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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28/161)

폭주 에스퍼 115화

“차라리 잘됐지. 죄 없는 사람을 물귀신처럼 끌고 가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이 거지 같은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기뻐해야 하나? 죽으면 최소한 더는 사람을 죽일 수 없을 테니까.”

의식적으로 쏟아 낸 속마음이 공허하게 욕실을 울렸다. 게이트 너머에서 뜨겁게 달궈졌던 몸이 차게 식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냉수가 견딜 수 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손은 왜 떨리는 걸까. 분명 죽음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품에 든 게 없어서 아쉬움도 없고, 두고 가기 싫을 정도로 달콤한 장밋빛 인생인 것도 아닌데. 오히려 이 힘겹고 외로운 인생이 얼른 끝나기를 바란 시간이 수도 없이 길 건만, 어째서…….

“……X발.”

눈물이 지나간 자리가 춥게 느껴졌다. 손등으로 닦아 내도 물방울은 다시금 흘러내렸다. 머리 위에서 쏟아진 물이 눈물과 뒤섞여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한참을 문지르고 나서야 포기한 주현이 금이 간 타일 벽에 어깨를 기댔다.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자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이 들었다.

“죽는 게 뭐라고. 다들 죽었는데 이제 와 뭐가 무섭다고.”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주현이 자신을 설득하듯 큰 소리로 말했다. 쏟아지는 물줄기만이 그에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눈도 병신이고, 기억도 오락가락하고. 살아 있어 봤자 좋은 일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일어나고. 잘됐네. 잘 죽는 거네.”

쏴아아- 머리부터 떨어져서 등을 적시며 지나가는 물줄기가 어쩐지 따가웠다. 지금껏 그토록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어째서 이토록 눈물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코앞에 닥친 죽음과 조금 떨어진 죽음의 차이일까?

리아의 예언은 100% 들어맞는다고 했으니 주현의 끝은 폭사일 터다. 그동안 들은 것처럼 머리가 날아가서 몸뚱이만 남게 되리라. 주변에 괴물이 득시글하다 했으니 잡아먹혀서 손가락 하나 안 남을지도 모른다.

“……진짜 폭탄이 들어 있긴 하구나.”

여전히 지워 내지 못해 손톱 밑이 까맣게 물든 손가락이 차가운 초커를 매만졌다.

‘이걸 처음 찼을 때는 불편해서 잠도 잘 자지 못했었는데…….’

당시 사람을 개 취급한다며 소리 질렀던 동료 중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 그토록 오래된 목줄이었다. 물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상처투성이 팔에 들러붙었다.

주현은 분명 지옥에 갈 것이다. 지금껏 그의 손에 스러진 생명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면 죽어서도 편하지는 못할 터. 어쩌면 아버지를 만날지도 모른다. 자신을 죽이고 태어난 아들에게 뭐라고 말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엄마처럼 가슴에 틀어박히는 원망을 토해 내도 죽어서는 도망갈 곳조차 없다.

“…….”

만약 정말로 저승이라는 게 있다면, 지옥에 가기 전에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연우는, 선생님은, 혜린은, 다른 가족들은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그걸 생각하다 보니 더더욱 죽음이 무서워졌다.

주현은 아이처럼 우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오래도록 욕실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렇게 소리까지 내어 가며 운 건 오랜만이었다. 설령 방에 혼자 있었다 하더라도 세찬 물줄기가 아니었으면 주현은 제 목을 졸라서라도 울음소리만큼은 내지 않았을 터다.

“하아…….”

따끔거리는 눈을 문지르고 체온으로 따뜻해진 벽에 기대 있던 주현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여전히 물은 떨어지고 있고, 아무도 주현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의미 없이 쏟아지는 물이 조금 아까웠지만, 주현이 죽고 나면 한동안 쓰이지 않을 샤워기다.

오랜 시간 차가운 물을 맞은 탓에 몸이 완전히 식었다. 그에 따라 주현의 감정도 서서히 정리되었다. 어릴 때부터 체념이 빠른 아이였던 주현은 이번에도 그랬다.

‘일단 한 명씩 인사도 하고, 방 정리도 천천히 시작해야겠다. 당장 다음 임무에서 죽을지, 아니면 내년에 죽을지 모르니까 너무 요란 떨지는 말고. ……차인호에게는 뭐라고 하지?’

차인호. 주현이 가지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운 가이드. 얄미운 미소를 떠올리자 볼이 약간 따뜻해졌다.

주현이 죽으면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조금쯤은 울어 줄지도 모른다. 기다란 속눈썹이 눈물로 젖고, 모양 좋은 입술이 구겨지고, 낮은 목소리로 주현의 이름을 부르고.

그 슬픔을 만드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죽음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주현은 분에 넘치는 몽상을 펼쳤다. 다만 죽고 나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만이 조금 아플 뿐이었다.

* * *

“일주일 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차인호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자에 앉기도 전부터 얼굴을 눈으로 훑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상처를 찾아 돌아다니다 이내 담배 한 개비를 들고 있는 오른손을 발견한 미간이 가볍게 구겨졌다.

차인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담배에 불을 붙인 건 성냥이 아니라 라이터였다. 기름 냄새마저 달콤하게 받아들이며, 주현이 회색 숨을 뱉었다.

“화상이 꽤 심해 보이네요.”

“보기보단 안 아픕니다.”

“그야 벌써 고름이 터져서 새살이 돋고 있으니까 안 아프겠죠.”

망설임 없이 괴물의 손을 잡아챈 가이드가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으로 상처를 살폈다. 모양 좋은 손가락이 타들어 간 피부 주변을 어루만졌다. 그것만으로, 고작해야 1%도 안 될 면적을 쓰다듬었을 뿐인데 갑자기 숨쉬기가 편해졌다. 두통이 가라앉고 차갑던 몸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내리깔린 속눈썹과 여름의 열기로 분홍색이 된 뺨, 무섭지도 않은지 폭주 에스퍼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입술. 그 모든 것을 물끄러미 보던 주현은 저도 모르게 힘을 줘 차인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가이드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처음 봤을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눈에 띄었다.

‘분명 이 감정 때문이겠지.’

불쌍하다고 몇 번 쓰다듬고 간식 하나 던져 줬다는 이유로 꼬리 치며 뒤꽁무니를 쫓는 길거리 똥개와 다를 바 없다. 주현은 누구보다 목줄이 잘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왜 그래요? 오늘따라 분위기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다릅니까?”

“뭔가 차분하고, 툴툴거리지도 않고, 수줍어하지도 않잖아요. 진짜 주현 씨 맞아요?”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임무에 따라 며칠씩 눈 붙일 틈도 없는 날이 많은 주현이 뱉기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그러나 전날 잠을 자지 못한 건 진짜였다. 동료에게 우린 실험 쥐였다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조금도 잘 수 없었다.

그걸 모르는 차인호는 걱정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미묘하게 구겨진 표정을 지었다. 열이 있나 확인하려는 듯 이마를 매만지는 손길은 무척 따스했다. 하지만 동시에 민망하기도 했다.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길래 조금 얌전하다고 곧장 감기라도 걸렸나 의심하는지.

“차분하고 툴툴거리지 않고 수줍어하지 않는 저는 싫습니까?”

생각하기도 전에 혀가 먼저 뱉은 말이었다. 말하고 나자 쑥스러움이 밀려들었다. 꼭 투정 부리는 연인 같은 어조가 아닌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미쳤나.’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 게 이런 걸까. 볼이 약간 발긋해진 주현이 차인호의 손을 밀어내며 변명을 토하려던 때였다.

“싫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골골거리는 고양이 같아서 귀여워요.”

차인호는 어쩐지 기뻐 보였다. 두 눈이 부드럽게 휘고 입술이 위를 향했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C동의 지저분한 회색 벽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될 만큼 반짝이는 미소가 너무 눈부셔서 주현은 내가 어딜 봐서 귀엽냐고 화내지도 못했다.

대신 그는 상체를 기울여 고개를 차인호에게 가져다 댔다. 쪽. 민망한 소리가 짧게 울렸다.

“…….”

“…….”

차인호의 커다란 눈동자에 담긴 주현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낯짝에 피가 뜨겁게 끓었다.

“아.”

주현은 저도 모르게 손끝으로 입술을 가렸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매칭 에스퍼와 가이드로서 만날 때마다 제법 진한 스킨십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미 끝까지 간 적도 있다. 이제 와 이런 어린애 같은 입맞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분명 그러하건만, 주현은 그렇다 쳐도 어째서 차인호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내려간 눈썹이 꼭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얼른 변명을 내뱉지 않으면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놀림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멋대로 행한 접촉에 기분 상한 차인호가 그를 밀어낼지도 모르고.

“아, 그게…….”

“음?”

정신을 차린 듯 차인호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눈에 보이는 장난기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곧 죽는다는 사실은 변명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그의 죽음은 입맞춤의 이유가 되지 않고, 그걸 차인호가 이해해 주어야 할 책임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일주일 만이라, 가이딩이…… 많이 떨어져서…….”

“그래서요?”

“다친 곳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말할수록 망해 간다는 게 절실히 느껴졌다. 그냥 얌전히 있을걸. 차라리 평소처럼 가이딩 떨어졌으니까 해 달라고 당당히 말했다면 이토록 민망할 일도 없을 텐데.

차인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차마 볼 수 없었다. 주현의 가련한 변명을 비웃고 있을까, 아니면 폭주 에스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떨떠름함을 느끼고 있을까.

계약서에는 모든 접촉은 가이드의 허락하에 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주현이 조항을 어겼을 시 어떻게 되는지 떠올리려 머리를 굴리던 순간이었다.

“그냥 하고 싶어서 했다고 해석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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