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09화
가이딩 수치가 떨어지면 에스퍼는 다양한 부작용을 겪는다. 두통, 불안, 신경통, 오한, 발열 등. 증상도 다양하고 통증의 정도도 다르다.
C동 에스퍼는 누구나 부작용을 안고 살지만, 차인호를 만나고부터 주현의 만성적인 두통과 근육통은 상당히 호전되었다. 오늘도 가벼운 통증은 있으나 이 정도는 아프다고 말할 수준조차 되지 못했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목을 매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데, 주현도 처음에는 고통을 덜기 위해 차인호의 손을 잡았었다. 지금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키스를 조르는 에스퍼가 된 주현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집중했다.
“……가이드는 못 데려오지만, 가이딩 약물은-”
[끼이이!]
허공에 둥둥 떠 있던 검은 천 아래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능력의 지속 시간이 끝난 듯했다.
주현은 천을 걷어 불타는 새를 달래 주고 싶었으나, 그보다 에스퍼가 손을 뻗는 게 더욱 빨랐다. 두려움이 담긴 울음소리는 다시금 사라졌다. 뚝 끊기듯 사라진 목소리는 작은 방어막 안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을 터였다.
문득 실수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녀석을 두고 왔어야 했다고, 추악한 세상으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고.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입술 틈새로 얕은 숨을 뱉어 낸 그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엘리베이터에 탄 주현은 벽이 그를 향해 달려드는 기분을 느꼈다. 살면서 엘리베이터를 타 본 적은 손에 꼽았다. 어렸을 때는 기회가 없었고, 폭주한 후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수십 층을 올라가야 한다 해도 도망갈 길이 있는 계단이 훨씬 나았으므로.
머리가 먹먹해지는 기분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힐끔 옆을 보자 커다란 거울이 보였다. 그곳에 비친 주현은 그야말로 간신히 거지를 면한 꼴을 하고 있었다. 피를 머금은 듯한 눈동자가 깨지고 물때 낀 화장실 거울과는 달리 선명하게 그를 응시했다.
저 섬뜩한 색이 하나라도 없어져서 다행이라고, 멍하게 속으로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띵- 문이 열렸다.
눈앞에 펼쳐진 복도는 위층과는 달리 어두운 분위기였다. 기분 탓인지 조명도 어둡고 바닥이나 벽도 단단한 금속 재질이라 어쩐지 엘리베이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주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걷자 나타난 안내 데스크에는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키 큰 에스퍼는 그곳으로 다가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떨어진 곳에 선 주현은 뒤통수에 올라붙은 머리카락 덩어리를 진지하게 응시했다. 어떻게 머리카락 한 올 안 내려오게 묶었는지 조금 신기했다.
간단한 현실 도피는 빠르게 끝났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에스퍼는 다시금 주현을 데리고 나아갔는데, 길이 복잡하고 창문 하나 없어서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미리 말하는데, 저 안에서 폭주할 것 같으면 그 전에 자살하십시오. 중요한 게 너무나도 많아서 말입니다. 제압할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왕이면 아무것도 안 망가뜨리는 게 좋으니까요.”
주현은 목에 달린 폭탄을 보라고 말할까 하다 그냥 대충 고갯짓했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그나저나 ‘저 안’이라는 게 어딘지는 몰라도 상당히 중요한 곳인 듯했다. 물론 그러니 게이트 너머 괴물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겠지만.
좀 더 걷던 주현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떨어뜨린 남자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흰머리가 조금 섞인 검은 머리카락, 희미한 흉터, 날카로운 눈매. 주현은 그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알아볼 것이다.
열네 살의 신주현을 제압했던 남자가 코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안내하지.”
그의 팔을 잡고 무릎으로 등을 짓눌렀던 에스퍼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마치 주현이 아무 의미 없는 벌레라는 듯 무감정한 시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폭주 에스퍼를 제압했습니다.’
그 말은 아직도 꿈에 나오곤 한다. 주현의 인생이 끝났다는 걸 확정 지은 목소리를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가슴이 답답하다. 절로 어깨가 떨리며 손발 끝이 차가워진다. 전형적인 불안 증세를 숨기기 위해 주현은 잇몸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냥 제가 할게요’나 하다못해 ‘같이 가시죠’를 기대했던 주현은 그걸 무참히 걷어차 버린 남자를 남몰래 노려보았다. 쓸데없이 키만 큰 에스퍼는 약간 허리를 굽히곤 주현을 툭 밀쳤다. 돌아서는 발걸음엔 어떠한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손짓에 뒤에 붙어 있던 이들까지 멀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주현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 감시했던 주제에 너무나도 쉬운 포기였다.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보던 남자는 곧장 몸을 돌렸다. 겁먹은 개처럼 그 뒤를 따르며, 주현은 불안과 안도가 동시에 밀어닥치는 감정을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만약 폭주한다면 한 번 더 제압해 주지 않을까 하는 안도와 처참하게 짓누른 상대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불안감. 몰아치는 감정이 어떻든 두려움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물리기 전에 물기 위해서.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힘을 준 채 걷던 주현은 갑작스러운 말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11년이었나.”
복도에 다른 사람은 없으니 주현에게 하는 말이 맞았다. 11년. 남자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오래 살아남은 폭주 에스퍼는 네가 처음이다. 대부분 임무 수행 중 사망하고, 그게 아니면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나보고 죽으라는 뜻인가? 불안과 두려움에 점철된 주현의 뇌가 툭 내뱉었다. 죄책감을 느끼고 지금이라도 죽으라는 건가? 분노와 걱정이 넘실거렸다.
그런 주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위험천만한 폭주 에스퍼가 등 뒤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도 어떠한 걱정조차 없어 보였다.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서 네 손에 죽은 열세 명의 죗값을 치러라. 그중 열두 명이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였는데, 그래야 그들의 미련이라도 조금이나마 풀리지 않겠나.”
“……열두 명이, 아이?”
“흠,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기억합니다. 잊을 리가 없죠.”
그래. 눈꺼풀 안쪽에 문신처럼 남아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일깨우는 장면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남자의 말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날, 주현의 인생 최악의 밤에 죽은 사람은 열세 명이 맞다. 하지만 그중 둘은 어른이고, 나머지 열한 명이 보호소에 속해 있던 아이들이었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막내 라연과 주현까지 합해서 열두 명이고, 거기서 살인자를 빼면 열한 명이 남는다. 원장 선생님과 부원장 선생님도 더하면 열세 명이 맞는데, 어째서 남자는 다르게 말했지?
문득 주현의 머릿속으로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소년이 지나갔다. 그 아이를 넣으면 열두 명이지만, 그렇게 되면 어른 한 명이 모자라다. 스스로를 벌주기 위해 수도 없이 기억을 헤집었으니 이제 와 틀릴 리는 없다.
어떤 이유로든 소년을 잊은 게 사실이라면 모자란 숫자는 뭘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가이딩 부족과는 궤가 다른 두통이 주현을 덮쳤다. 이미 없는 눈알까지 쑤시는 듯한 통증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검은 안대 위로 손을 올리고 가만히 서서 고통을 참던 주현은 덤덤한 목소리에 슬며시 오른쪽 눈을 떴다.
남자는 한 문 앞에 서서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본 어떤 것도 밖에서 발설하지 말게. 들은 사람까지 위험해질 테니.”
그런 중요한 걸 한낱 폭주 에스퍼에게 보여 주는 이유는…….
‘그야 넌 협회의 충직하고 귀여운 사냥개니까. 너완 다른 곳에서 주인에게 예쁨 받는 애완견도 있다는 걸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어차피 평생 목줄 차고 있을 건데.’
이안의 말은 하등 틀린 게 없었다. 주현은 뭘 하든 목에 찬 무거운 목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개가 옆에 있다고 옷 갈아입는 걸 부끄러워하는 주인은 없고, 키우는 개가 들을까 봐 거짓말하는 주인도 없으므로.
손잡이조차 없는 문은 가운데부터 갈라지며 소리 없이 열렸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주현은 가만히 서서 그를 기다리는 남자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바짝 따라와라. 괜히 방해되지 말고.”
주현은 살면서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바빠 보이는 사람부터 목을 앞으로 쭉 뺀 채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 심지어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엉엉 우는 사람까지 있었다.
누구도 서로에게 관심 있어 보이지 않았다. 각자 자기 일에만 눈을 벌겋게 뜬 채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연구원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 무휼 씨! 잠깐 도와주실래요? 일손이 좀 필요해서요!”
“미안하지만 임무가 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옆에는?”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묶은 여인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주현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대놓고 훑어보았다. 불쾌한 시선에 이를 드러냈음에도 겁먹은 기색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