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02화
“구름도 적고, 바람도 잔잔하고. 오늘 날씨가 참 좋아. 그렇지?”
“그렇네요.”
“너를 주운 날도 이런 날씨였는데 말이야.”
남자가 돌아섰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에 한줄기 지나가는 흰머리가 우아한 중년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인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살아 있나 의문이 들 정도로 엉망이 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왔는데요.”
“그렇지, 참. 이리 와 보렴.”
말을 끊으며 불쑥 끼어들었음에도 조금도 개의치 않은 남자, 기헌이 가볍게 손짓했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그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인호에게 내밀었다.
“이건…….”
“해산의 유품이지.”
눈을 크게 뜬 인호가 망가진 USB를 조심스레 살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부서진 탓에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발견했을 때부터 그 상태였다는군. 안에 담긴 정보만 있었다면 우리의 염원을 이뤘을 텐데. 정말 아쉬워.”
“고칠 방법은 없나요?”
“여러 번 시도했지만, 안타깝게도.”
기헌이 착잡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떤 마음으로 고장 난 유품을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손끝으로 부러진 플라스틱을 매만지던 인호는 해산을 떠올렸다. 유쾌하고 속이 넓은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형처럼 따랐던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인호는 오래도록 슬퍼했다.
“사실 이 말을 하러 부른 건데, 너무 충격받지 않길 바라마.”
슬쩍 바라본 기헌은 눈썹을 내린 채 입꼬리를 올린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좋은 사람이고, 실제로 옳은 일을 함에도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렇듯 모순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리라.
은인에게 불온한 마음을 품었다는 죄책감은 뒤이어 들려온 기헌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증발했다.
“이 USB는 폭주 에스퍼의 방에서 발견되었어. 누구의 방이었는지까진 알아내지 못했지만…….”
폭주 에스퍼. 내내 일정하게 유지되던 인호의 표정이 한순간 무너져 내렸다.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기헌의 말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내부 조사 결과 협회에 넘긴 건 아닌 것 같다만, 애초에 망가졌으니 넘겼다고 해도 정보가 빠져나가지는 않았겠지. 제법 큰 노력으로 얻은 건데도 결과가 이 모양이라 유감이야.”
“……혹시 무슨 오해가-”
“내가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를 잘난 듯이 떠들어 댈 거라 생각하나?”
인호는 입을 다물었다. 해산의 유품을 가지고 있던 폭주 에스퍼. 그 말은 결국 해산을 죽인 사람 또한 폭주 에스퍼라는 뜻이다.
나쁜 건 폭주 에스퍼가 아니라 일을 시킨 상부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분노를 쉽사리 잠재울 수는 없었다. 동료를 살해한 이와 만났을 때 용서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인호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폭주 에스퍼라는 말을 들으면 곧장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신주현. 새까만 머리카락, 붉은 눈, 흉터투성이, 예쁜 말 한 번 할 줄 모르는 애연가. 눈을 덮은 안대를 잠시 생각하던 인호는 주현의 동료를 떠올려 보았다. 서류에 적힌 정보는 알아도 실제로 만나 대화해 본 적은 없으니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른다.
묵묵히 USB를 만지작거리던 인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거 가져도 됩니까?”
“마음대로 해. 어차피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니까.”
해산이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정보를 쓰레기 취급하지 말라고 따져 봤자 기헌은 생각을 바꾸지 않을 터. 의미 없는 일에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제가 뭘 하면 되죠?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면 됩니까?”
“아니. 들쑤시다가 괜히 의심받으면 행동에 제약이 생겨. 그냥 하던 대로 해.”
“……알겠습니다.”
USB를 주머니에 넣고 가벼운 묵례 후 문을 향해 걷던 인호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슬쩍 돌아섰다. 기헌은 눈가에 주름이 질 정도로 활짝 웃고 있었다.
“내 부하들 모두 다 귀엽지만, 그중에서도 인호 너를 가장 아낀다. 알고 있지?”
“……네, 선생님.”
기름칠이 잘된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인호가 돌아섰다.
인호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바닥을 보며 걷다 모퉁이 너머에서 불쑥 튀어나온 사람에 황급히 멈춰 섰다.
“차인호? 네가 본부에는 어쩐 일이야?”
“선, 사장님이 불러서.”
“또 너한테만 비밀 임무 맡기셨어? 편애가 심하다니까.”
“그런 거 아니야.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해?”
인호의 질문에 혜음이 어깨를 으쓱였다. 높이 묶인 검은 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김성율 잔소리 피해서 그냥 돌아다니고 있었지.”
“또 무슨 짓을 했길래?”
“이번엔 나도 진짜 억울해. 그냥 댓글 하나 달았을 뿐인데 보안이 어쩌고저쩌고, 들키고 싶냐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난리를 치더라니까?”
깐깐한 구석이 있는 성율이지만 단순한 댓글 하나로 구박하지는 않을 텐데. 인호의 의문을 알아챘는지, 혜음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영상 하나를 보여 주었다.
차분한 시선으로 화면을 보던 인호의 눈이 한순간 커졌으나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한 그는 영상에 집중했다. 한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린 폭주 에스퍼는 조금 멍해 보였다.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변화였지만, 인호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매칭 에스퍼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빛이 또렷해졌다. 임무에 관한 부분은 모조리 잘려 중간중간 뚝뚝 끊어지는 영상은 결국 알 수 없는 액체를 뒤집어쓴 주현과 웬 B급 에스퍼를 비추며 끝났다.
“근데 눈은 언제 다쳤대? 뭐, 폭주 에스퍼니까 어디서 또 거지같이 굴렀겠지. 꼴좋다.”
미로에서 주현 때문에 SS급 가이드를 데려오지 못했다고 며칠을 아까워했던 혜음은 여전히 그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는 듯했다. 영상 속, 하나밖에 없는 붉은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인호가 입을 열었다.
“뭐라고 댓글 달았는데?”
“아, 지금은 김성율이 지워서 없어.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네. 그냥 폭주 에스퍼 못생겼다고 썼을 뿐인데!”
생각보다 더 보잘것없는 댓글이었다. 툴툴거리던 혜음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자리에 없는 사람을 마구 욕하기 시작했다.
“악플로 신고 먹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고 얼마나 따지던지, 어휴. 폭주 에스퍼가 뭘 어떻게 신고한다고.”
“……신고는 안 하겠지만 그렇다고 없는 말을 퍼뜨릴 필요는 없잖아.”
“없는 말?”
몇 번 단어를 입안에서 굴리던 혜음이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걔가 잘생긴 건 아니잖아?”
“객관적으로 말해서 잘생긴 편이지. 다시 말하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야, 차인호. 잘생겼다고 말하기엔 눈이 너무 사납잖아. 웃을 때도 그렇고, 난 무슨 들짐승이랑 싸우는 줄 알았다고. 미남이라는 건 좀 더, 엉? 나긋나긋한 맛이 있어야지. 안경이라도 쓰든가.”
나긋나긋한 인상의 안경 쓴 남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혜음의 댓글을 지우게 한 이를 잠시 생각하던 인호는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잘생겼대도 자기 머리에 휘발유 들이붓는 거에서 아웃이야.”
혜음은 다시금 그 장면을 떠올렸는지 어깨를 손으로 감싸곤 바르르 떨었다. 비록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워낙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마치 본 것처럼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었다. 그때도 신주현은 쥐를 잡은 고양이처럼 웃고 있었을까? 죽음을 본인 손으로 잡아채 놓고도?
“뭐 그런 또라이가 다 있냐? 너도 조심해. 무슨 임무 때문에 폭주 에스퍼랑 매칭했는지는 몰라도 멀쩡한 놈은 아닌 것 같으니까.”
“……멀쩡한 놈이었으면 애초에 매칭도 안 했지.”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사실 인호는 신주현이 그럭저럭 괜찮게 지내고 있을 줄 알았다. 어느 정도 제약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그 정도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개처럼 목줄을 차고 작은 버튼 하나에 피 흘리며 사슬에 묶여 끌려가던 그는 그 상황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드러난 피부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검붉은 눈동자는 어떠한 기대나 희망도 담고 있지 않았다. 자기 팔에 담배를 지지면서 끝까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양 어리둥절해하던 얼굴이…….
“참, 그런데 다솔 언니랑 스캔들 그만둔 이유가 뭐야? 개인 사정이라고만 하고 뭐 말을 안 해. 그거 이득 장난 아니었을 거라고 아직도 윤건 삼촌이 아까워하는데.”
“아, 미안한데 내가 좀 바빠서.”
“또 어물쩍 넘어가려고? 언니는 네 개인사라며 아무것도 말 안 해 준단 말이야! 그것 때문에 내 일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아? 나도 알 권리가 있어!”
기어코 답을 듣겠다고 다짐했는지, 혜음은 능력을 써서 복도의 벽을 움직여 인호를 가두었다. 잠시 앳된 얼굴을 바라보던 인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한참이나 말을 고르고는 웃는 건지 아닌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삐졌거든.”
“뭐? 누가? 너 사귀는 사람 있었어?”
“아니. 짝사랑.”
“……그 사람이 널 짝사랑한다는 거야, 아니면 네가 짝사랑한다는 거야?”
인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생긋 웃고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가이딩을 퍼부었을 뿐이다. 흐물흐물해진 혜음이 순간 능력을 풀었고, 인호는 익숙한 솜씨로 일그러진 벽을 뛰어넘었다. 잠시 쫓아오는 듯했던 혜음은 금방 포기했는지 더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좀 더 걷던 인호는 주변을 살피곤 가까이 있던 방으로 들어섰다. 먼지 한 톨 없이 관리되고 있지만, 사용감은 거의 없는 작은 응접실이었다.
그제야 마음껏 한숨을 내쉰 인호가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그나마 친하다고 할 수 있는 혜음이라 장난스럽게 묻고 넘어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반란군 내부에서 인호의 위치는 아슬아슬했다. 정확히는 그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원인은 다양했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가 반란군 수장의 ‘편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