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21화
주현은 황급히 하나뿐인 눈을 문질렀다. 약간이지만 물기가 묻어났다. 그러나 울음이라고 확정 지을 정도는 아니라,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다시금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폭주 에스퍼는 누구나 가이드를 싫어한다. 차인호라는 예외가 생겼지만, 그는 매칭 가이드이기에 일반적인 가이드와 묶어 볼 수는 없다. 그들에게 가이드란 가이딩을 무기 삼아 멋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악독한 인간이자 무섭다는 이유로 손 한 번 안 잡아 줘서 고통 속에서 나뒹굴게 만든 이들이므로.
물론 폭주 에스퍼의 위험성이 널리 퍼진 만큼, 그들을 위해서 공포심을 극복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수만 명의 가이드 중 범죄자를 제외하고 용기 있는 가이드가 어떻게 단 한 명이 없느냐고.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뒹굴며 그런 생각을 할 뿐이다.
끝없는 임무, 혹사당하는 몸, 부족한 가이딩,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빛 한 줌 보이지 않는 미래.
그저 운이 나빠 폭주했다는 이유로 모든 삶을 빼앗기고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 외엔 무엇도 얻을 수 없는 폭주 에스퍼로서, 다칠지 안 다칠지도 모르는 익명의 가이드를 생각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가람의 얼굴을 보는 게 부끄러워서, 사실은 무서워서 주현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박았다. 신발에 밟힌 잡초는 보라색이었다.
에스퍼에게 보호받으며 게이트를 넘는 것조차 안 하게 된다면, 낡고 위험한 C동에 올 가이드는 훨씬 더 줄어들 터다. 가이딩 수치가 떨어지면 목숨이 위험해지고, 폭주 에스퍼는 누구나 만성 가이딩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까닭으로…….
“가이드가 없으면 에스퍼는 능력을 쓸 수 없어. 그러면 게이트는 누가 지키는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전부 다 무너지는 구조야. 이걸 어떻게 바꿔.”
어떻게 되든지 관심 없는 주제에 말은 잘만 쏟아졌다. 주현은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신경조차 쓸 수 없었다.
가이드가 미운 것과는 별개로, 주현은 폭주 에스퍼가 늘어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 어떤 에스퍼도 이런 식으로 살면 안 된다. 더는 동료를 잃고 싶지 않고,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네가, 씨X, 폭주해 본 적 없으니까 그딴 말을 하지.”
다리가 덜덜 떨렸다.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팔뚝을 긁어내리며 상처 내는 손톱마저도 떨리고 있었다. 한여름처럼 더운 곳이니 춥다는 변명조차 할 수 없다.
“가이딩 수치가 바닥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눈, 코, 입. 온갖 구멍에서 피가 흘러. 눈앞이 새빨개. 머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어. 그럴 때면 차라리 그냥 뒈져 버리고 싶어. 또 폭주할까 봐 너무 무서워서, 나 좀 죽여 달라고 막 빌어.”
그런 동료를 수도 없이 봤다. 주현도 셀 수 없이 겪은 일이었다. 두들겨 맞고 찢어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하지만 가이딩 부족으로 인한 고통은 아무리 싫어도 가이드가 없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C동에 오는 가이드는 죄다 병신뿐이고, 그런 병신도 우리에겐 아쉬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존재라고. 이런 비참한 인생을 사는 동료를 늘리고 싶지 않다고. 주현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동아줄을 잡듯 제 손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S급이라 해도 가람은 그저 평범한 에스퍼라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이 폭주할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을, 그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가이드가 고맙고, 그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에스퍼.
폭주 에스퍼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쓴맛을 다 본 현자라고 스스로를 추켜세우는 건 아니다. 다만 주현은 지옥을 알고 있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가혹한 곳이고, 상상보다 훨씬 무서운 곳이다.
결코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불행을 바랄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 주현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이드 없이 게이트 넘었다가 폭주하고, 운 나쁘게 살아남으면 어떡해.”
주현이라고 매일 슬픔을 느끼지는 않는다. 매일 죽도록 아프고, 매일 죄책감에 숨도 못 쉬는 게 아니다. 가끔 죽을 것 같지만 살 만하네. 딱 그 정도.
하지만 그런 건 건강한 인생이 아니다. 그걸 알려 준 동료들은 이미 죽었다. 남은 동료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들은 세뇌되고 체념했다. 이젠 주현도 알고 있다. 머리가 엉망으로 헤집어지고 세상의 절반이 어두워진 후에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네 가이드가 다친 건 정말 안 된 일이지만, 그래도 난 폭주 에스퍼가 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한테는 길이 하나밖에 없잖아. 가이드는 매칭이라도 끊을 수 있지, 우리는…….”
후덥지근한 공기에서는 묘한 단내가 났다. 기분 나쁜 달짝지근함이 점막을 스치고 스며들었다. 결국 주현은 가람의 고민을 제대로 들어 주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이기적인 욕심을 떠들며 반대로 몰아붙이기나 했을 뿐이다.
“차인호한테도 똑같이 말할 수 있어?”
주현이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날개가 흔들렸고, 가람의 얼굴이 미묘하게 가려진 탓에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아니, 미안. 너무 유치했네.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벌떡 일어난 가람은 먼저 갈 테니 천천히 오라고 말하곤 남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여전히 주저앉아 있던 주현이 손바닥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화풀이는 누가 하고 있냐.”
매칭 가이드가 다쳐서 속상한 에스퍼와 그런 가람에게 자신의 입장을 들이대며 억지로 나쁜 사람 취급한 신주현. 누가 잘못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명백했다.
하지만 어른이 덜 된 주현은 차마 사과할 수 없었다. 뒤늦게 임무 장소에 도착해서 까맣게 타 버린 괴물 시체를 마주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람은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주현보다 훨씬 성숙한 대처였다.
‘차인호한테도 똑같이 말할 수 있어?’
주현은 그럴 수 있나? 그를 따라 게이트를 넘었다가 큰 부상을 입은 차인호에게 나를 위해 앞으로도 계속 위험을 무릅써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차인호는 절대로 게이트를 넘지 않을 테고, 따라서 위험에 휘말리는 일은 없다. 그런 생각이 무의식중에 박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임무는 약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주현은 여전히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람의 걱정과 두려움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감정은 보통 여러 개씩 무리 지어 사람을 괴롭힌다. 이번에도 그랬다.
가람을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기에 화기애애하지는 않아도 평소처럼 대화하며 인사하고 싶었으나, 그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람아!”
게이트를 넘자마자 가이드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저번에 주현이 괴물을 피해 나무 위에 걸쳤던 가이드는 곧장 가람에게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가람의 어깨가 약간 내려갔다. 미세한 변화지만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보고서는 네가 써라. 난 먼저 간다.”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던 주현이 일방적으로 통보하곤 그를 기다리고 있는 C동 직원에게로 향했다.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듣지 못한 척했다. 가을바람은 조금 쌀쌀했다.
* * *
누군가가 말했다. 진실에는 부력이 있다고. 아무리 바닥으로 밀어 넣어도 언젠가는 떠올라 눈앞에 불쑥 나타날 거라고. 전에 읽은 책에는 사소한 거짓말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남자가 비참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이 불쾌할 만큼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C동에는 도서관이 없다. 대신 누군가의 소유품이거나 기부라는 말로 협회 소유의 망가진 책이 이곳에 왔다. 여러 사람이 험하게 다룬 책과 개인이 아끼며 보관하던 책은 같은 세월이 지나도 한눈에 차이가 보인다.
주현이 비교적 깨끗한 책등만 보고 대충 책을 꺼냈을 때, 가장 첫 페이지에 자주 보이는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CGH]
‘CGH’라는 사람이 모은 책은 양이 상당했는데, 하나같이 기묘한 내용인 게 많았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서서히 자신을 잃어 가는 소설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책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단 한 번의 거짓말로 모든 걸 잃은 남자는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뒀다. 거짓말처럼 처량한 인생이었다.]
아무리 심심풀이로 읽는 책이라지만 기분이 약간 저조해진 주현이 책을 덮으려던 순간이었다. 작가의 말이 적힌 페이지가 팔랑이며 넘어갔고,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듯한 글자가 나타났다.
[규한아 거짓말해서 미안해]
주현은 멀뚱히 글자를 응시했다. 책이 훼손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추리 소설의 첫 장면에 범인이 누구인지 큼지막하게 써 놓는 멍청이도 많았으니까.
‘CGH의 이름이 규한이가 보네.’
주현의 기억 속에 없는 이름이었다. 최소한 11년 전에 이곳에 있다가 죽은 에스퍼일 게 확실했다.
잠시 망설이던 주현은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마지막 페이지에 희미하게 볼펜 자국이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 텅 빈 페이지에는 단 세 글자가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사랑해]
규한이라는 사람은 이 메시지를 봤을까? 이왕이면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주현은 얼굴조차 모르는 두 사람을 위해 빌었다. 왜냐하면 기껏 사랑받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건 너무나도 슬프기 때문이다.
누구는 받고 싶어도 못 받는 애정이 뒷장에도 자국이 남을 정도로 눌러쓴 글자에 선명히 담겨 있었다.
사랑해. 사랑, 사랑해. 책을 완전히 덮은 주현은 약간 따뜻해진 볼을 문질렀다. 그 말을 듣고 싶은 건지 말하고 싶은 건지 구분할 수 없었으나, 결국 화살표는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몽상하는 것만으로 죄악감이 들 정도로 과분한 생각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