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20화
‘그러고 보면 이 녀석과 만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네.’
그리 생각하니 무심히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뭔데?”
“그냥 이온 음료. 이 게이트는 더워서 땀을 많이 흘리니까.”
땀 한 방울 안 묻은 얼굴로 떠드니까 꼭 주현을 비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거절하기에는 수분 보충이 절실했다. 가방에 든 물은 진작에 따뜻해졌기에 자격지심을 잠시 접어 두기로 한 주현이 슬쩍 고개를 까딱이며 물통을 받아 들었다.
달콤하면서 묘한 짠맛이 나는 음료는 무척 시원했다. 어쩌면 게이트 너머에서 가람을 기다리고 있는 가이드가 챙겨 준 걸지도 모른다.
“다 먹지는 마라. 내 몫도 남겨.”
“싫어.”
“죽을래?”
가람이 열의 없이 중얼거렸다. 벌써 세 시간 가까이 능력을 써 대며 괴물과 싸웠기에 아무리 S급 에스퍼라도 지치는 건 당연했다. 주현이야 가이딩 없이 열흘까지도 그냥 사는 날이 많았으니 괜찮지만, 매칭 가이드만 세 명인 가람은 꽤 힘든지 두통을 가라앉히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여기에 가이드가 있었다면 나았을 텐데.’
주현이 없었다면 가람은 가이드와 함께 게이트를 넘었을까? 위험하다고 사방에서 떠들어 대는 폭주 에스퍼와 함께하는 임무가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가람은 지금쯤 매칭 가이드의 손을 잡고 있었을까.
정답은 알 수 없었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쓰라릴 게 뻔하니까.
“자.”
“…….”
“네가 남겨 달라며.”
반 이상 남은 물통을 받아 든 가람이 곧장 목을 축였다. 기분 탓인지 날개도 평소보다 흐물흐물했다. 사실 이건 임무를 위해 게이트 밖에서 만난 순간부터 느꼈다.
깃털을 한 움큼 잡아떼자 느리게 날아가 제자리에 달라붙었다. 돌아가는 속도가 느린 것보다는 가람이 짜증을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좀 더 신경 쓰였다. 늘 짖어 대는 개가 꼬리를 말고 웅크리고 있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하아…….”
대놓고 한숨을 내쉰 주현이 가람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근처를 돌아다니는 괴물도 없으니 잠시 쉰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터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번 게이트는 괴물은 가득해도 주변 환경은 제법 지구와 흡사했다. 파란 하늘을 유유히 지나가는 뭉게구름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 선명했다. 만약 이곳 하늘이 노란색이었다면, 주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람이 게이트를 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어쩌다 그렇게 됐어?”
“뭐가.”
“눈. 안 낫는 상처지?”
“어떻게 알았냐.”
“에스퍼가 안대를 안 벗는데 모르면 병신이지. 숨기고 싶었으면 방송에 나오지를 말던가.”
분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답답하고 뻣뻣한 안대는 이제 완전히 익숙해졌다. 절반으로 나뉜 세상은 아직 위화감이 있지만, 언젠가는 괜찮아질 것이다. ……아마도.
눈에 관해서는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하면 그거야말로 극복하지 못했다고 확정 짓는 게 아닐까. 아주 아프고, 조금은 두려웠지만, 그래도 주현은 견뎠다. 심지어는 후회조차 하지 않는다.
“칼에 찔렸어.”
“흠. 뇌는 안 찔려서 다행이네.”
“아마 흠집은 좀 났을걸.”
협회에서 머릿속을 뒤집으며 어떤 추억을 빼앗고, 무슨 정보를 심었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세뇌했는지, 모든 건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네 가이드는 그거에 대해 뭐라 말했냐?”
가람은 주현을 보지 않았다. 지구에서는 본 적 없는 풀이 무성하게 자란 건너편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그에게서 조롱이나 호기심을 발견하지 못한 주현이 천천히 말을 골랐다.
모든 사람이 주현에게 차인호와 매칭하는 건 다시 없을 행운이라고 떠들어 대던 때, 가람은 그가 수상하다고 말했다. 주현처럼 갇혀서 사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차인호를 만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사실을 말해 봤자 좋을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거짓말을 토하려던 입은 딱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도 자랑하고 싶어.’
매칭 가이드에게 걱정받았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코 그가 주현이 싫어서 가이딩을 하지 않아 눈을 잃은 게 아니라고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가 나쁜 가이드라고 떠드는 놈들을 모조리 때려 주고 싶었다.
봄과의 대화 끝에, 주현은 얼마 남지 않은 현재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감정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는 말은 처음 들었지만, 어쩐지 늘 기다리던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현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지구와 다를 바 없는 바람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주현은 눈이 부시다는 듯 하나뿐인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입꼬리만 올라갔다면 완벽한 미소로 보일 표정이었다.
“울던데.”
“뭐?”
“엄청 슬프게 울었다고. 그건 연기가 아니었어. 그게 연기면 차인호는 상 받아야 해.”
“이미 상 많이 받았을걸.”
“닥쳐.”
사실 아직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때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차인호의 눈물과 울음소리, 얼굴을 매만지던 손의 떨림은 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게 있는 한, 주현은 누가 뭐라 해도 그의 가이드 편이었다. 빈 눈을 가린 안대는 차인호의 나태 때문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원한다면 주현의 전 재산을 걸어도 좋았다.
“그렇게 믿고 싶겠지.”
주현은 고민했다. 여기서 가람을 때리면 남은 임무에 지장이 생길지.
고뇌하던 주현의 귀로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람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날개로 제 몸을 반쯤 감싸고 있었다. 언제나 재수 없게 구는 주제에 갑작스러운 청승이라니. 주현은 때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내 가이드 중에 하진이라는 애가 있는데.”
“어…….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정보, 고맙다.”
“얼마 전에 같이 게이트를 넘었어. 평범한 임무였지. 괴물 좀 없애고, 주변 좀 살피고. 눈이 많이 오는 게이트여서 기분 좋기도 했어. 하진이가 겨울을 좋아하거든.”
주현은 그 하진이라는 가이드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로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하진 씨가 한겨울에 밖으로 쫓겨나 얼어 죽을 뻔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경험은 없는 게 좋다.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얼굴을 굳힌 가람을 주현이 조용히 응시했다.
“지금은 병원에 있어. 못해도 3개월은 입원해야 한다더라.”
심각하게 말하는데 미안하지만, 주현은 일반인에게 3개월 입원이라는 게 어느 정도의 상처인지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 간 적이 손꼽을 정도로 적은 탓이다.
그래도 얼마나 털어놓을 곳이 없었으면 주현에게 말하는지, 그런 가람이 약간 불쌍해서 그는 나름대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았으면 된 거 아닌가.”
“그걸 말이라고 해?”
위로는 살벌한 대답으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괜히 다투는 대화가 아니라는 건 곧장 알 수 있었다. 가람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너 눈알 찔렸는데 그래도 살았으니까 된 거 아니냐고 해도 되냐?”
실제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과 오늘따라 정말로 이상하다는 마음이 주현의 몸속에서 싸워 댔다.
저 멀리 어디선가 괴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주치는 검은 눈은 명백한 분노를 담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묘한 위화감이 뭔가 했더니, 오늘은 늘 끼던 파란색 렌즈가 없었다.
주현은 이런 상황을 너무나도 많이 겪어 왔다. 아주 어릴 때부터 질리도록.
“화풀이하지 마.”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어조였다. 눈을 크게 뜬 가람이 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정곡을 찔리고 곧장 사과한다는 점에서 가람은 주현보다 어른스러운 사람이다. 주현이었다면 곧 죽어도 아니라며 펄쩍 뛰었을 테니까.
희고 말랐지만 엄청난 힘을 가진 손이 탈색한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한껏 몸을 웅크린 가람을 보고 나서야 주현은 그가 자신보다 몇 살 어리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가이드는 에스퍼처럼 튼튼하지도 않고 빠르게 회복할 수도 없어. 그런데 단지 에스퍼가 필요로 한다는 이유로 위험한 임무에 동행하는 게 옳은 일일까?”
“…….”
“에스퍼는 자기 몸이라도 지킬 수 있지, 가이드에게는 퍼플 등급 괴물마저도 위험하다고. 그런데 이런 곳에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몸으로 온다는 게-”
“안 오면 어쩔 건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날카롭게 말이 나왔다. 주현은 따로 정정하지 않으며 가람과 눈을 맞췄다.
“에스퍼도 원해서 목숨 걸고 싸우는 게 아니잖아. 에스퍼로 태어나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건데, 가이드로 태어난 사람이 의무를 다하는 게 뭐가 문제야?”
스스로도 몰랐지만, 주현은 화가 났다. 배부른 소리를 고민이랍시고 털어놓는 가람에게도 화났고, 타인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아무리 애원해도 가이딩을 받지 못해 죽어 간 동료들이 그의 화를 부추겼다.
“지금도 너 가이딩 부족해서 머리 아프잖아. 그런 주제에 뭐라고 떠드는 거냐?”
“……신주현.”
“에스퍼는 시민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가이드는 에스퍼가 버틸 수 있게 가이딩하고, 시민은 협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도록 세금을 내지. 그리고 폭주 에스퍼인 나는 목줄이나 차고 죽을 때까지 사지를 굴러. 각자 정해진 자리가 있잖아.”
“너 울어?”
가람은 화난 것 같지 않았다. 대신 놀람과 당황이 반쯤 섞인 얼굴로 주현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