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11화
주현은 무휼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크고 아픈 까닭이었다.
‘협회의 명령, 명령은 절대적이고, 도구는 거절할 권리가…….’
—괜찮네. 그냥 들여보내게. 오늘은 잿가루 좀 묻는다고 망칠 실험이 없으니까 말이야.
있는지도 몰랐던 스피커에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두 에스퍼가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 들었고, 잠깐의 침묵이 지나갔다.
무휼은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당연하다는 듯 옆으로 비켜나 주현이 홀로 들어가는 걸 끈질기게 응시했다. 주현은 눈을 넘어 광대뼈까지 욱신거리는 듯한 통증에 먹힌 채 나아가며, 무휼에게 같이 가면 안 되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문을 넘으니 넓은 방이 나왔다. 연구원이 가득하던 방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넓을지 모르는 공간은 한 사람이 쓰는 게 맞나 의아할 정도로 정신없었다. 실험 도구로 보이는 것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구도 가득했다.
“오오, 이게 바로 불사조구먼!”
노인은 높게 쌓인 상자 너머에서 나타났다. 곧장 방어막으로 달려와 새를 들여다보는 얼굴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열망이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선 주현은 찬찬히 그를 살폈다.
새하얀 백발은 대충 손으로 넘긴 듯 뒤로 넘어가 목 근처를 맴돌았고, 얼굴 곳곳에는 주름이 있었다. 제법 정돈된 콧수염과 주현보다 몇 센티 작은 키, 호리호리한 몸매. 가장 큰 특징은 오른쪽 눈에 낀 단안경이었다.
볼록렌즈인지 유독 커 보이는 눈은 조금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만들었다. 차라리 일반적인 안경을 끼면 나을 테지만, 본인이 개의치 않다면야 상관없었다.
주현은 빠르게 온 만큼 빠르게 사라지는 두통의 잔재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능력으로 새가 든 방어막을 노인 쪽으로 약간 내밀었다.
“어디에 두면 됩니까?”
“흠흠, 부리와 발을 제외하면 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없군. 안구나 고막도 없어 보이는데 보이긴 하나?”
“어디에 두면 되냐고 물었습니다만.”
“엑스레이를 찍어 보고 싶은데 기계가 버틸지 모르겠군.”
“이봐요.”
“소화기관은 어떻게 되어 있지? 얘야, 날개 좀 펼쳐 보려무나.”
“할아버지!”
일반인이라면 덜덜 떨며 도망칠 정도로 무섭게 일그러진 폭주 에스퍼의 얼굴과 노인네의 맹한 얼굴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 크기가 심각하게 다른 노인이 의아하다는 듯 턱을 문질렀다.
“할아버지? 자네는 내 손자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할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잖습니까. 아무튼 괴물을 옮길 케이지를 주십시오.”
주현이라고 노인을 위협하거나 겁먹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불안과 두려움, 고통으로 너무나도 지쳤다. 얼른 C동으로 돌아가서 화상 입은 피부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후 이불 속으로 기어들고 싶었다.
이제 눈앞의 영감에게 불쌍한 새만 건네주면 정말로 끝나는데, 그는 쉽사리 주현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흠, 소장님이라는 호칭도 질리긴 했지. 좋다. 앞으로는 날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너에게는 허락하마.”
“할아버지고 뭐고 케이지나 달라고요.”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고 말해서 대화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주현은 지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애원하듯 노인을 바라보았다.
“케이지는 현재 제작 중이네. 이 기특한 녀석이 탈출할 수 없도록 손보는 중이지.”
“……언제 완성됩니까?”
“한 시간, 두 시간? 아니, 세 시간?”
“장난치지 마세요.”
“내가 자네에게 장난을 왜 치나? 일단 근처 아무 곳에나 앉게. 생각보다 가루가 많이 떨어지는구먼.”
아무 힘 없는 일반인과 단둘이 갇히게 된 폭주 에스퍼의 심정도 모르는 채 노인은 신이 난 듯 콧노래까지 부르며 괴물을 관찰했다.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주현은 조금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이딩 약물은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할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다. 잿가루가 묻은 흉측한 상처에 입김을 불고 있자니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그, 그건 뭔가? 학명?”
“……이름 말입니까?”
“오, 그래! 이름!”
“신주현입니다.”
주현은 언뜻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냥 노인도 아니고 치매 노인에게까지 모질게 굴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신주현? 음, 음……. 호오? 자네가 자네였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주현의 마음속에서 소장 치매 환자설이 더더욱 부상했다. 녹아내린 피부 주변을 손끝으로 꾹꾹 눌러 통증을 잡던 주현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아십니까?”
“그럼, 알고말고. 발현과 동시에 폭주한 에스퍼는 자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말이야. 나는 좀 더 해 보고 싶었는데, 실험이 폐기 처분되어서 꽤 안타까웠지.”
노인은 검붉은 눈동자가 자신에게 꽂히든 말든 관심 없어 보였다. 투명한 상자 속 괴물을 들여다보기 바쁜 노인을 뚫어지게 보던 주현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명이 필요한가? 그건 그렇고, 항상 고맙네. 자네 덕분에 진전된 연구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만.”
“생쥐는 주삿바늘에 찔리면서도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법이지.”
속뜻이 심상치 않은 말에 주현은 천천히 일어났다. 여전히 그의 몸을 뒤덮은 잿가루가 걸을 때마다 바닥에 지저분한 흔적을 남겼다.
노인의 뒤에 선 폭주 에스퍼가 능력을 사용했다.
“저에게 어떤 실험을 했습니까?”
“이 뾰족한 것 좀 치워 주지 않겠나? 이 나이가 되면 상처 회복이 느린 법이거든.”
“찔러 죽이기 전에 말해. 나한테 무슨 짓을 했어?”
날카로운 분위기 속에서 노인은 침묵했다.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는 터라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안개가 낀 듯 멍하던 머리가 맑게 개었다.
주먹에 힘을 준 채 굳게 서 있던 주현은 노인이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설령 밖에 있는 무휼이나 다른 경비를 부르는 장치라 해도 주현은 그 전에 노인의 팔을 자를 수 있었다.
“이게 뭔지 알고 있나?”
태연한 어조로 말한 노인이 내민 것은 작은 리모컨이었다. 1에서 10까지의 버튼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단출한 리모컨. 주현은 침묵했으나 노인은 대답 따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기폭 장치라네. 여기, 숫자 3이 자네의 버튼이지.”
무엇을 폭발시키는 장치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에 틀어박힌 치매 노인 또한 주현의 목줄을 잡은 이 중 하나였다. 주현은 몰아치는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해 그저 이를 악물었다.
“협박하시는 겁니까?”
“그럼 뭘로 보이나?”
노인이 돌아섰다. 씨익 웃는 입꼬리가 콧수염 아래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노인의 손가락은 3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곧장 목을 꿰뚫어도 버튼을 누르는 게 더욱 빠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현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눈앞의 늙은이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다시 질문하죠. 제가 겁먹을 것 같습니까?”
폭주 에스퍼가 웃었다. 그 미소는 가히 광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방심하는 상대를 이기는 건 쉽다. 그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가끔은 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만만한 적이라고 인식되는 순간 상대의 분위기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소름 끼칠 정도로 깜빡이지 않는 붉은 눈과 노인의 영리한 시선이 얽혀 들었다. 먼저 물러선 사람은 노인이었다.
“사실, 그래 보이지는 않는군. 삶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왜 사는 거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노인이 리모컨을 손끝에서 굴렸다. 주현은 수상한 영감이 그의 목숨을 쥐고 있다는 사실보다 어느 날 에어컨 리모컨과 착각해서 동료들의 버튼을 다 눌러 버릴까 봐 걱정이었다.
침묵 속에서 희미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이리저리 뒤섞인 터라 어디서 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주름진 얼굴을 노려보던 주현이 한 번 더 묻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끼이이이!]
“어이구, 예쁜아. 왜 심기가 불편해졌어?”
방어막 속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고, 노인은 곧장 몸을 돌려 손주를 달래듯 어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거나, 혹은 주현의 위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정답이 뭔지 알고 있는 주현이 까득, 이를 갈았다. 대답을 듣고 싶었으나 여기서 노인을 고문하는 건 좋은 작전이 아니었다. 그가 하는 말이 전부 진실일 거란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거짓 자백을 들었다가는 머릿속이 더욱 엉망이 될 테니까.
늘 그렇듯, 주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는 익숙한 무력감에 한숨을 삼키며 고개 숙였다.
잠시 후, 마침내 새가 부리를 다물자 노인이 무릎을 펴며 일어났다. 괴물과 교감하는 게 어지간히 좋았는지 입꼬리에는 뿌듯한 미소마저 매달려 있었다.
“그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냐고.”
“참, 그랬었지. 정 궁금하다면 못 알려 줄 것도 없네만.”
노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리모컨은 다시금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휘둘리는 것에 지친 주현은 근처에 있던 바퀴 달린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럼 말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게…… 아, 뭐였더라?”
“영감님…….”
남의 속도 모르고 허허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노인에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주현이 다시 이곳에 오게 될 일은, 눈앞의 노인을 만날 일은 앞으로 평생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알아야만 했다.
가슴이 부풀 정도로 크게 심호흡한 주현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시작하죠. 폐기되었다는 실험이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