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19화
“네가 왜 겁쟁이야?”
봄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듯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언제나 상대를 생각하며 말하는 사람이다. 주현의 코로 C동에 보급된 샴푸 냄새가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죽음이 두려운 건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당연한 거야. 죽는 게 무섭지 않다고? 목구멍에 칼을 들이대도 그 소리 할 수 있는 놈이 몇이나 될 것 같아?”
난 할 수 있는데. 주현은 분위기를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떠오른 생각을 묵묵히 접었다. 실제로 지금도 겁에 질려 한심하게 떨고 있으니 괜한 허세로 보일 뿐이다.
머리 위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걸 눈치챘지만 주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봄의 손이 뒤통수 위에 턱 올라앉았다. 쓰다듬지도 토닥이지도 않으면서 그저 존재하는 온기는 생각 외로 달가웠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는 딱 네 가지 유형이 있어. 세뇌됐거나, 머릿속이 꽃밭이거나, 엄청난 의지를 가질 계기가 있었거나, 그도 아니면 정신병자거나. 그리고 우리는 첫 번째 유형이지.”
주현이 고개를 들었다.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주현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도 세뇌당했냐는 질문이었다. 분노와 불안을 담고 바라본 봄의 눈은 너무나도 맑고 깨끗했다. 흐리멍덩한 주현의 오른눈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렇게 살다 죽는 게 마땅하다고 그토록 떠들어 대는데 안 믿고 어떻게 배기겠어?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싹 다 허망하게 죽어 버리는데, 어떻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겠냐고.”
“……그것도 세뇌인가?”
“그거 말고 달리 부를 말도 없어.”
아직 물기가 남은 검은 머리카락은 꼬불꼬불했다. 평소에는 일자로 쭉 뻗어 허리까지 내려오는데. 물방울이 맺힌 봄의 머리카락 끝을 바라보고 있자니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봄은 주머니를 뒤적였으나 원하는 물건은 찾지 못한 듯했다.
“무서운 건 당연한 거야. 네 감정을 부정하지 마. 그거 알아줄 사람, 세상에 너밖에 없으니까.”
성냥을 손에 쥔 봄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녀는 주현보다도 심각한 골초였다. 주현이 느린 손길로 품에서 담배를 꺼내 내밀었고, 봄은 거절하지 않았다.
주현의 죽음에 대한 갈망은 C동에 오기 한참 전부터 시작했다. 간신히 걸음마를 하고 기저귀도 채 떼지 못했을 때부터. 그야말로 인생의 첫 시작부터 그는 왜 태어났냐는 질문과 함께 자랐다.
주현의 친아버지는 그토록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고민 있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고, 그런 착한 사람을 네가 죽였다는 외침과 함께 목을 조르며 울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너 같은 걸 낳는 게 아니었어!’
엄마의 우는 얼굴은 눈을 감으면 사라지지만, 찢어지는 비명은 아무리 귀를 막아도 끈질기게 고막을 두드렸다.
그는 죽음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시절부터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바랐었다. 그런 인생이었다. 보잘것없고, 한심하고,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인생을 사는 본인조차 가치 없다고 여기는 삶.
‘우리, 자살만은 하지 말자.’
그 작은 속삭임에 매달려 지금까지 꾸역꾸역 삶을 이어 왔다. 죽은 듯이 사는 것과 죽는 것. 무엇이 더 나은지 고민하며, 그래도 사는 게 낫다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며. 어쩌면 이것마저도 세뇌받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주현은 조금이나마 가슴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쉽게 죽음을 떠올리는 사람은 마음이 단단하지 못한 거라고 어떤 책에 적혀 있었다. 자신이 약한 이유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약간 기뻤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네가 사실 엄청난 동안이라서 10년 후에도 지금이랑 똑같이 생겼을지.”
“하,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세상에는 훨씬 이상한 일도 잘만 일어나는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흐린 연기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문득 매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담배 연기에 얼굴을 찌푸리던 차인호가 떠올랐다. 담배를 싫어하는 주제에 라이터를 선물하는 이상한 남자가 익숙하게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와 만난 것도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에 속할 정도로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밑바닥 폭주 에스퍼가 그런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과 잠깐이나마 매칭되는 일도 있는데, 주현이 엄청난 동안인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나는 10년 동안 괜히 혼자 긴장한 게 되겠네.”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희망이 깃든 말이었다. 다시 한번 봄의 손이 뒤통수에 올라왔다. 이번에는 힘을 줘 거칠게 쓰다듬는 바람에 머리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손을 뿌리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누구나 결국 죽어.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살아왔잖아. 끝을 조금 엿봤다고 움츠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
“그냥 살던 대로 살아.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지. 미리 죽은 듯이 살 필요 없잖아.”
주현은 머지않아 숨을 거둔다. 이안과 소장과 리아가 한마음으로 거짓말을 늘어놓은 게 아니라면 확정된 미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날이 올 때까지, 노란 하늘이 펼쳐진 게이트에 들어갈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주현은 그동안 한 발자국 앞마저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왔다. 언제 폭주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비록 도착 지점에 확실한 낭떠러지가 있다고 해도 그곳에 도달하는 길까지 환하게 불이 켜졌다.
예언은 무조건 들어맞는다. 따라서 리아가 설명한 게이트로 가지 않는 이상, 주현은 그전까지 어떤 임무에서도 목숨을 잃지 않는다. 팔다리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 큰 부상을 입지도 않을 터다.
주현은 C동에 오고 처음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죽음을 확정받고 나서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그러나 애초에 예언을 듣기 전까지는 두렵다고 생각조차 못 했으니, 닭과 달걀 중 어느 게 먼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작고 낡은 TV는 어느새 광고를 송출하고 있었다. 주현이 명확하게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연예인은 손꼽히게 적다. 그중 부동의 1위인 차인호가 휴대폰을 내밀고 있었지만, 기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봄답지 않게 조금 머쓱한 목소리였다. 어느새 돌아앉아 앞을 응시하는 봄의 머리는 거의 다 말라 있었다. 주현은 그저 겁쟁이 같은 투정을 부렸을 뿐인데 과분한 위로를 받은 것 같아 어쩐지 부끄러웠다.
“글쎄.”
“네 가이드……. 차인호 잡아다가 무덤에 같이 넣어 줄까?”
“그거, 마음에 드네.”
평소 워낙 이성적이고 어른스러운 사람이라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차인호가 주현의 무덤에 함께 묻힌다면 저승길도 그리 춥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파에 한쪽 발을 올린 주현이 피식 웃었다. 무릎에 볼을 기대자 싸구려 섬유 유연제 향이 맡아졌다. 향이 너무 독하다며 C동 에스퍼 대다수가 불호를 외치는 향이지만, 사실 주현은 이 냄새를 제법 좋아했다.
“그래도 나는 무덤이 없을 테니까 그건 안 되겠다.”
이제는 그 사실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 엿 같은 세상에 시체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게 행운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애초에 무덤이란 남겨진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무덤을 가져 봐야 외롭기만 할 게 뻔했다.
문득 범규가 떠올랐다. 폭주 에스퍼 중 드물게 가족과 비석을 가진 범규.
‘지금쯤 천국에 잘 도착했을까.’
눈을 감자 그가 좋아하는 향과 담배 연기가 뒤섞인 냄새가 조금 더 짙게 맡아졌다. 어쩐지 천국에 닿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그쪽 조심해!”
가람의 외침에 주현이 뒤에서 달려들던 괴물을 능력으로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번개가 내리꽂혀 사마귀와 닮은 괴물이 까만 연기를 흘리며 쓰러졌다.
“말 안 해도 알거든.”
“참 나, 걱정해 줘도 난리네.”
“네 걱정 따위 필요 없어.”
평소와 같이 까칠한 대답에 가람이 날개를 팔락이며 큰 소리로 혀를 찼다. 하지만 욕을 하거나 덤벼들지는 않는 모습에 조금 얌전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람과 함께 게이트 너머를 순찰하는 임무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순찰이라 해도 레드급 괴물이 흔하게 널린 위험한 게이트라 쉽지는 않았으나, S급 에스퍼인 가람 덕에 숨통을 틀 수 있었다.
새하얀 날개를 등에 단 채 화사한 금발을 꽁지로 묶은 가람은 함께 임무하기에 상당히 괜찮은 에스퍼 중 한 명이었다. 가끔 날카로운 말을 내뱉기는 해도 임무에 지장이 갈 정도로 선을 넘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폭주 에스퍼인 주현을 심지에 불이 붙은 폭탄 취급하지 않았다. 설령 바로 옆에서 폭주한다 해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 덕분일지도 모르지만, 주현에게는 제법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주현을 싫어하는 가람에게는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않을 테지만.
“이쪽은 대충 정리됐어. 이제 남쪽만 둘러보면 끝이야.”
가람의 말에 주현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을 최대한 아끼며 싸우느라 이리저리 많이 움직여야 했던 주현과는 달리, 원거리에서도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는 가람은 여전히 보송한 얼굴이었다.
질투하고 분노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나뭇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지구와는 달리, 이 게이트는 여름처럼 후덥지근했다. 괜한 곳에 기력을 빼앗길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마실 거냐?”
주현의 붉은 눈이 가람에게 향했다. 물통을 잡은 손은 명백하게 주현을 목적으로 뻗어 있었다. 성격은 좀 꼬여 있어도 본질적으로 나쁜 놈은 아닌 그에게 이런 권유는 처음 받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