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13화
예를 들면 언제까지 살아남는지, 예를 들면 또 누구를 죽이는지, 예를 들면 언제 살해당하는지, 예를 들면 미래에는 얼마나 많은 걸 더 잊어버리는지, 예를 들면…… 차인호마저 잊고 혹시나 그의 피를 손에 묻히는지.
묻고 싶은 게 많지만 꿀꺽 삼켰다. 붉은 보름달이 올곧게 예언자를 비췄다. 침을 삼킨 리아가 불사조에 정신 팔린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끼어들 생각은커녕 애초에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당신이 주역이 되는 예언은 못 봤지만, 몇 번 보인 적은 있어요. 가장 최근은 이안 씨가 참여한 임무인데…….”
뭐가 그리도 불안한지 움츠러든 채 떠는 걸 보고 있자면 몰아세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주현은 알겠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근처에 있던 의자를 능력으로 당겨 리아에게 내밀었다. 원래라면 그 정도 일에 능력을 쓰지 않았겠으나 오늘은 심신 모두 피곤해서 약간의 사치를 부렸다.
리아는 머뭇거렸지만 이내 바퀴 달린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주현 또한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워 앉자 젊은 남녀와 노인, 그리고 불타는 새 한 마리가 얌전히 모인 이상한 공간이 완성되었다.
“아, 저, 차라도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몸도 불편해 보이는데 신경 쓰지 말고 쉬세요.”
“이건 그냥 정기 검사일 뿐이라…….”
무감정한 주현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리아는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토해 냈다. 주현은 반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이곳에 와서 건강 검진을 받는다며 말끝을 흐리는 리아에게 아까부터 약간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이마에 그건 뭡니까?”
“이건 제 능력이 언제 발동할지 몰라서……. 협회에서 곧장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항상 뇌파 감시 패치를 붙이고 다녀요. 지금은 검사 때문에 연결이 끊어졌지만, 이곳을 나가면 바로 연결될 거예요.”
오랜 시간 속으며 살인 도구 취급을 받은 주현의 인생도 엉망이지만, 24시간 머릿속을 감시당하는 리아 또한 만만치 않게 엉망이었다. 괜스레 상처 주변을 누르던 주현이 조용하게 물었다.
“저 할아버지는 의사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의사 자격증은 없는 걸로 아는데……. 실험도 겸해서 여기로 불려 와요.”
조절할 수 없는 예언으로 무슨 실험을 할 수 있을까. 그 의문을 느꼈는지, 혹은 예상했는지 노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내가 관심 가지는 건 예언이 가진 모순이라네.”
[끼이이-]
노인의 뒤에서 고개를 꺾은 새가 주현을 향해 울었다. 눈도 없건만 시선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예언을 듣고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다면, 그건 예언이 운명을 바꾼 게 되는가? 아니면 애초에 그럴 운명이었기에 예언으로 보였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려운 문제를 고민할 심적 여유가 없던 주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얼른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돌아가지 않는 머리는 마땅한 질문을 뱉지 못했다.
“리아의 예언은 100%라네. 사실 말도 안 되는 수치지. 그럼에도 숫자는 거짓이 아니야. 어떻게 된 일이라고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만, 애초에 제가 알아야 합니까?”
“협회에서는 예언을 비껴가기 위한 실험을 무수히 진행했네. 아니, 진행했을 것이네.”
노인이 천천히 주현과 리아를 향해 돌아섰다. 렌즈 너머로 크기가 다른 두 눈이 희번덕였다. 리아는 불안한 듯 손가락을 모아 쥐었고, 주현은 그걸 못 본 척하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한 거면 한 거지, 했을 거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왜냐하면 예언을 피해 가려 한 어떤 실험도 기록으로 남지 않았거든. 심지어는 누구도 해당 예언을 기억하지 못하고, 대상이 누구였는지조차 모른다네. 모든 예언은 시각 정보로 전환되어 기록되는데도!”
그제야 주현도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과학적 지식이나 철학적 호기심이 티끌만큼도 없는 주현의 시선으로도 예언은 신비로운 힘이었다. 그걸 협회에서 가만히 따를 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리아의 능력에는 ‘현실을 바꾸는 힘’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네. 나 혼자만의 추측이지만.”
“안 따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는 무자비한 힘이 아니라요?”
“나는 더 실험하고 싶네만, 협회에서 단단히 겁을 먹어서 말이야. 예언을 따르지 않았다가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무서운 거겠지. 쯧쯧, 하여튼 근성이 없어.”
단순히 목숨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보니 누구나 두려워할 만했다.
신기하지만 주현과는 별 관련 없는 예언 능력이 아니라 그가 모르는 여러 사정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하지만 선뜻 입 열기가 어려운 분위기에 주현은 가볍게 눈가를 찡그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는 데 썩 도움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문득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매캐한 연기를 삼키고 뱉어 내며 크게 한숨 쉬고 싶었다. 그런 주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생각난 김에 찾아볼 자료가 있다며 리아가 나왔던 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썩 튼튼해 보이지 않는 백발노인치곤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순식간에 리아와 단둘이 남은 주현이 불안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비록 차인호와 매칭한 후로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11년 동안 이어진 생각을 바꾸기엔 일렀다. 주현은 여전히 사람과 함께 있는 게 불편했다.
“저기…….”
자그마한 목소리에 주현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흠칫 어깨를 떤 리아는 입술을 꼭 깨물곤 이내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에스퍼지만, 사실 A동을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저,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게 오랜만인데…… 주현, 씨, 맞죠? 주현 씨가 아무렇지 않게 대해 주셔서 기뻤어요.”
의식적으로 한 게 아니라 단지 관심이 없었을 뿐이라 조금 겸연쩍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한 주현은 리아의 용기에 힘입어 서툴게나마 보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사람은 흔치 않거든요.”
낙인, 악마의 눈, 결핍의 증거. 피를 머금은 듯한 눈동자는 편견 덕분인지 혹은 실제로 무시무시하게 보이는지, 시야에 담는 것조차 꺼리는 이들이 많았다. 같은 폭주 에스퍼와 이미 익숙해진 C동 직원을 빼면 웬만해서는 두려움을 담고 주현을 보았다.
‘차인호도 빼고.’
어쩐 일인지 그는 통 주현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그건 곧 좋은 기분으로 바뀌었다. 그게 너무 심해져서 미움받고 싶지 않은 걸 넘어 사랑받고 싶다 바라게 된 건 안 좋은 일이지만.
“그래요? 제가 보기엔, 아주 예쁜 색인데.”
망설임을 담은 속삭임에 하나밖에 없는 붉은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때마침 같은 말을 해 주었던 남자를 떠올리는 중이었던 주현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약간의 수줍음과 덧없음이 섞인 미소가 날카로운 인상을 꿀처럼 녹아내리게 했다. 재가 묻어 지저분하고 피로가 잔뜩 밴 낯에 앳됨이 묻어났다. 주현은 그런 얼굴로 슬며시 웃었다.
“취향 독특하시네요.”
“아……. 앗, 아뇨!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볼을 붉힌 채 허둥지둥하는 리아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주현이 힐끔 불사조를 보았다. 어쩌면 열기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괴물은 두 발로 허공에 선 채 얌전히 타올랐다.
대화는 어색하게 끊겼다. 두 사람 다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타입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습관처럼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뇌 속에 나열되기 시작했다. 더러운 꼴로 목줄을 그대로 내보인 채 사람들 앞을 지나온 일에 대한 수치심, 눈앞의 괴물이 앞으로 어떤 실험을 받을지에 대한 걱정, 그리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진실. 어떤 생각을 하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말하지?’
현재 가장 큰 걱정은 ‘동료들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하느냐’ 혹은 ‘설명해야 하느냐’였다. 살아남은 폭주 에스퍼 중 C동에 가장 오래 머문 건 주현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동료들의 고통이 가벼운 건 아니다.
모두가 몸은 물론 마음까지 다치고 망가졌다. 그런 상황에서 사실 우리의 일상이 전부 다 실험의 일환이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채경이 중독된 이유도, 다른 이가 가이딩이 부족해서 죽어 간 이유도, 그런 상황에서 능력을 많이 써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는 것도.
고되고 비참하더라도 그들의 인생이었다. 가끔은 웃으며 농담을 나누고,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기도 했던 삶이다. 죄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위험한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그런데 사실은 괴물조차 아닌 실험실 쥐새끼 취급을 받고 있었다니. 너무나도 끔찍했다.
주현이 두려워하는 건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가 나올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주지 않는다는 건 그냥 죽으라는 뜻과 같다. 폭주 에스퍼가 두려워서 가이드가 오지 않는 건 협회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실험을 통해 안전하게 만든 가이딩 약물은 얼마든 내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단지 협회의 연구원이 결과를 궁금해했다는 이유 하나로…….’
주현이 허리 숙이며 얼굴을 감싸 쥔 순간이었다. 덜컹! 옆에서 제법 큰 소리가 울렸다. 리아가 제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황급히 바라본 그녀는 책상 끄트머리를 잡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 들린 건 의자 다리가 책상에 부딪힌 소리인 듯했다. 손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힘을 준 손을 잠시 살핀 주현이 조심스레 리아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십니까?”
“…….”
“어디 아픈 거라면-”
“보여요.”
간신히 들릴 정도의 작은 속삭임은 성능 좋은 에스퍼의 귀에 확실하게 닿았다. 주현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리아의 능력이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