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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27/161)

폭주 에스퍼 114화

주현은 침착하게 그녀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능력이 중간에 끊겨 중요한 정보를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므로. 찬찬히 리아를 살피자 바람 한 점 불지 않음에도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나부끼는 걸 볼 수 있었다.

크게 뜬 채 허공을 응시하던 눈이 천천히 닫혔다. 가볍게 비틀거리는 리아를 반사적으로 붙잡은 주현이 재빠르게 손을 떼었다. 습관은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머리카락 틈으로 리아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숨을 고르는 그녀에 잠시 망설이던 주현은 문득 아까 전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24시간 내내 붙어 있다던 기계는 지금 연결이 끊긴 상태고, 이곳에 다른 사람은 없다. 즉, 방금 리아가 본 미래는 협회의 누구도 모른다.

이왕이면 쓸 만한 정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주현이 입을 열었다.

“무엇을 봤습니까?”

리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흰 인중을 타고 코피가 흘러내렸다. 미간을 찌푸린 주현이 근처에서 티슈를 발견하고 몇 장 뽑아 조심스레 내민 순간이었다.

“……당신이 죽는 걸 봤어요.”

우뚝 굳어버린 주현의 귓가로 희미하게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톡. 핏방울이 떨어졌다. 이미 재가 묻어 지저분하던 바닥이 조금 더 더러워졌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은 전쟁터였어요. 수많은 괴물이 죽어서 사체가 가득했어요. 그곳에서 당신은 혼자 있었어요. 피투성이였는데, 아무 도움도 없고 애초에 도움을 바라지도…….”

“전 어떻게 죽었습니까?”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리아의 놀란 표정을 보면 좀 더 슬퍼하거나 두려워해야 할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걸 내보일 기분은 들지 않았다.

태어난 이상 누구에게나 끝이 있다. 그리고 폭주 에스퍼는 남들보다 주어진 삶이 훨씬 짧다. 애초에 11년이나 살아남은 게 신기한 일이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스스로의 죽음을 곱씹은 탓에 차마 놀랄 수조차 없는 남자가 예언가를 내려다보았다.

희게 질린 얼굴로 주현을 살피던 리아가 티슈로 코를 막았다. 푹 숙인 고개를 타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폭주로요.”

“…….”

“당신은 한 번 더 폭주하고……. 흙먼지가 심해서 잘은 안 보였지만, 목걸이가 폭발하는 건 확실히 봤어요. 폭탄 같은 게 들어 있는 건가요?”

가느다란 손끝이 주현의 초커를 가리켰다. 무겁고 아픈 목줄은 기어코 그를 죽일 것이다. 마른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리아는 곧 상황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손가락이 무릎으로 떨어졌다.

“다른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까?”

“네, 주변에 괴물밖에 안 보였어요. 하늘이 짙은 노란색인 걸 보면 게이트 너머인 게 분명해요.”

“그럼 됐습니다.”

주현은 언제나 폭주를 두려워했다. 정확히는, 단지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죽을까 봐 무서웠다. 폭주는 같은 에스퍼조차 막기 어려운 재해고, 일반인은 지독하게 운이 좋지 않은 이상 휘말리면 끝이다.

어디서 맞아 죽거나 괴물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게 훨씬 더 나은 죽음이겠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폭주에 휘말리는 사람이 없다면 괜찮았다. 주현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건 주현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언제부터 망가졌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정답을 알 수 없었다. 아마 처음부터? 스쳐 지나간 목소리는 자기혐오를 담고 있었다.

“바로 저라는 걸 알아보셨으니 지금과 겉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네. 안대를 벗었다는 점만 빼면 지금과 거의 같아요. 그리…… 머지않은 미래인 것 같아요.”

‘안대를 벗었다고?’

급소에 달라붙어 있는 안대를 떨어트릴 정도면 상당히 거친 싸움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폭주까지 했겠지만.

그는 아주 어릴 때조차 죽음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삶이 엉망이니 자연스레 미련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칭 가이드와 만나고 이제 좀 숨 쉴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시한부 선고를 받다니. 신은 끝까지 주현을 괴롭히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주현이라 해도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으며 감내하고 있자니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뭐가 말입니까?”

“얼마 후면 죽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두려워 보이지 않아서요.”

리아의 까만 눈동자가 말갛게 빛났다. 조금 눈물이 고인 것도 같았다. 주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확실하게 듣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고? 이 감정은 체념일지도 모르겠다.

주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눈 없는 새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 없는 시간이 지나가고, 주현이 입술을 달싹인 순간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며 노인이 뛰어 들어왔다. 손에는 제법 커다란 투명 케이지가 들려 있었다.

“완성됐다네. 이제 저 아름다운 녀석을 이곳으로 옮기기만 하면 자네 임무는 끝이야.”

노인은 주현과 리아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며 외쳤다. 괴물을 손에 넣은 게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었다.

“자료를 찾으러 들어간 게 아니었습니까?”

“음? 그랬나? 아, 맞다. 예언의 주기를 보러 갔었다네. 워낙 불규칙적이지만 몇 년간 관찰한 결과 대략적인 지표가 나왔지. 마지막 예언을 한 지 보름이 지났으니 곧 할 때가 되었군.”

누가 말하기도 전에 주현과 리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리아는 조금 불안해 보였으나 주현을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굳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겉으로 티 내지 않았으나 주현은 놀라고 말았다.

주현의 끝을 알리는 예언이 협회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는 곧 버려질 말이 되어 지금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굴려질 게 뻔했다. 정황상 주현은 게이트 너머에서 죽는다. 그 말은 게이트 밖에서는 어떤 위험한 임무라도 살아 돌아온다는 뜻이다.

그걸 생각하면 협회에 예언이 알려지지 않는 게 좋지만, 그건 주현의 입장이다. 리아에게는 어떠한 이득도 없다. 오히려 후에 들통나면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리아는 오늘 처음 본 폭주 에스퍼를 위해 자신의 안위를 걸고 진실을 숨겨 주었다. 주현은 그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C급 에스퍼는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지만 표정은 단단했다. 후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예언 때는 좀 더 즐거운 미래가 보이면 좋겠어요.”

“그게 자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은가.”

추궁할 생각은 없는 듯, 노인은 대충 대답하곤 곧장 불사조에게 다가갔다. 세 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리아는 슬쩍 입술 끝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현은 어떤 대답을 돌려줘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냥 따라서 끄덕였다.

그 뒤는 빠르게 지나갔다. 주현은 능력으로 괴물을 케이지로 옮겼고, 괴물이 울었고, 주현이 돌아섰고, 괴물이 서럽게 울었고, 노인이 그를 내쫓았고, 괴물이 울부짖었다. 주현은 끝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문을 나서자 벽에 기대서 있던 무휼이 바짝 다가왔다. 마치 안에서 사고라도 쳤는지 검사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시선에 절로 오한이 들었다.

“임무는 끝이다. 그래도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마라. 에스퍼를 제외해도 수백 명이 있는 건물이니까. 폭주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인명 피해가 엄청날 거다.”

“……지하는 다 연구 시설입니까?”

“그래. 협회 소속의 뛰어난 연구원들이 잔뜩 있다.”

연구원. 분명 폭주 에스퍼를 쥐새끼 취급하며 실험했던 그 연구원들이리라. 주현은 쌀쌀맞은 얼굴에 대고 아까 내가 무엇을 들었는지 아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반드시 들어맞는 예언은 주현의 삶이 게이트 너머에서 괴물에 둘러싸여 비참하고 외롭게 끝날 것이라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여기서 능력을 펑펑 쓰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폭주는커녕 목숨조차 잃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흰 가운을 입은 놈들을 싹 다 죽여 버린다 해도, 분노에 몸을 맡긴 채 전부 뒤집어엎는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데?’

설령 지금 지하에 있는 연구원이 전부 죽는다 해도 얼마 후면 다시금 채워질 게 뻔했다. 운 나쁘게 폭주하고, 더욱 운 나쁘게 살아남는 에스퍼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테고, 주현의 반항은 그들의 처지를 더욱 안 좋게 만들 뿐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목을 졸랐다. 단단한 목줄이 평소보다 작게 느껴졌다.

주현은 뺨 안쪽을 강하게 깨물었다. 아릿한 느낌과 함께 비릿한 내음이 마른 입안을 적셨다. 고통으로 분노를 억누른 주현이 고개를 떨궜다. 지금 눈이 마주치면 살의를 숨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원하지 않은 살인을 저지른 죄로 감옥도 아니고 바로 지옥으로 떨어진 폭주 에스퍼가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지만, 쥐새끼의 손가락을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 * *

C동으로 돌아온 주현은 오랜 시간 목욕했다. 씻어도 씻어도 피부에 달라붙은 재가 사라지지 않았다. 까맣게 물든 손톱 밑을 강박적으로 긁어내던 주현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당신이 죽는 걸 봤어요.’

리아는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두려울 게 뭐가 있을까? 고작해야 폭주 에스퍼 하나가 임무 중 재폭주하고 그대로 사망한다는, 흔해 빠진 이야기일 뿐이건만. 겨우 만난 지 한 시간밖에 안 된 사람이 예언의 주인공보다도 더욱 슬퍼 보였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슬쩍 입꼬리를 올린 주현이 다시금 손톱에 집중했다. 물에 젖은 재가 손톱 밑에 단단히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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