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03화
인호는 그저 흔해 빠진 가이드일 뿐이다. 기헌은 그런 인호를 오랜 시간 최측근에 두고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인생을 걷게 했다. 그것을 몇몇 이가 편애라고 외쳤다. 같은 반란군이건만 차인호만이 손을 더럽히지 않으며 편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까득, 인호는 눈을 찡그리며 이를 갈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주먹 마디가 욱신거렸다. 그럼에도 힘이 빠지지는 않았다.
‘진짜로 편애했다면 부탁을 들어줬겠지.’
단 한 사람. 수많은 사람 중에서 딱 한 명만 구원해 주면 안 되냐는 서글프고 이기적인 소망은 단번에 거절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촉이 좋은 C동 부소장에게 괜한 의심을 사면 안 되니까.
‘계획이 망가지면 그 폭주 에스퍼 한 명 때문에 수천 명이 고통받을지도 모른다. 책임질 수 있어?’
정말 분하게도 그 순간 인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살아 숨 쉬며 이곳에 있는 이유는 오직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다. 추악하게라도 목숨을 건진 이유는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서니까. 그렇게 하기로 죽은 친구에게 맹세했다.
그걸 개인적인 욕망으로 그르칠 수는 없었다. 영웅 콤플렉스에 절어서가 아니다. 그의 목숨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처투성이 피부, 영원히 빛을 잃어버린 눈. 세뇌당한 게 분명한 신주현. 빌어먹을 신주현. 살아남을 생각이 있긴 한 건지 알 수 없는 신주현.
쿵, 쿵!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에스퍼를 넘을 수 없는 부드러운 주먹이 몇 번이고 벽을 때렸다. 둔한 통증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러면 되는데.”
반란군은 힘을 발현한 순간, 꿈이나 원하는 미래를 빼앗긴 채 오직 협회의 장기 말로 살아야 하는 에스퍼를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반란이 성공하고 협회가 무너진다면, 분명 폭주 에스퍼 또한 목줄을 벗게 될 것이다. 물론 위험성 때문에 완전히 풀어 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마구잡이로 굴려지지는 않을 터다.
계획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호는 아무리 늦어도 5년 안에 반란이 마무리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굳건히 뿌리박힌 조직을 확실하게 무너뜨리는 것이다 보니 이조차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다만…… 11년의 세월 동안 미래를 꿈꿀 의지와 삶에 대한 애착을 잃어버린 신주현이 5년 후에는 무엇을 더 잃겠냐고. 그게 무서워서 주제넘게 빌었다. 단 한 명만 지금 구원해 달라고.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봐?”
등 뒤에서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창문조차 없는 방인데, 인호가 이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음습한 놈 같으니.’
인호는 주먹을 내리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얼굴로 부스스한 머리를 뒤로 넘기고 안경을 쓴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걱정 고마워. 그런데 안 좋은 일이라니?”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그리고 아닌 척할 거면 주먹에 피부터 지우고 하지 그래.”
흘긋 확인한 주먹은 벌써 푸르게 멍이 들었고, 까진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호는 당장 내일 있을 촬영을 걱정하며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남자, 성율은 늘 그렇듯 슬며시 웃으며 은근히 인호를 노려보았다. 가늘어진 눈은 미소보다는 위협에 가까웠다. 그걸 물끄러미 마주 보던 인호가 생긋 웃었다.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도둑처럼 방에 몰래 들어올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가 나길래 확인하러 온 것뿐이야. 그리고 내 관심은 너한테 달렸지. 네가 사적인 감정으로 움직이는 이상, 계속 관심 많을 예정이거든.”
“내 사적인 감정이 뭐길래?”
“몰라서 물어?”
두 사람 사이로 굳은 공기가 지나갔다.
인호가 폭주 에스퍼와 매칭한 건 그야말로 충동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이었다. 그가 가이드라는 사실을 들켰다는 걸 안 순간, 반란군은 매칭하면 유용할 에스퍼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반란군에 소속된 스파이라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에스퍼, 그리고 협회 소속으로 친해지면 큰 도움이 될 에스퍼. 둘 중 누구와 매칭시킬지 뜨거운 토론이 이어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인호가 매칭한 에스퍼는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폭주 에스퍼는 유용하긴커녕 논란을 잠재우느라 큰 시간과 돈을 소모해야 했다. 후에는 기헌에게서 폭주 에스퍼라도 쓸 만한 곳이 있다며 괜찮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멋대로 한 결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미소를 지운 성율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러곤 텔레포트라는 유용하기 짝이 없는 능력을 가졌으면서 일부러 어깨를 치며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가짜 주제에.”
열린 문이 닫히기 직전, 자그마한 목소리가 인호의 귀를 또렷하게 스쳤다. 홀로 남은 인호는 잠시 멍든 손가락을 응시했다.
묵은 감정에서는 쓴맛이 났다. 그는 신주현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과거에서 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만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신주현이 살아남았다는 걸 알았을 때, 인호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원망했다가, 저주했다가, 이내 그 애를 불쌍하게 여겼다. 그리고 결국에는 차라리 다 잊고 잘살고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신주현은 그러지 못했다. 잘살기는커녕 비참하고 안타깝고 인간답지도 못하게, 인호의 생각보다 훨씬 큰 벌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라, 아……. 라연이가, 생각나서.’
움푹 들어간 왼쪽 눈꺼풀을 떨며 속삭이던 주현을 본 순간, 인호는 그야말로 콱 죽고 싶어졌었다. 이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기를 내내 등에 업고 있었을 신주현이 답답해서 그랬고, 속이 쓰려서 그랬다.
“젠장…….”
에스퍼로서 불합리한 상황을 겪은 이가 많이 있는 반란군에서 이유 없이 수장의 편애를 받는 가이드 나부랭이는 설 곳이 많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편이 되어 주던 해산이 죽어서 분위기가 더욱 나빠졌다.
하지만 만들어진 스타라고 해도 인호가 반란군에 큰돈을 벌어 주는 건 사실이다. 외에도 인맥과 이미지 메이킹 등, 유용한 구석이 많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다.
인호를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은 주로 수장인 기헌에게 헌신하는 이들이었다. 반란군은 숨겨진 조직이고, 보통 급박한 상황에서 스카우트로 들어온다. 그 과정에서 기헌에게 은혜를 입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비록 미움받고 있다 해도 인호는 그들의 감정과 충성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니까.’
후- 인호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 도움 되는 일을 해야 한다. 더욱 헌신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
그리고 신주현은 이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무시하고 인호를 홀린다. 가장 끔찍한 점은 본인에겐 어떠한 의도도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자각조차 없다. 단지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똑같은 수법에 당하는 나도 할 말은 없지만…….”
벽에 등을 기대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인호는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얼굴에는 고뇌도, 두려움도, 피로도,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 * *
C동에 가는 날에는 항상 아침부터 바쁘다.
다른 일 다 제쳐 두고 이동 시간만 편도로 한 시간이 훌쩍 넘어서 여유 시간을 길게 잡아야 했다. 그 외에도 신경 쓸 게 무척 많은데, 그래도 인호는 C동으로 가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가끔은 싫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진심으로 가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철조망을 지나 건물 앞에 차를 세운 인호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리고 이제는 출입증 검사조차 하지 않는 1층 데스크 직원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자 늘 그렇듯 만면의 미소가 돌아왔다.
C동 가이딩 룸은 황량하고, 칙칙하고, 쓸데없이 넓다. 듣기로는 다른 가이딩 룸도 몇 개 있다는데, 그는 언제나 한곳으로 안내되었다.
‘신주현은 다른 방에 가 본 적 있을까?’
문득 떠오른 질문에 허탈한 미소를 흘린 순간이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폭주 에스퍼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고, 그 사이로 어두운 루비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친 눈은 하나뿐이다. 검은 안대를 잠시 응시하던 인호가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주현 씨. 일주일 만이네요.”
무뚝뚝한 신주현은 고개를 까딱이곤 노란색 소파에 앉았다. 갈색 쿠션을 품에 안는 손가락에는 못 보던 상처가 있었다. 그걸 신경 쓰며, 인호가 입을 열었다.
“올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온통 회색뿐이니까 너무 칙칙하지 않아요? 건물에 페인트칠이라도 해 달라고 할까 봐요. 화사한 색으로.”
“……그거 누가 칠할 것 같습니까?”
보안상 일반인에게 철저히 숨겨진 C동에 업자가 드나들 수 있을 리가 없다. 전기나 수도 등,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폭주 에스퍼에게 시킬 게 분명했다.
옷과 볼에 알록달록한 페인트를 묻힌 채 롤러를 미는 신주현. 보고 싶은 장면이지만, 괜한 고생을 시킬 정도로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농담이었어요. 수치 많이 떨어졌죠? 일단 손부터 주세요.”
조금 느리게 뻗어진 손을 붙잡고 상처 주변을 쓰다듬자 조금씩 아물어 가는 게 보였다. 짧게 깎인 손톱을 매만지던 인호가 주현을 힐끗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