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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23/161)

폭주 에스퍼 110화

초커를 힐긋 본 그녀와 주현의 눈이 맞닿았다. 여인은 손뼉까지 치며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폭주 에스퍼! 이야, 그 눈은 언제 봐도 예쁘네요. 하나밖에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혹시 여기 사인해 줄 수 있어요? 사망 후에 저한테 기증한다는 서약인데, 말 그대로 사망 후니까 살아 있을 때는 아무런-”

“임무가 있다고 했을 텐데.”

무휼의 목소리는 무겁고 싸늘했다. 그제야 조금 주춤한 연구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한편 주현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11년 전, 그를 제압해서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게 했던 남자의 이름은 ‘무휼’이었다. 발음도 어려운 게 주인과 똑 닮았다.

“이쪽으로.”

주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휼을 따라갔다. 아무래도 이곳은 협회에서 비밀리에 운영 중인 연구소인 것 같았다. 곳곳에서 가이드용 조끼를 걸친 사람과 제복을 입은 에스퍼도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건, 이곳 사람들이 무휼을 상당히 익숙해한다는 점이다. 실은 익숙하다 못해 친근해 보이기까지 했다. 쉽게 말을 걸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주현으로선 그저 두렵기만 한 남자인데.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무휼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에스퍼로서 폭주 에스퍼를 제압했고, 주현은 제압당했을 뿐이다. 그 사건 전에도 후에도 수도 없이 붙잡혀 바닥이든 테이블이든 처박혔던 주현은 이 남자에게만 유독 겁내는 자신의 나약함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게 바로 트라우마라는 걸 모르는 주현이 입술을 깨문 순간이었다.

[끼이이이!]

차단 능력이 끝난 모양인지, 괴물의 비명이 들려왔다. 죄책감으로 가슴이 따끔거렸다. 신주현은 언제나 그렇다. 언제나 일을 망쳐 버린다. 좋은 마음으로 했던 일은 지옥으로 돌아왔다.

연구원들이 눈을 빛내며 검은 천을 바라보았다. 무휼은 연구원들의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주현을 한 문으로 이끌었다.

달칵. 문이 닫히자 뒤에서 들려오던 웅성거림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밖보다 훨씬 조용한 방은 넓고, 약간 어두웠다. 조금씩 분리된 커다란 유리 벽 너머에는 주현이 게이트 너머에서 자주 보곤 하던 괴물들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괴물들이 좀 시무룩하긴 해도 크게 고통스럽거나 불쾌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을 건 사람은 갈색 스웨터를 입은 중년 남성이었는데, 까만 뿔테 안경 아래로 부드러운 미소가 보였다. 무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어쩔 수 없이 따라간 주현은 탐색하는 듯한 남자의 시선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폭주 에스퍼를 실제로 보는 건 아주 오랜만이라.”

“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글쎄요……. 안쓰럽다?”

남자가 웃었다. 주현은 자신의 꼴이 지저분하다는 걸 알고 있다. 비단 옷이나 머리카락만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피부를 덮은 흉터, 고칠 수 없는 눈. 무겁고 단단한 쇠 목줄을 찬 협회의 개. 그들이 괴물이라는 사실만 떼어 놓고 본다면 불쌍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문제는 떼어 놓고 볼 이유가 없다는 데 있다.

‘이렇게 대놓고 동정하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네.’

불쑥 치밀어 오른 분노는 갈 곳을 잃은 채 헤매다 결국 주현을 공격하고 말았다. 불쌍하니까 불쌍하다고 하지, 그럼 멋있다고 하겠어? 병신아.

“괴물은 이쪽으로 옮겨 주시면 됩니다.”

남자는 양팔로도 다 안을 수 없는 커다랗고 투명한 상자를 내밀었다. 뚜껑을 연 채 기다리고 있는 그를 잠시 응시한 주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천을 잡아당기자 거대한 공간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끼이이- 날개를 펄럭이는 불사조는 아름답게 타오르고 있었다. 노트북을 두드리던 사람과 유리 벽을 들여다보던 사람 등, 방에 있던 모두가 탄식을 흘렸다.

그러나 주현은 입을 벌리며 감탄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현실에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주현은 녀석에게서 자유를 빼앗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바랐는지 모른다. 부자의 손에 들어가서 새장 속 눈요기가 되는 것? 연구원의 실험 재료가 되는 것? 그는 불타는 새에게 반한 누군가가 그를 키우며 자유롭게 하늘을 날게 하는 걸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도 헛된 기대를 품었다. 외로움이 얼마나 아픈 감정인지 아는 주현은 곁을 맴돌던 녀석을 차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그 또한 자기만족이라는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남자가 물었고, 무휼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남몰래 침을 꿀꺽 삼킨 주현이 능력을 미세하게 조절해 아름다운 괴물을 상자로 넣기 시작했다.

작업은 아주 순조롭고 빠르게 끝났다. 부리를 제외하면 어떠한 이목구비도 없는 얼굴과 시선이 마주친 기분이었다. 탁. 남자가 뚜껑을 닫았다.

“이걸로 임무는 종료다.”

주현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다.

[끼이이!]

“으악!”

괴물의 울부짖음과 함께 남자가 상자를 놓쳤다. 바닥에 닿기 전, 능력으로 상자를 잡아챈 주현은 녹아내린 벽으로 탈출한 괴물까지 덩달아 잡고 말았다.

“이런. 저희 예상보다 더 화력이 좋네요.”

“예비용이 있나?”

“있지만 똑같은 꼴이 날 겁니다. 소장님한테 직접 가져다주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렇군. 자네는 다친 곳 없나?”

“걱정 감사하지만 없습니다.”

“협회의 중요한 자산이니 늘 조심하게.”

옆에서 이어지는 대화를 무시한 주현이 방어막 속 괴물을 들여다보았다. 나가려고 발버둥 치지도, 하물며 비명도 지르지 않는 괴물은 주현을 향해 얌전히 앉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우월감이 치솟았다. 고작해야 괴물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기뻐하는 자신이 싫었다. 정작 정말로 원하는 사람에게는 몇 번이고 거절당했으면서.

수치심과 슬픔이 갈비뼈 안쪽을 마구잡이로 돌아다녔다. 하다못해 친부모에게마저 버림받은 주제에 어째서 차인호는 그를 골라줄 거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주현은 부딪히듯 눈을 감았다. 사실 차인호는 한 번 그를 택해 준 적이 있다. 방송국 비상계단에서. 진심인지 거짓인지 아직도 헷갈리지만, 어쨌든 그는 함께 가자고 말해 주었다. 그저 일일 뿐인데 어지간히 주현이 불쌍했나 보다.

그는 자신이 후회하는지 모른다. 잠 안 오는 밤마다 그날을 생각한다. 만약 그때로 돌아가면 어떤 대답을 할까?

끝없이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는 언제나 자리를 이탈한 죄로 주현의 목에 걸린 폭탄이 터지는 것으로 끝났다. 달라지는 건 그 옆에 선 차인호의 표정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거나, 충격으로 일그러지거나, 그도 아니면 울거나.

“…….”

신주현의 죽음에 슬퍼하며 우는 차인호. 이젠 현실인지도 알 수 없는 영상 속 차인호와 공적인 일이라고 선을 그은 차인호.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머리가 아팠다. 익숙한 통증이었다.

“임무가 길어졌군. 따라와라.”

“아, 혹시 모르니까 가이딩 약물이라도 맞힐까요?”

“있다면 부탁하지. 팔을 내밀어라.”

허공을 응시하던 주현이 팔을 뻗었다. 주사기 속 액체가 정확히 뭐냐고 물을 권리조차 없는 그가 고개를 숙였다.

* * *

약물 덕인지 신체적 피로는 조금 가셨지만, 정신적 피로는 건재했다. 그냥 좁고 아늑한 침대에 누워 웅크린 채 남은 하루를 흘려보내고 싶었다.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도 바랐을지 모르나 주현은 자존심을 세우며 스스로를 속였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지키기 어려운 다짐이었다.

주현은 또다시 무휼을 따라 알 수 없는 복도를 걸었다. 밀폐되고 어지러운 복도는 공포를 극대화하기에 충분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앞에는 폭주 에스퍼를 망설임 없이 제압할 사람이 있었다.

슬쩍 바닥을 보자 불타는 새 때문에 생긴 그림자가 어지럽게 일렁였다. 검은 부츠가 그것을 짓밟았다.

“금방 끝나겠지만, 그래도 안에서 입조심하길 바란다. 그분은 예측할 수 없으니까. 괜히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무휼이 말을 꺼낸 건 보안장치가 잔뜩 달린 문 앞에 선 때였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주현이 입을 열었다.

“그분이 누구신데요?”

“연구소 소장.”

무휼의 지문과 홍채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그저 단순한 포획 임무가 어쩌다 이런 복잡한 일로 바뀌었는지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체념을 삼키며 걷던 주현은 또다시 나타난 문에 약간의 진절머리를 느꼈다.

“여기서부터는 소독 후에 들어갈 수 있다. 일단 목욕부터 하고-”

“이런 곳에서 목욕을 하라는 말입니까?”

날카롭게 쏘아진 목소리에 무휼이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탐색하듯 살피는 시선이었다. 자존심이 너무 세서 궁지에 몰리기도 전에 고양이에게 덤벼드는 쥐새끼가 애써 눈에 힘을 줬다.

“……이곳은 에스퍼에겐 집과 다름없는 A동이다. 비록 지하라고 해도 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저한테는 아닙니다만.”

“명령에 불복종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건가?”

여기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무기 하나 없는 알몸으로 태평하게 목욕할 수 있을까? 기억을 퍼즐처럼 갈아 끼우는 놈들의 소굴에서 무엇을 믿고-

“윽!”

주현은 오직 초인적인 인내심과 그의 인생을 어렵게 만드는 자존심 덕분에 바닥으로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배트로 얻어맞은 적이 있는데, 망치로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평소보다 심한 두통에 허우적거리던 주현은 애써 균형 잡으며 무휼을 바라보았다. 가늘어진 눈에는 희미한 당황이 담겨 있었다. 주현이 폭주할지 가늠하는 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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