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12화
“아, 생각났군. 에스퍼의 폭주에 관한 실험이네. 폭주는 단순한 능력의 과발현이 아니라 한계를 돌파하는 힘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었거든. 에스퍼를 강제로 폭주시켜 전력을 강화하자는 의견이었지.”
“……제 폭주도 실험의 일환이었습니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혹시나’와 ‘설마’가 뒤엉켜 싸우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입술을 말아 문 주현 앞에서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가 폭주하기 한참 전에 폐기되었네. 그러다 자네가 열네 살의 나이에 폭주하고 원인을 알기 위해 여러 실험을 진행했지.”
주현은 안도와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인생을 뿌리 뽑히지 않았다는 안도와 결국 원망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실망.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상처 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어떤 실험입니까?”
“워낙 많아서 일일이 말할 수는 없구먼. 어디 보자……. 대충, 얼마나 오랫동안 가이딩 없이 버티는지, 폭주 전과 후의 출력 변화, 그리고 재폭주 시 첫 번째 폭주에 비해 파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이 있네.”
“……하.”
“가이딩이 바닥난 상태로 얼마나 강한 능력을 쓸 수 있는지도 확인했다네. C동에 가겠다는 가이드가 없어서 우리가 할 일은 어려운 임무를 주는 것뿐이었지.”
주현은 입을 다문 채 노인을 응시했다. 가이딩이 부족해 고통 속에서 뒹굴었던 나날이 머릿속을 스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앞의 노인은 언뜻 자랑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끝없는 지옥 속에서 갈고 닦은 인내심이 빠르게 마모되는 게 느껴졌다.
“자네들은 쓸모 있고 튼튼한 실험 쥐들이라네. 쉽게 죽어 나가는 것에 비해 수급이 어렵다는 점만 빼면 말이지.”
누구의 죽음도 쉽지 않았다. 전부 절망 속에서 울며 죽어 갔다. 그들은 실험이 끝나고 폐기되는, 주사마저 아까워 꼬리를 잡아당겨 죽여 버리는 실험 쥐가 아니다. 주현은 몰라도 다른 이들은 에스퍼로 발현한 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싸워 왔다. 이까짓 노인네가 멋대로 떠들어 댈 인생이 아니라는 말이다.
쿠당탕! 주현이 일어남에 따라 의자가 옆으로 넘어졌다. 노인이 돌아보았다. 의자를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다.
“왜 화난 얼굴인고? 흠, 그러고 보니 자네들 덕에 가이딩 약물의 질도 상당히 높일 수 있었다네. 직접 에스퍼에게 투여해서 결과를 관찰한 덕에 좋은 배합을 찾았지.”
주현은 곧장 채경을 떠올렸다. 어느 날부터인가 약이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던 채경은 며칠 후부터 지나치게 약에 의존하게 되었다. 원래 S급 에스퍼였던 그는 다른 동료보다 필요로 하는 가이딩의 양이 많았다. 가이딩 약물 중독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상한 약을 많이 맞아서.
기세등등하게 웃으며 떠드는 노인에게 손을 뻗은 건 이성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노인의 멱살을 잡아챈 주현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가 다가간 건지 노인을 잡아당긴 건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주현은 그저 갈 곳 없는 분노를 씹으며 으르렁거렸다.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지루함과 한심함을 담은 채 그저 평온했다.
“내가 자네였다면 현실에 타협하고 다시 올지 모를 이 시간을 기회 삼아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텐데.”
“…….”
앞니에 짓눌린 입술이 까졌는지 비린내가 혀끝을 스쳤다.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지금은 감정을 내뱉으며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웬만큼 곱씹지 않으면 진정되지 않을 감정을 한데 모아 억지로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낸 주현이 멱살을 틀어쥔 손을 놓았다.
“그래도 생각은 할 줄 아는 모양이군.”
너무나도 큰 분노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쓰레기처럼 쉽사리 휘둘리는 인생에 진절머리가 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건 그의 인생이다. 누구도 바꿔 주거나 도와주지 않는다.
주현은 우두커니 선 채 일부러 화상 상처를 손끝으로 헤집어 통증을 일으켰다. 고통은 때로 정신을 차리게 하고 감각을 날카롭게 한다. 작게 코를 훌쩍인 주현이 날카로운 어투로 물었다.
“협회에서는 기억을 지우거나 바꾸는 게 가능합니까?”
“온갖 초능력이 있는데 그거 하나 못 하겠나?”
“협회의 이익을 위해 그 기술을 사용합니까?”
“허허,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묻지 말게.”
“……제 머릿속도 헤집어진 적 있습니까?”
노인이 우그러진 옷깃을 펴며 주현을 빤히 보았다. 크기가 다른 두 눈은 아무 감정 없는 유리알 같았다.
“알고 있는 사실을 되묻지 말라고 했지 않나.”
홀로 추측하는 것과 확실한 답을 듣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주현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협회에 대한 분노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유일하게 내 것이라 여기던 머릿속마저 타인에게 훼손당했다는 사실이 아플 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내 신경을 간지럽히던 질문이 다시 한번 휙 떠올랐다. 주현의 기억 조작이 협회에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특히나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소년에 대해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사고를 방해하려는 듯 지끈거리는 머리마저 의심스러웠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가득한 광장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 같은 기분도 들었다. 실제로 그런 곳에 엄마나 새아빠의 손을 잡고 가 본 적도 없는 주현이 그리 생각하던 때였다.
달칵. 문고리가 열리는 소리에 폭주 에스퍼의 눈이 찰나의 속도로 움직였다. 벽 한쪽에 있던 자그마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몸집이 작은 여자였다. 이마에 전선이 달린 패치를 여럿 붙인 여자는 링거대를 끌며 들어오다 주현을 보곤 멈춰 섰다.
“거기 서서 뭐 하나? 얼른 들어오게.”
“아, 저…….”
“이 폭주 에스퍼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말게나. 물거나 공격하지 않을 테니.”
주현은 사람을 개 취급하지 말라고 핀잔주지 않았다. 대신 허리를 뻣뻣하게 긴장시킨 채 약간 달아오른 눈으로 바퀴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이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는 무척 창백하고 말랐는데, 안절부절못하며 굴러가는 눈동자가 연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검은 머리를 등허리까지 기른 여인이 노인과 주현 근처에서 멈췄다.
사람이 있으니 이제는 더 물어볼 수 없게 되었다. 속으로 혀를 찬 주현이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검사는 끝났나?”
“네. 정상이래요.”
“다행이군. 자네가 잘못되면 여러모로 귀찮아지니까 말이야.”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상당히 매정한 노인이었다. 여인은 근처에 어정쩡하니 서 있었고, 주현은 은근슬쩍 발을 굴려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런데, 이분은?”
워낙 목소리가 작아서 두려움 때문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주현은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으며 말했다.
“저 괴물을 운반하러 왔습니다. 금방 돌아갈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네, 네. 저는 어, 이리아라고 합니다. 협회 소속, 에스퍼예요.”
붉은 눈이 번뜩였다. 바닥을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여인은 겁먹어서 비명이라도 질렀을 테니까.
이리아. 협회에 의해 조작된 이후로는 믿을 수 없게 되었지만, 주현은 기억력에 제법 자신 있었다. 미로 속에서 이안이 놀리듯 웃으며 했던 말은 아직도 정확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리아는 협회에서 소중하게 꼭꼭 숨겨 둔 히든카드야.’
C등급, 능력은 예언. 사냥개인 주현과는 쓰임새가 다르면서도 위치는 다를 바 없는 협회의 애완견. 그날의 일을 예언했다던 에스퍼가 눈앞의 여인이라고, 주현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협회를 생각하자 견디기 힘든 분노가 목구멍을 때렸다. 손가락을 말아 쥐며 숨을 고른 주현이 아무 감정 없는, 언뜻 선하게 느껴지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여인, 리아는 원래 그런 성정인지 불안한 듯 떨고 있었다.
“봐서 아시겠지만, 협회 소속 폭주 에스퍼 신주현이라고 합니다.”
“그, 그렇군요. 잘 부탁드려요. 폭주 에스퍼라면, 많이 힘드시겠네요.”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작고 수줍었다. 그리고 주현은 그 속에 두려움이 담기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비록 잔뜩 움츠러들었지만, 겁에 질린 사람 특유의 경직된 표정은 아니었다.
첫 만남에 폭주 에스퍼를 겁내지 않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기껏해야 이상성욕이 두려움을 이긴 가이드들, 목줄을 쥔 권력자, 차인호. 이 정도가 다였다.
문득 험하게 다뤄도 아무 탈 없는 실험 쥐 취급을 받은 게 떠올랐다. 지금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실험이 진행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급되는 가이딩 약물마저도 이제는 의심 대상이었다.
“후우…….”
당장 어쩔 수 없는 일을 깊게 생각하는 건 낭비일 뿐이다. 간신히 심호흡을 마친 주현이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아 씨는 능력이 뭡니까?”
“네?”
“제 능력은 염동력입니다. 평범하죠. 그쪽은요?”
입술을 굳게 닫고 머뭇거리던 리아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애원하듯 노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소, 소장님.”
“음? 왜 그러나?”
“저기, 제, 제 능력이 뭐냐고…… 물으시는데요.”
“자네 능력은 예언 아닌가. 스스로 제어도 못 하는 걸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나 모르겠다만.”
리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마치 당장에라도 주현이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붉은 눈과 흉악한 목줄을 보고도 겁먹지 않았던 얼굴에 드디어 두려움이 스몄다.
그거 참 멋지네요. 대단한 능력입니다. 살면서 처음 봐요. 대화의 기본은 공감이라던데, 슬프게도 현재 주현은 쓸데없는 대화를 이어 나갈 기력이 없었다. 나쁜 사람으로 보이는 데 익숙한 남자가 곧장 본론을 던졌다.
“예언 속에서 저를 본 적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