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16/161)

폭주 에스퍼 104화

주현은 눈을 다친 후로 자주 멍해지곤 했다. 지금도 그랬는데, 테이블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임에 따라 하나뿐인 눈동자가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단순한 무표정이 아닌, 순진해 보일 정도로 내려간 눈꼬리.

개인만 떼어 놓고 보면 일반인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는 가이드가 귀한 취급을 받는 이유는 당연 가이딩에 있다. 강대한 힘을 가진 에스퍼를 치료하고 힘을 주는 파장은 가이드에게 책임을 얹어 주었지만, 동시에 가치 또한 올라갔다.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단지 가이드라는 이유로 삶에 어떠한 지장도 없이 먹고살 수 있는 것도, 약해 빠진 몸으로 신비로운 세계에 뛰어들 수 있던 것도, 전부 가이딩 덕분이다.

그리고 신주현은 매칭 가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구적인 장애를 얻었다.

때때로 인호는 한쪽 눈을 손으로 가려 보곤 한다. 절반이 아니라 그 이상이 잘려 나간 듯 불편하고 어지러운 세상은 몇 분 버티기도 힘들었다. 그걸 앞으로 평생. 신주현은 평생 그런 세계에서 살아야 하고, 고칠 방법은 없다. 이미 아문 상처를 되돌릴 수 있는 가이드는 세상에 없으므로.

인호도 자신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일부러 가이딩을 빼먹은 게 아니고, 오지 말라고 해서 못 간 거니까. 그에게도 좌불안석인 3주였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인권을 무시하는 C동이라 해도, 이런 상처를 남길 것이라곤…….

‘정말로?’

머릿속을 스친 건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몰랐나? 아주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어?’

인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힘을 줘서 폭주 에스퍼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걸 느꼈는지 주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아.”

“전 당신한테 집중하고 있는데.”

손끝을 스치는 하얀 흉터가 매끄러웠다. 씨익 웃으며 뱉은 농담에 폭주 에스퍼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그는 미소 하나 온전히 만들지 못하는 주현의 수줍음이 조금 사랑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별것 아닙니다.”

“별것 아니면 그냥 말해 주세요.”

망설임을 담고 달싹이던 입술 사이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저희…… 어디서 만난 적 있습니까?”

까칠한 태도를 고수하던 남자답지 않게 기죽은 목소리였다. 인호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연기하며 살아온 인생이 너무나도 길기 때문이다.

“매주 만나고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 좀 더 전에, 매칭하기 전에요.”

조금 정신이 돌아왔는지 아까보다 또렷하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날카롭게 꽂히는 눈동자에는 어느새 빛이 담겨 있었다.

이제야 신주현다웠다. 늘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신주현. 절벽 끝에 선 인호가 의도적으로 사고를 돌렸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가고, 가이드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토할 것 같았다.

인호는 경련하듯 움찔거리는 입매를 손으로 숨기며 눈가를 접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질문의 답을 질문으로 돌려주면 안 되죠.”

“저는 무조건 대답하겠다고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요.”

노려보는 눈은 하나밖에 없음에도 기세를 잃지 않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곧바로 주저앉아 덜덜 떨지 않을까 싶을 만큼 살벌한 시선이었다.

그는 전부터 그랬다. 마치 천하에 둘도 없는 원수라는 듯 원망을 담아 노려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무척 강한 신주현은 매달릴 바엔 손해 보고 사는 걸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구부러지기보단 부러지는 게 어울리는 남자는 됐다고 외치는 대신 어깨를 약간 내리며 중얼거렸다.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요.”

골골거리다가도 할퀴는 고양이처럼 변덕스러운 신주현은 이번에도 그랬다. 발톱을 숨긴 고양이는 그저 따뜻하고 부드러운 덩어리일 뿐이다. 그 차이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인호가 부드럽게 물었다.

“어디가 닮았는데요?”

“그냥, 전체적으로.”

“그런 대답이 어딨어요?”

“저도 잘 모르겠으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아무튼 그래서 만난 적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금만 밀쳐져도 궁지에 몰린 것처럼 반응하는 주현이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미 인호는 따뜻하고 보송한 털을 매만진 후라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만난 적 있냐고?’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따라가다간 그동안 쌓아 올린 무언가가 무너질 거란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차인호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웃었다. 웃으며, 허리를 곧게 세우고, 덩그러니 놓인 침대를 가리켰다.

“아직 가이딩 부족하죠? 제대로 일할 테니까 저기로 가요.”

“…….”

“피곤해서 그래요. 서로 좋은 일일 것 같은데. 네?”

뚝 끊긴 긴장감, 혹은 그어진 선. 그 너머에서 고요한 얼굴로 침묵하던 주현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침대로 향하는 뒷모습은 느릿했는데, 한순간 조금 비틀거렸다. 다리를 다친 모양이다.

안 다친 척 내내 입 다물고 있던 그를 떠올리고 약간의 분노를 삼킨 인호도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갔다. 신주현은 이불조차 없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사방에 가시를 두른 주제에 이럴 때는 또 얌전하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인호도 신발을 벗고 매트리스 위로 기어 올라갔다.

“……뭐 하는 겁니까?”

“가이딩하는 중이잖아요.”

품에 꽉 끌어안긴 폭주 에스퍼가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무시하고 가만히 있자니 이내 포기했는지 얌전해졌다. 위험하다고 소문난 괴물을 안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 단단하고, 따뜻하며, 품에 가득 차게 안기는 몸은 포옹이 어색한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그게 또 불쌍하게 느껴졌다. 솔직하게 말하면 자존심 센 신주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품에서 벗어나려 난동 부릴 것이다.

품 안의 온기를 곱씹으며 피식 웃은 인호가 눈을 감았다.

“저기요. 차인호 씨.”

“…….”

“설마 잠들었어요?”

약간 고개를 숙이자 희미한 담배 냄새와 싸구려 섬유 유연제 향이 뒤섞여 부드럽게 콧속을 누볐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이런 냄새가 날 거라고 확신하며, 인호가 잠버릇인 척 주현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매칭 에스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천천히 손을 뻗어 인호의 허리께에 팔을 걸쳤을 뿐이었다. 포옹조차 아닌 작은 움직임은 그 와중에도 불편해서 그랬다고 변명하는 것처럼 가벼웠는데, 떨림까지는 차마 숨기지 못했다.

“풋, 아하하…….”

“아니, 자는, 자는 척은 왜-”

웃음을 터뜨린 인호가 번쩍 눈을 떴다. 당황해서 커진 붉은 눈동자는 이내 일그러졌고, 인호는 주현이 벗어나기 전에 뺨을 감싸고 곧바로 입술을 겹쳤다.

얽히는 혀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또 조금은 달콤했다. 흘러 들어가는 가이딩 때문인지 얌전해진 신주현은 가만히 키스를 받아들였다.

잠시 입술이 떨어졌고, 마주친 시선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망설이던 인호는 다시금 입술을 내렸다.

‘혹시 저희…… 어디서 만난 적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