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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120/161)

폭주 에스퍼 107화

고작 라이터 불 하나로 두려움조차 없이 처음 본 인간을 쫓아다니는 새가 어쩐지 불쌍하게 느껴졌다. 고작 다정한 손길 하나로 목을 매며 낑낑거리는 스스로는 그저 한심하고 역겹기만 한데, 작은 생명이 그러니 동정심이 일어났다.

[휘유-]

바람 소리와 비슷한 작은 숨결이 검은 부리 틈에서 나왔다. 어떤 구조인지는 몰라도 숨을 쉬는 듯했다. 코골이와 비슷했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주현이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을 가만히 응시했다. 괴물도 동물로 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자그마한 생명이 그의 근처에서 이토록 오래 머문 건 나비 이후로 처음이었다. 주현이 싫어서 도망간 나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똑똑한 고양이.

눈앞의 괴물은 피부가 타들어 가는 걸 견디지 않는 이상 쓰다듬을 수 없다. 그걸 다행으로 생각하며, 주현은 하나밖에 없는 눈을 감았다.

다음 날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눈치 없는 괴물은 지치지도 않는지 여전히 주현을 따라다니고, 화산은 여기저기서 펑펑 터졌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어제보다는 열기를 견디는 게 쉽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주현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비어 가는 물통과 물집이 터지고 피가 흐르는 손의 상처는 분명 골칫거리였지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아니었다.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이야?”

짜증보다는 걱정이 담긴 질문에 괴물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양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 전 능력을 사용해 먼 곳으로 보내 버렸음에도 기어코 주현을 찾아 돌아온 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말로 알고 싶었다.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야 괴물, 그것도 나름대로 귀여운 괴물이 졸졸 따라다니는 걸 마다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녀석이 그에게서 멀어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주현에게 남은 시간은 앞으로 이틀밖에 없다. 그 후에도 괴물이 스토킹에 질리지 않는다면 큰일이었다.

“설마 게이트도 넘는 건 아니지?”

이대로 괴물이 아무것도 모른 채 주현을 따라 게이트를 넘었다가는 안 좋은 미래가 펼쳐질 게 뻔했다.

‘동굴 입구의 철창을 넘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에스퍼가 게이트를 관리하러 왔다가 발견하면 사살할 거야. 아니면 내 임무를 넘겨받은 누군가의 손에 잡혀 협회로 가게 되겠지.’

그야말로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 더운 곳에서 땀에 푹 전 채 고생하는 이유가 누구 때문인데.

“이거 먹고 싶어서 그래?”

최후의 수단으로 주현은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있지도 않은 괴물의 눈이 반짝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인호가 준 선물. 너무나도 소중해서 몇 번 켜지도 못한 라이터를 괴물에게 주는 건 너무나도 아까웠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차인호도 뿌듯해할 거야. 더 나은 곳에 쓰였다고 기뻐할지도.’

협회에서 관리하는 쓰레기보다야 아름답고 찬란한 생명에게 주는 게 훨씬 낫다. 그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욕심을 버리는 게 쉽지 않았다.

다시금 멍해지려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볼 안쪽을 깨문 주현이 라이터를 켰다.

괴물이 가까이 다가왔고, 폭주 에스퍼는 천천히 몸을 낮춰 바닥에 라이터를 내려놓았다. 손을 벗어난 상태에서도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이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원래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인다고들 하니까.

괴물은 날개를 펄럭이며 불꽃에 부리를 박았다. 주현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돌아섰다. 임무 실패까지는 아직 하루가 더 남아 있었다. 오늘은 조금 더 괜찮은 보금자리를 발견하길 바라며, 그는 다시 잿더미 사막을 걸었다.

“후…….”

방독면을 벗자 뜨뜻한 공기도 제법 시원하게 느껴졌다. 눈을 감고 지저분한 바람을 느끼던 주현은 갑자기 훅 끼치는 열기에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끼이-]

높고 어딘가 청아한 울음소리는 그의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세차게 타오르는 불꽃이 시야에 들어찼다.

날개를 접으며 바닥에 착륙한 불사조는 주현의 신발 앞으로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조금 그을린 은색 라이터. 주현은 손에서 푼 스카프로 조심스레 감싸 들어 올려 멍하니 라이터를 바라보았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뜨겁게 달궈진 라이터는 천 너머로도 충분한 온기를 전달했다.

“그래. 같이 가자. 그렇게 외롭다면, 좀 힘들고 아파도 사람이 잔뜩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게.”

평생을 외롭게 살았던 주현은 <동백 보호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외로움이 뭔지도 몰랐었다. 외로움은 상실에서 오는 감정이니까.

있다가 사라진 자리에는 구멍이 남는다. 가까운 미래에 차인호가 남길 구멍이 두려워 많이도 울었던 주현은 타오르는 새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새는 멀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망설이던 주현은 스카프를 손가락에 말아 조심스레 내밀었다. 까만 부리는 천 조각을 불태우지 않았다. 죄책감과 기쁨이 동시에 밀어닥쳤고, 나쁜 어른으로 자란 주현이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 * *

EE-22가 화산 지대였던 만큼 게이트를 넘자 한여름임에도 시원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를 따라온 괴물은 새로운 환경이 신기한지 연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탈수와 피로, 그리고 얕든 적든 드러난 피부 곳곳에 입은 화상 때문에 무척이나 피곤했다. 주현은 초커의 버튼을 눌러 임무가 끝났음을 알렸다. 근처에서 대기하던 직원이 도착하면 드디어 임무가 끝난다.

“일단 목욕부터 해야겠다.”

[끼이-]

“넌 하면 안 돼. 죽을걸.”

괴물은 주현과 함께 갈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직원이 올 때까지는 현실을 모르는 척한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미리 이야기했던 대기 장소에서 멍하니 앉아 푸르른 녹음을 감상하던 주현은 자동차 엔진음에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던 괴물을 방어막 안에 가두었다. 약간의 틈을 만들었으니 저번처럼 죽어 갈 걱정은 없었다.

나타난 직원은 어디 근처 호텔에서 잠이라도 자다 온 건지, 퉁퉁 부은 눈과 까치집 지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뒤통수를 벅벅 긁던 직원이 어슬렁거리며 주현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온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꽤 고생한 모양이네.”

주현도 스스로의 꼴이 썩 깨끗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늘어지게 자다 온 사람에게서 듣고 싶지는 않았다.

따질 수도 없어 미간만 찌푸린 주현은 천천히 괴물을 그가 있는 쪽으로 이동시켰다.

“어우, 저리 좀 치워. 징그러워 죽겠다.”

“……이 정도면 예쁜-”

“시끄러워. 여기에 넣기나 해.”

입을 다문 주현이 직원이 가져온 네모난 철창에 괴물을 밀어 넣었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시선을 땅에 고정하던 그때였다.

[끼이이!]

“으악!”

황급히 바라본 광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쇠로 만들어진 철장이 녹았다. 정확히는 입구의 잠금쇠가 완전히 쓸모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날아오른 괴물이 직원을 공격하려는 걸 본 주현이 곧장 방어막으로 감쌌다. 예상치도 못한 사건이었지만, 주현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속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너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옷자락에 붙은 불을 끈다고 난리가 난 직원을 보며 주현이 작게 속삭였다. 끼이- 작은 목소리가 어쩐지 기세등등했다.

겨우 불을 끈 직원은 짜증 난 티를 숨기지 않으며 철창을 건들다 결국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네. 아니, 완전히 못 쓰게 됐다니까요? 그냥 에스퍼 하나만 보내 주세요. 보안, 하……. 그렇긴 한데 다른 방법이 없잖습니까.”

대화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딱히 남의 불행에 기뻐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일이 최대한 늦어지길 바랐다. 비록 천 너머임에도 검은 부리는 무척 매끈하고 중독성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요. 저 거기까지 운전 못 합니다. 벌써 이틀째 진행 중인 임무인 거 아시잖아요.”

고생은 주현이 다하고 고작 몇 시간 운전한 게 다인 직원이 큰 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제 와 불쾌하지도 않았다.

“예? ……폭주 에스퍼를요?”

그를 지칭하는 말에 고개를 든 주현이 강렬한 눈빛으로 휴대폰을 쏘아보았으나, 당연히 너머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야 뭐.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뭔 일 나도 저는 모르는 거예요.”

전화를 끊은 직원은 고개를 돌리다 주현을 발견하곤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순순히 다가가자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새로운 임무다. 저 괴물을 A동까지 운반해라.”

그다지 어려운 임무는 아니었다. 차에 타고 A동에 가서 마중 나온 에스퍼나 직원에게 건네주면 끝나는 일이니까. 주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안이니 뭐니 하면서 염동력 에스퍼를 보낼 수 없다고 하니, 직접 건물에 들어가 전달까지 해야 한다. 그쪽 직원이 안내할 거야. 알았으면 얼른 차에 타. 피곤해 죽겠으니까.”

폭주 에스퍼는 안전상의 이유로 A동에 출입할 수 없다. 저번에는 차인호 덕에 그곳에서 며칠 동안 입원했으나, 오늘은 비상사태가 아니다. 하물며 특별히 임무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저 게이트 너머에서 납치한 괴물 한 마리가 죽어 가는 폭주 에스퍼보다 가치가 높을 뿐이다.

당연한 사실에 입안이 썼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욱 큰일이 있었다. 직접 A동에 들어가야 하다니. 꼴이 거지 뺨칠 만큼 엉망이라는 건 둘째치고 이런 대낮에, 사람이 바글거리는 A동으로, 폭주 에스퍼 신주현이.

어쩐지 최근 들어 A동에 자주 방문하는 듯했다. 재 묻은 손이 구겨진 미간을 문질렀다. 게이트를 벗어났음에도 덥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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