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11/161)

폭주 에스퍼 100화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작은 속삭임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힘없이 흘러나왔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바꾸지 못할 사실이었다. 돌아가 봤자 어쩌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다 다시 이 길을 걷게 될 거고, 최악의 경우 같이 잡아먹힌다. 대단한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터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세간의 관심을 받는 주현이 사망한 임무에 찬휘가 동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많은 시선을 받을 게 분명하다. 사건의 전말이라도 알려 달라고 매달릴 사람들이 벌써 눈에 선했다.

‘방송에 나가 눈물 몇 방울 흘리며 아주 고된 임무였다고 말하면 돼.’

그러면서 주현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다는 말도 덧붙이면, 욕은 좀 먹겠으나 그도 노력했다는 동정표를 얻을 수 있다. 완벽한 계획이다. 단순히 폭주 에스퍼와 함께 임무했다는 걸로는 얻을 수 없는 관심이 손에 들어올 것이다.

“…….”

하지만 찬휘는 게이트를 향해 걷지 않았다. 그저 두 발이 땅에 붙기라도 한 듯 우뚝 서서 바위를 뒤덮은 분홍색 이끼를 노려볼 뿐이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따라오는 카메라가 여전히 허공을 날며 찬휘를 찍었다.

입으로 숨을 내쉬며 굳어 있던 그가 고개 들어 동그란 렌즈를 바라보았다.

‘약한 주제에 자존심은 세고, 사람은 싫지만 사랑받고는 싶고.’

다시 생각해도 열받는 목소리다. 폭주 에스퍼 주제에 잘난 듯이 떠드는 것도, 처음 만났으면서 그의 속내 따위 뻔하다는 태도도, 전부 싫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싫은 건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젠장!”

뒤로 돈 찬휘가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게 바보 같은 선택이다. 소중한 친구나 가족도 아니고, 오늘 처음 만난 폭주 에스퍼를 구하기 위해 홀로 뛰어가다니.

차라리 게이트로 나가서 지원을 부르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은 날려 버렸다. 그러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가서 뭐 할 건데? 죽으면 어쩔 건데?’

최소한 동정표가 아니라 장찬휘가 그래도 자기밖에 모르는 찌질이는 아니라는 시선을 받겠지. 최소한 그 폭주 에스퍼가 나를 다르게 봐주겠지.

“최소한 멋지게 죽었다는 소리는 들을 수 있겠지!”

푸드덕- 이름 모를 괴물이 날개를 펼치며 날아갔다. 넝쿨에 걸려 넘어진 찬휘가 벌떡 일어났다. 그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 * *

주현은 한참 만에야 이곳이 꿈속도 아니고 저승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가 컴퓨터 파일을 열어 보듯 머릿속을 뒤적이는 건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으나, 쏟아지는 기억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스스로는 떠올리려 해도 불가능한 신생아 때의 기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새아빠와 만나기 전인지, 주현과 엄마 둘만이 함께 있는 집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엄마는 사진을 들고 하루 종일 울거나 멍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주현은 울다 지쳐 자기를 반복했는데, 놀랍게도 아주 가끔 엄마는 그의 기저귀를 갈아 주고 젖병을 물려 주었다.

주린 배가 채워지는 감각에 흠뻑 젖은 아기는 필사적으로 분유를 빨았다. 엄마의 품이 어땠는지 생각하기에는 눈앞의 식사에 대한 감정이 너무 컸다.

주현은 무언가가 볼에 닿는 느낌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인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지금 겪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생생해서 자꾸만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아기의 뺨에 떨어진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낸 여인이 말없이 젖병을 고쳐 쥐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새아빠가 집에 오고, 주현이 자라났다. 이때부터는 주현도 기억하고 있는 나날이었다.

그 사람을 돌려 달라고 엄마가 소리치고, 주현은 울고, 엄마도 울고. 눈물보다는 분노가 훨씬 쉽고 나았던 주현이 엄마에게 대들고, 또다시 멍이 늘고. 끝없는 반복이었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결국 마지막 옷자락까지 엉망으로 만들었다.

트라우마를 다시 반복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새아빠는 무섭고 엄마는 불편했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에 묘한 기분이 든 것도 잠시, 이어질 이별을 알기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흘러간 기억은 마지막으로 나비를 쓰다듬은 날까지 닿았다. 그 이후 어떻게 될지 아는 주현은 필사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머릿속이 헤집어지고 있는 탓인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그만해. 더 이상 끄집어내지 마.’

물론 사냥감의 사정 따위 고려하지 않는 괴물은 멈추지 않았다. 주현은 소매치기와 도둑질로 연명하다 경찰에게 붙잡혔다. 아빠를 죽여서 죄송합니다. 차마 뱉지 못한 말을 끝으로, 그는 <동백 보호소>에 가게 되었다.

“…….”

미약한 움직임이 멈췄다. 꿈과는 다른 생생한 얼굴들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에스퍼의 능력으로 본 가짜와는 차원이 다른 현실감이 있었다. 어린 얼굴들이 지나가고, 마침내 주현은 홍연우와 만났다. 지금 보니 얼굴과 온몸을 뒤덮은 붕대가 더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비 오는 날이 아니면 아픈 티조차 잘 내지 않는 소년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운 어린 주현 옆에서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그도 이제야 중학교에 다닐 어린 나이였다.

붕대 틈새로 보이는 눈이 화사하게 접혔다. 장밋빛 입술이 휘어지고, 그 미소에 열네 살의 신주현은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좀 더 냉정하게 상황을 볼 수 있게 된 스물다섯 살의 신주현은 순간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무척 사소했으나 임무에서 사소한 거슬림은 반드시 큰 고난이 되어 돌아온다. 주현은 가슴의 통증을 무시하며 사랑스러운 미소에 집중했다.

조각난 장면을 마음대로 이어 붙인 꿈이 아닌, 뇌 깊숙이 묻힌 기억을 끌어낸 터라 모든 장면이 생생했다.

행복한 시간이 지나고, <동백 보호소>에 또 다른 아이가 입소했다. 그 아이는 키가 커서 또래에 비해 작은 주현과 나란히 서면 그를 훨씬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너 내 옆에 오지 마.]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주현이 쏘아붙였다. 어딘가 불퉁한 표정을 짓던 소년은 이내 씨익 웃으며 주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에 화가 난 주현이 연우에게 달려가 그의 뒤로 숨었다.

자신이 저렇게 유치했나, 하는 생각보다 먼저 든 것은 저 아이는 누구냐는 의문이었다. 주현은 그를 본 기억이 없었다. 갈색 머리, 아니, 검은색? 분명 눈앞에 있음에도 외모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치 가면을 덮어쓰기라도 한 듯 보이지 않는 얼굴인데도 미소만은 선명했다. 인식조차 되지 않음에도 그 미소에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주현이는 성장기니까 훨씬 더 많이 클 거야.]

연우의 말에 주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누구인지 모를 소년은 성큼 다가와 풀밭에 드러누웠다.

[자기는 아닌 것처럼 말하네. 이 난쟁이가 컸을 땐 너도나도 훨씬 더 자랐겠지.]

[너처럼 못된 사람은 더 크지도 않을걸?]

[이게 형한테 너?]

달려든 소년에게 간지럽혀지던 주현은 결국 연우가 구해 주고 나서야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괜찮냐며 등을 문질러 주는 손길에 기대어 거칠게 숨 쉬던 주현이 넘어지듯 잔디 위로 누웠다. 하늘이 새파랬다.

시린 눈을 감자 누군가가 이마를 쓰다듬곤 코끝을 톡 건드렸다.

이윽고 장면이 바뀌었다. 2층 침대에 웅크린 채 울던 주현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연우를 보고 더욱 작게 몸을 말았다. 말없이 주현의 옆에 앉아 가만히 침묵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울지 마.]

애초에 눈물이 많지 않은 주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들 앞에서 울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한 아이라 쉽사리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다.

벌겋게 달아오른 어린 얼굴이 붕대로 뒤덮인 연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내내 선명하던 시야가 흐려지더니 아마추어가 그린 추상화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짧게 뚝뚝 끊어지는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여름과 겨울이 동시에 느껴졌고, 낮과 밤이 난잡하게 뒤엉켰다. 정적은 수십 명의 말소리와 함께 왔고, 견디지 못한 주현이 눈을 감았다.

애초에 눈을 뜨고 있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건만, 마치 스위치를 내린 듯이 마구잡이로 흘러가던 기억이 뚝 끊겼다. 새카만 침묵이 이어졌다. 얕고 가쁜 숨소리만 들리던 귀로 희미한 목소리가 스쳤다.

[주현아, 난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혼란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두려움과 체념, 불안이 한꺼번에 담겨 있었다. 혼잣말과 다름없는 속삭임은 무척 작고 여려서, 주현도 간신히 들었다.

눈을 뜨자 양쪽 다 선명히 보이는 시야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크고 작은지, 덧니가 있는지 없는지, 하다못해 눈동자 색조차 인지할 수 없었음에도 그가 홍연우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았다.

[……그냥, 손이나 잡아 줘.]

어린 주현은 큰 용기를 내어 말했다. 사실 이때 주현은 포옹을 원했었다. 그러나 그걸 말하기엔 부끄러워서 악수로 대신했다는 게 불쑥 떠올랐다.

투두둑, 빗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도 비가 왔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과거이건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눈앞에는 다시금 홍연우가 나타났다. 알 수 없는 소년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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