차인호를 소중히 여기게 된 주현에게 이는 무엇보다 아픈 복수였다.

다만 이게 정말로 복수라면 속 시원하게 웃으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또한 주현에게는 구원이 될 테니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는 안 그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가이딩은 충분한데도 누군가가 머릿속에 풍선을 채운 듯 아팠다. 뜨거운 손바닥에 화상을 입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총에 맞았을 때보다, 괴물을 앞두고 다리가 부러졌을 때보다도 이 순간 훨씬 큰 죽음의 위협이 느껴졌다.

“하…….”

귓가에 들려온 가느다란 숨결에는 숨길 수 없는 울음이 담겨 있었다.

신주현은 기어코 세 번이나 차인호를 울리고 말았다. 세 번째 눈물을 본 주현은 첫 번째와 같은 기쁨도, 두 번째와 같은 온기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한없이 깊고 깊은,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차가운 비명뿐이었다.

드르륵- 의자 다리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차인호가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다음에 보자는 인사도, 예쁜 미소도 없었다. 주현은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비참한 숨을 내뱉었다.

“연우 형?”

끊어질 듯 애처로운 목소리가 차인호에게 닿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잠깐의 침묵 후, 쾅! 문이 닫혔다. 차인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발끝이 저렸다.

“……미안해.”

아비를 잡아먹으며 태어난 아이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리 없다. 삶이 시작함과 동시에 어미를 슬프게 만든 아이가 즐겁게 웃을 수 있을 리 없다. 오랜 시간 축적된 아픔이 갈비뼈 안쪽을 마구 난도질했다.

문득 얼마 전에 본 영화가 떠올랐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이던 배우의 눈빛과 결국 침몰해 버린 거대한 배.

망망대해 위에서 부서진 배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라앉는 것밖에 없다. 평생을 물 위에 떠 있던 배는 처음으로 잠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시커먼 바다가 두려워 눈을 감았을까, 아니면 다시는 보지 못할 태양을 향해 힘껏 손 뻗었을까.

‘우리, 자살만은 하지 말자.’

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족쇄를 채운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나 좀 죽여 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홀로 남은 폭주 에스퍼는 직원이 들어와 거칠게 잡아끌 때까지 시체처럼 가만히 침몰했다. 창문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 * *

누군가 아무리 거지 같은 기분으로 눈을 뜬다 해도 지구는 상관없다는 얼굴로 돌아간다. 오늘도 그랬다. 주현은 멍하게 눈을 끔뻑이며 회색 천장에 있는 익숙한 모양의 금을 시선으로 더듬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뭉근한 통증이 신경을 찔렀다.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팠다. 이틀 전 생긴 멍은 여전히 파랬으며 다리의 찰과상에서는 붕대 너머로 핏방울이 질금질금 흘러나왔다. 차인호가 C동에 오지 않은 지 8일째의 아침이었다.

그동안 차인호는 아무리 늦어도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는 가이딩하러 왔다. 하지만 그런 희망도 이젠 부서졌다.

“…….”

안 그래도 반밖에 없는데 그마저 침침해진 시야를 되돌리기 위해 문지르길 한참, 문득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올려 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망가진 USB 옆에는 네모난 상자에 포장된 책갈피 세트가 있었다.

주현은 감히 열어 보지도 못했다. 손대는 것조차 두려워 차마 건들 수 없었다. 두통은 점점 심해지다 못해 안대 속마저 뜨겁게 열이 올라 욱신거렸다. 이러다 곧 죽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사실이 이제는 아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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