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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36/161)

폭주 에스퍼 122화

주현이 책을 끌어안으며 옆으로 털썩 누운 순간이었다. 쾅! 폭주 에스퍼의 방은 감금실로도 이용되기에 두꺼운 강철로 문을 만든다. 그런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네 가이드 왔다. 1분 안에 준비해서 튀어나와.”

‘차인호는 사실 에스퍼일지도 몰라.’

주현은 혈기가 도는 뺨을 한 채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미리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보고 싶을 때 나타나는 게 에스퍼의 능력이 아니라면 너무나도 대단한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사실 주현은 우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비참하게 살다 죽을 운명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은 아직 차인호가 올 날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틀은 더 있어야 온다고 생각했기에 주현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말도 안 하고 오면 어쩌자는 거야……. 쯧.”

직원은 주현을 가이딩 룸으로 데려가며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가이딩이 끝날 때까지 언제 호출기가 눌릴지 모르니 내내 대기해야 한다는 게 성가신 모양이었다.

물론 주현은 직원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었다. 미소를 죽이기 위해 몇 번이고 입술을 말아 물어야 했던 그가 가이딩 룸의 문을 열었다.

“아, 어서 오세요.”

주현의 가이드는 본인이 손님이면서 마치 집주인이라도 되는 양 반기며 손을 흔들었다. 철컹- 주현을 강하게 밀친 직원이 등 뒤에서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오셔서 놀랐습니다.”

“놀라게 하고 싶었으니까 성공이네요.”

차인호가 실실 웃었다. 그의 눈 밑은 평소보다 짙은 색이었다. 미소에 홀려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피로가 엿보이는 얼굴을 티 나지 않게 살핀 주현이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주현의 손을 잡은 차인호가 엄지로 손목을 쓰다듬었다. 겨우 그것만으로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곧 죽을 주현이 잠시나마 희망을 떠올릴 정도로 가이딩은, 아니, 차인호는 대단했다.

‘차인호한테도 똑같이 말할 수 있어?’

주현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다행히 차인호는 못 알아챈 듯했다. 피곤한지 미간을 문지르는 손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주현은 그 순간 답을 알아챘다.

고작해야 조금 피곤해 보이는 걸로도 이토록 신경 쓰이고 마음이 안 좋은데, 오직 주현을 위해 위험한 게이트를 넘고 그가 지키지 못한 탓에 눈앞에서 차인호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모든 에스퍼가 매칭 가이드에게 이런 감정을 갖는다면, 주현은 가람을 심하게 몰아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동의는 못 해도 위로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어디 아픈 곳 있어요?”

부드러운 물음에 주현이 어느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저보다는 당신이 더 아파 보이는데요.”

“일이 조금 바빴을 뿐이에요. 당분간은 덜할 테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다면 이런 곳에 오지 말고 피로가 풀릴 정도로 잠이나 실컷 자는 게 나을 텐데. 마음의 목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정말로 돌아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차인호가 웃으며 주현의 손을 잡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는 가짜 미소마저도 예쁘다. 손등을 덮은 온기에 취하며 주현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차인호와의 대화는 늘 가벼운 주제를 안고 흘러가지만, 지루하게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 때문일지도 모르고 올곧게 마주치는 눈동자의 반짝임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대화에 집중하는 척하며 아름다운 얼굴을 감상할 수 없었다. 아주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눈가 근육, 평소보다 약간 불안정한 가이딩. 보면 볼수록 차인호가 무척 지쳤다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하다못해 침대에서 잠시라도 눈을 붙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봐 온 차인호라면 함께 눕자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닿고만 있어도 가이딩이 흘러 들어온다.

‘가이딩은 상당한 체력을 소모한다고 하니까…….’

고민해 봤으나 그냥 이대로 손이나 잡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면 너무 잘생겨서 눈을 뗄 수 없다던가?”

차인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화려한 얼굴은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어도 눈길을 끄는데, 진심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표정 변화가 풍부해서 그런지 더욱 다채롭게 느껴진다.

예전이었다면 주현은 곧장 미간을 구기고 쓸데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이 아니다. 과거와 똑같이 행동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주현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긴 한데, 그것보다는 피곤해 보이는 게…… 신경 쓰여서.”

“……요즘 왜 이렇게 솔직하고 귀엽게 굴어요?”

“네? 그렇게 안 굴었습니다만.”

“아뇨. 그렇게 굴었는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퀴었으면서 갑자기 그렇게 따르면 저 진짜 당황스럽거든요.”

“아, 네. 죄송합니다.”

주현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사과했다. 그의 인생에서 이토록 싱거운 사과는 처음이었으나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은 인생이다. 조금 정도는 이것저것 내려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런 걸 말하는 건데…….”

한 손으로 가볍게 마른세수한 차인호가 턱을 문질렀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지 느리게 깜빡이는 촘촘한 속눈썹이 시선을 붙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허공을 보던 차인호의 눈동자가 휙 굴렀다. 순식간에 마주친 눈은 짙은 고동색이었다. 차인호가 웃으며 상체를 약간 기울였다. 창살에 막혀 갈라진 햇볕이 얼굴을 쓰다듬었고,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났다.

아름다운 광경에도 불구하고 주현은 따라 웃지 못했다.

‘왜 평소보다 눈동자가 옅을까?’

어쩌면 렌즈를 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유의 위화감은 보이지 않았다.

멍하게 예쁜 눈을 응시하던 찰나, 차인호가 다가왔다. 주현은 이제 완전히 키스에 익숙해졌고 눈을 감는 게 보통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너무나도 가까워서 흐려진 시야로 흰 피부와 까만 속눈썹이 일렁였다.

혀끝이 입천장을 긁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움찔한 순간이었다. 흑백의 시야로 짙은 갈색이 끼어들었다. 부드러움을 담은 색을 홀린 듯 바라보던 주현은 젖은 소리를 듣고 나서야 키스가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주현은 멀어지는 온기에 저도 모르게 따라가다 문득 수치를 깨닫곤 멈췄다. 단순히 손을 잡는 걸로도 만족했던 게 얼마 전인데, 왜 자꾸 감당 못 할 욕심이 솟는지 모를 일이다.

“제가 말했잖아요.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작고 부드러운 속삭임에 주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새 한 번 더 다가온 초콜릿을 만끽하느라 말문이 막힌 탓이다.

차인호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무는 느낌이 좋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날은 오지 않겠지만, 그는 듣지 않아도 아는 것 같았다. 작게 웃는 걸 보면 확실했다.

“이젠 제법 잘하시네요. 키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고 있자 늘 그렇듯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현은 어쩐지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차인호의 입술은 아까보다 짙은 색이 되어 부어 있었다. 선명히 남은 입맞춤의 흔적에 기쁨을 느낀 주현은 그런 자신을 속으로 타박했다.

“누가 물어보면 제가 가르쳤다고 하세요.”

“그런 거 물어볼 사람 없습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매칭 계약이 끊기고 나면 주현은 다시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가이딩 약물로 버티거나 악의로 가득 찬 익명의 가이드와 만나 폭력적인 가이딩 속에서 고통받는 일상. 그 와중에 조금 솜씨가 는 키스를 자랑할 기회가 온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그런 현실을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못 산다느니, 말해 봤자 비참할 뿐이라느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약간의 서운함이 담긴 차인호의 목소리가,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 같잖아.’

말도 안 되는 상상은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주현은 멋쩍게 뺨을 문지르며 시선을 굴렸다. 두 사람의 매칭이 끝나는 걸 아쉬워하는 건 주현만이 아니라는 망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러고 보니 주현 씨에게 주려고 가져온 게 있는데 깜빡 잊고 있었네요. 갑자기 그렇게 유혹하니까.”

“유혹, 제가 언제, 그런 적 없습니다.”

“아뇨, 누가 봐도 유혹이었어요. 아무튼 별건 아니고, 그냥 책갈피예요.”

지금도 주현의 책 사이에는 네모로 접은 티슈 조각이나 가느다란 나뭇가지 같은 게 끼어 있다. 일상에서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불쑥 받게 된 친절이 겸연쩍었다.

주현은 가방으로 손을 집어넣는 차인호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의자에 걸어 둔 가방끈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만약 일이 그렇게 진행될 줄 알았다면, 주현은 결코 차인호의 앞에서 그 어떤 책도 꺼내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미래를 보는 에스퍼가 아니고,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주현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툭. 책갈피와 함께 딸려 나온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타이밍 나쁘게 차인호의 발끝에 걷어차인 물건이 주현에게로 미끄러졌다. 주현은 아무 생각 없이 허리 숙여 손가락만 한 까만 물건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아, 고마워요. 망가졌지만 저에겐 소중한 물건이거든요. 그리고 책갈피는 혹시 몰라서 세 개 세트로 샀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

“주현 씨?”

예쁘게 포장된 봉투를 내민 차인호가 의아해한다는 걸 알면서도 주현은 아무런 대꾸를 뱉을 수 없었다. 손바닥에 담긴 물건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그랬다.

주현은 감히 그걸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손가락만 한 작은 USB는 부서지고 망가졌지만, 그럼에도 눈에 익었다.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만난 반란군의 유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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