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장 (131/161)

15장 난파선

[“최근 폭주 에스퍼의 잦은 미디어 출연으로 많은 분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 눈에는 충실하고 유능한 부하지만, 위험한 존재라는 건 사실이니까요.”]

희록은 젖병을 흔들며 TV 화면을 힐끔거렸다. 복도에서 가끔 마주치곤 했던 C동의 부소장, 태석이 말끔한 얼굴로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희록이 운영하는 매점에 태석은 단 한 번도 오지 않아 대화해 본 적은 없지만.

[“하지만 이것만은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협회의 최우선 순위는 시민의 안전입니다. 애초에 협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괴물에게서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서니까요.”]

“웃기고 있네.”

“아부우-”

“헛소리라고? 너도 아는 걸 사람들은 왜 모르나 몰라.”

아기를 어르는 손길이 제법 익숙했다. 첫 일주일 정도는 아기도 울고 어른도 우는 지옥 같은 나날이었는데. 스스로의 빠른 발전에 희록은 내심 뿌듯한 마음마저 들었다.

[“모든 폭주 에스퍼는 협회에서 개발한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위치 추적부터 신체 정보까지 송신하며, 파장을 감지해서 착용자가 폭주하면 곧바로 신호가 들어옵니다.”

“이 사진 속 목걸이가 맞나요?”

“네, 맞습니다.”]

사진 속 남자는 희록에게 무척 익숙한 사람이었다. 신주현. 가게에 곧잘 오는 단골 폭주 에스퍼. 그는 희록이 C동에 매점을 차리기 훨씬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목걸이를 확대한 사진은 주현의 지저분한 몰골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하지만 희록의 눈길을 가장 끈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의 눈빛이었다.

‘쟤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저토록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처음 봤다. C동은 감옥 같은 곳이지만, 일단은 그의 집이니 안과 밖의 태도가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내심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희록은 과자 하나 고르는 데 10분이 걸리는 녀석과 사진 속 날카로운 분위기의 폭주 에스퍼가 정말 동일 인물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 작은 기계에는 폭주한 에스퍼를 제압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아무리 폭주 중인 에스퍼라 해도 꼼짝없이 쓰러질 만큼 강력한 위력이죠. 오로지 착용자에게만 충격이 가기에 곁에 있는다고 다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머리를 날리는데 그럼 안 쓰러지겠냐?”

“으부아!”

“아이고, 그래. 알았다. 밥 줄 테니까 그만 좀 꼬집어라. 찢어지겠다.”

적당히 식은 분유를 아기의 입술에 가져다 대며 희록이 커다란 한숨을 토했다. 어쩌다 팔자에도 없는 홀아비 신세가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이미 아기는 그의 품에 있고 달리 보낼 곳도 없다.

“보통 아기도 아니고 초능력자 아기인데, 어디다 보내겠냐.”

배를 채우는 분유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기가 양손으로 젖병을 잡았다. 이런 식으로 망가진 젖병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소문난 수전노인 희록은 황급히 아기의 손가락을 떼어 냈다.

“고릴라 새끼도 너보다는 약할 거다.”

말도 안 되는 괴력으로 요람을 부수고, 담요를 찢고, 애착 인형을 참수했던 아기가 순진한 눈으로 희록을 올려다보았다.

“안 그러냐? 보배야.”

두 달 전, 여느 때처럼 한가롭게 매점을 보던 희록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침입자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박제된 것처럼 끼고 다니는 선글라스를 보자마자 어깨에서 힘을 푼 희록이 채경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쑥 나타난 걸 미루어 빛을 조종하는 능력을 써서 자신을 보이지 않게 한 채 온 게 분명했다. 채경은 가늘게 떨고 있었는데, 오랜 시간 그를 봐 온 희록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이 녀석을 데리고 도망쳐 줘.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왜 그렇게 떨어?”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그냥, 제발…….”

담요에 감싸인 건 아기였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었을 게 분명한 갓난아기. 이런 위험하고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지만, 부탁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고채경이라서.

“알았어. 대신 무슨 일인지 나중에 확실하게 대답해 줘.”

돈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C동에 매점을 차린 남자가 정체 모를 아기를 품에 안았다. 선글라스로 반쯤 가려진 얼굴이 안도와 함께 웃으니까 무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게 희록은 아기, 보배를 떠맡게 되었다. 보배라는 이름은 그가 붙였다. 이왕이면 비싼 이름이 나중에 잘 살 것 같으니까. 비록 정식으로 출생신고를 한 건 아니라 별명에 가깝다 해도, 아기는 착실히 보배라는 부름에 반응하고 있었다.

[“폭주 에스퍼들이 착용하던 스카프는 목걸이를 가리기 위함이었군요.”]

희록의 눈이 다시금 화면에 닿았다. 여전히 떠 있는 사진 속 주현은 한쪽 눈이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보배를 구하다가 그리되었다고 했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눈을 빼앗은 남자가 당당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아무리 폭주 에스퍼라고 해도 형태가 형태다 보니, 인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허, 참 나. ……허! 참!”

몇 년간 폭주 에스퍼가 개처럼 구르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봐 온 희록이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불만스러웠는지, 보배가 희록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투두둑. 실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가슴팍에 아기 주먹만 한 구멍이 생겼다. 희록은 체념한 얼굴로 보배를 고쳐 안았다. 보배 덕분에 최근 바느질 솜씨가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고 있었다.

보배의 괴력은 어딜 어떻게 봐도 에스퍼의 힘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에스퍼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어리다는 점이다.

그걸 채경에게 알리자 그는 보배의 부모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어 폐기된 실험을 몰래 진행하던 연구원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보배의 팔에 난 수많은 주사 자국과 목덜미에 있는 바코드 문신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그날 밤 희록은 보배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목걸이가 불편하지는 않나요?”]

화면 속 기자가 질문했다. 태석의 두 눈이 찰나의 순간 가라앉았다.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의 실체를 아는 희록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최대한 인체 공학적으로 만들었지만, 안전이 최우선이기에 약간의 불편감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폭주로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며 모든 폭주 에스퍼가 목걸이 착용에 강하게 동의했습니다.”]

슬프게도 그건 진실이었다. 모멸감은 들지만, 동시에 안도도 느껴진다고 여러 폭주 에스퍼가 말했었다. 게임 속 NPC와 다를 바 없는 매점 주인은 의외로 다양한 말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끄윽-”

식사를 마친 보배가 트림까지 빠르게 끝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역겨웠을 트림이 보배가 하자 그저 귀여웠다. 저도 모르게 실실 웃던 희록의 얼굴은 따라서 신이 난 보배가 마구잡이로 흔든 주먹이 날아들자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우!”

“젠장!”

완전히 홀아비 생활에 익숙해진 희록이 멍이 든 얼굴을 구겼다. 협회의 눈을 피해 평생 보배를 키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다. 유치원에 보냈다가 괴력으로 다른 집 자식을 다치게 만들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 끼쳤다.

[“폭주 에스퍼는 분명 위험하지만, 저희가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너무 정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희록은 자연스럽게 보배의 기저귀를 확인했다. 손 떨면서 산 비싼 기저귀는 아직 보송했다.

* * *

“후…….”

마치 계단처럼 생긴 나무 위에 올라선 주현이 사방을 둘러보며 깊은숨을 토해 냈다. 대충 정리가 끝난 후라 주변에서는 더 이상 괴물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이트 임무를 받을 때마다 오늘이 예언의 날인지 가늠하는 건 최근 생긴 습관이었다. 이번에는 살아남았다. 다음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주현이 생채기가 남은 볼을 문질렀다. 붉은 스카프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보통 임무는 늦은 오후를 넘어 밤에 끝나는 경우가 많다. 돌아오면 곧장 목욕하고 끼니를 때우고 자기 바쁘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빠르게, 해가 떠 있는 낮에 C동으로 돌아왔다.

목욕을 마치고 어슬렁거리던 주현은 할 일이 없을 때 늘 그랬듯 휴게실로 들어섰다. 복도 벽에 붙은 공중전화를 힐끔 살피는 눈길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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