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18화
“어, 주현이 왔어?”
“응. 형 말고는 아무도 없네.”
“나도 아까 돌아왔어. 이틀 동안 죽어라 굴렀다. 봄이는 훈련장에 있고 나머지는 임무. 요즘 왜 이렇게 임무가 많은지 모르겠다니까.”
불만스레 투덜거린 승철이 다시금 눈을 감았다. 들어왔을 때부터 소파에 누워 있던 걸 보면 TV를 백색소음 삼아 낮잠이라도 자려는 모양이었다. 테이프가 발린 소파에 털썩 앉은 주현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딱히 찾는 프로그램도 없으면서 관성적으로 버튼을 누르던 손이 우뚝 멈췄다. 네모난 화면에서 오래된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11년이나 갇혀 산 주현도 몇 번 이름을 들어 본 적 있는 영화였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침몰해 가는 배는 아름답게 그려졌다. 사실 삭막한 주현의 눈에는 안 그래도 흐린 화질이 오래된 필름이라는 시너지를 받아 더욱 뿌옇게 보이는 고전 영화일 뿐이었지만, 어쩐지 채널을 돌리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까만 바닷물이 이리저리 튀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이름 모를 선율이 마구 뒤섞이다 이내 배가 수직으로 솟구쳤다. 정말로 저렇게 되느냐고, 약간의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때, 형광등을 켜지 않아 어두운 휴게실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봄이었다. 목욕을 마쳤는지 젖은 머리를 한 채 어깨에 수건을 얹은 그녀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머리 안 말려?”
“드라이기 고장 났는데 매점이 문을 안 열어서. 최근에 문 닫는 날이 많네.”
“채경이 형 방에 있을 텐데. 가져다줄게.”
“됐어. 그냥 두면 말라.”
소파를 차지하고 누운 승철 때문에 봄은 어쩔 수 없이 소파에 기대며 바닥에 앉아야 했다. 평소에도 자주 그랬기에 그다지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봄은 거의 끝나 가는 고전 영화가 나오는 TV에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화면을 응시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주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똑. 차가운 물방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무리 기온이 높아도 지금은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다. 에스퍼이니만큼 감기에 걸리지는 않겠지만, 에스퍼라도 추위는 탄다.
주현이 수건을 손에 쥐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봄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힐끗 뒤를 돌아본 봄은 주현을 말리지 않았다.
“오늘 임무 다녀왔다며.”
“어. 별것 아니었어.”
“레드 등급 게이트인데 어떻게 두 시간 만에 끝냈어?”
주현이 손이 잠시 멈췄다. 다시금 머리카락을 말리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봄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다른 폭주 에스퍼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대답 없는 주현에 봄이 휙 뒤로 돌았다. 화면에서는 판자에 매달린 연인의 아릿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너 요새 왜 이렇게 무모해?”
“……무모하긴.”
“꼭 죽을 날 받아 둔 사람처럼 막 나가, 아주.”
주현은 저도 모르게 하나뿐인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단숨에 정곡을 찔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아무리 봄이라 해도 협회가 은밀하게 숨겨 둔 예언가에게서 기적 같은 타이밍으로 죽음에 관한 예언을 들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할 터다.
그래도 한순간이나마 주춤거린 주현에 어떠한 사정이 있다는 것 정도는 깨달은 모양이었다. 봄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현재 살아남은 폭주 에스퍼 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봄은 동시에 화나면 가장 무서운 사람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야. 빨리 말 안 해?”
“……내가 왜 말해야 하는데?”
주현의 자기방어는 뾰족한 가시 모양을 하고 있다. 밀리는 순간 내지르는 가시는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봄은 몇 년이나 주현과 함께 살았다. 거기다 주현의 가시 따위는 세화의 주먹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너 죽을 뻔한 거 내가 살려 줬잖아. 말 안 할 거면 내장 고쳐 준 거 다시 돌려놔.”
“치사하게…….”
“내 능력 한 번 받으려고 다들 얼마나 바치는지 알면 그 소리 안 나올걸.”
그 돈이 봄의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굳이 꼬집지 않았다. 같은 입장인 주현이 말해 봤자 누워서 침 뱉는 꼴이므로.
주현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차가운 시체가 된 게 시야 끝에 잡혔다.
말할까 말까 수도 없이 고민하며 대사까지 생각했던 주현은 입술이 딱 달라붙은 것처럼 한참을 침묵했다. 봄의 날카로운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꽂혀 있고, 분위기를 박살 내 줄 유일한 희망은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었다. 도망갈 길은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현은 어쩐지 봄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렵거나 친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마치 무서운 큰누나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랬다. 1년 동안 보호소에서 지내며 나름대로 여러 누나가 있었던 주현이지만, 아무래도 성인과 청소년의 차이인지 봄이 훨씬 더 무서웠다.
수건을 들고 우물쭈물하던 주현이 결국 체념하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괴물 밀렵 임무가 있었는데.”
“어.”
“불사조처럼 생긴 괴물을 데려오라 하더라고.”
“어.”
“근데 걔가 너무 뜨거워서 미리 준비한 케이지가 버티지를 못했어. 그래서 내가 직접 A동에 가져다줬어.”
봄의 오른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불만이 가득해 보였으나 그녀는 말을 끊지 않고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지하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이상한 할아버지랑 어떤 여자를 만났어.”
“……혹시 백발에 빼빼 마르고 모노클 쓴 노인이야?”
“어. 알아?”
“알지. 연구실 소장. 내 작은할아버지. 이름은 진달래.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어. 소시오패스 영감이라.”
주현은 줄줄 쏟아지는 정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주 권력 있어 보이던 그 영감이 봄의 작은할아버지이고, 이름은 진달래, 소시오패스. 어디서부터 되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주현은 진달래보다는 차라리 도라지가 훨씬 어울린다는 생각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거기 있던 여자가 미래를 보는 에스퍼였어. 그게 다야. 누나, 목마르지 않아? 내가 물 떠다 줄까? 잠시만 기다려.”
벌떡 일어난 주현은 봄의 손에 잡혀 그대로 다시 앉았다. 봄의 표정은 미묘했다. 약간의 분노와 초조가 담긴 얼굴이 주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여자가 뭘 봤는데?”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승철이 형 깰 거야…….”
“그 여자가 뭘 봤냐고 물었어.”
사고가 어지럽게 돌았다. 사실대로 말했을 때의 장단점, 거짓말로 빠져나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문득 주현은 연구소에서 알게 된, 폭주 에스퍼에게 행해지는 비인도적인 실험을 떠올렸다.
한 번 목줄에 묶인 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미래가 정해진 개들에게 사실 너희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호기심 하나로 삶이 결정된다고 말해 봤자 고통만 늘어날 뿐이다. 적어도 주현은 그리 생각했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나은 일도 있다고.
봄의 눈동자는 안쪽이 선명한 붉은색이고 바깥으로 갈수록 검게 짙어진다. 주현은 차마 그 눈을 계속 볼 수 없어 시선을 떨궜다.
“내가 죽는 거.”
“…….”
“폭주하고 폭탄이 터진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대사가 조용한 휴게실을 채웠다. 주현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을 위험을 안고 하루살이 같은 매일을 살고 있는데, 그의 죽음이 뭐 그리 대수라고 뜸 들였는지 욕이라도 먹을 것 같았다.
그저 쓸모없는 쓰레기가 드디어 산소 낭비를 끝내고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사람들 모두 주현이 11년이나 살아남았다고 놀란 걸 보면 충분히 오래 산 게 분명했다.
불안한 듯 손톱 옆 얇은 피부를 긁으며 주현이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그래도 게이트 너머에서 폭주하는 거라 휘말리는 사람도 없대. 주변에 괴물이 가득하니까 시체도 완전히 사라질걸. 생각보다 괜찮은 죽음 같아.”
괜찮은 삶도 못 산 주제에 괜찮은 죽음을 운운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주현은 그런 감정을 숨기며 손끝에 힘을 줬다. 기어코 껍질이 찢어져 작은 핏방울이 찔끔 흘러나왔다.
“지금이랑 겉모습에 차이가 없다고 했으니까 길어 봤자 1년 정도 아닐까 싶어.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나도 몰라. 근데, 뭐, 알 필요도 없지. 우리 다 그렇게 살아왔잖아. 다들 비슷하게 죽을 거고.”
C동에 들어온 에스퍼는 누구나 비슷하게 살다가 비슷하게 죽는다. 주현은 11년 동안 끝없는 상실을 겪었다. 이제는 주현의 차례였다.
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선율과 승철의 희미한 코골이가 부드럽게 뒤섞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주현이 양손을 깍지 꼈다. 허리 숙여 딱 맞게 들어맞은 손에 이마를 기대자 머리카락이 볼을 스치며 흘러내렸다.
“누나.”
“응.”
“……곧 있으면 나 죽는대.”
“그래.”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죽는 게 무섭다고 생각한 적은 없거든? 그런데 이 기분은 뭘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죽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이렇게 겁쟁이가 되지 않았을 텐데.”
분명 미련 가질 정도로 즐거운 인생이 아니건만, 그마저도 곧 잃는다 생각하니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휴게실의 낡은 소파도, 오래 써 온 좁은 침대도, 하다못해 파란 하늘마저 어딘가 먹먹함이 있었다.
동료들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맛없는 밥이어도 포만감을 느끼며 나른하게 조는 평화로운 하루가 아쉬워졌다. 차인호와 만나 체온을 나누고 입을 맞추는 나날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생겨 버렸다.
그는 겁쟁이에 욕심쟁이에 울보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이런 끝을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성인군자처럼 겁내지 않고 고상한 죽음을 맞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소망이라도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