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99화
두어 번 더 공격하려 주변을 맴도는 녀석을 능력으로 밀어내니 이내 포기했는지 순순히 멀어졌다.
“아, 진짜!”
여전히 주저앉은 채로 찬휘가 소리쳤다. 하필이면 진흙으로 넘어져 그의 옷이 온통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손도 얼굴도 더러워진 그가 주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거 어쩔 거야?”
“반말을 하든가 존댓말을 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해.”
“이거 어쩔 거냐고! 협찬받은 거라 더럽히면 안 된단 말이야!”
“더러워지는 게 싫었으면 게이트를 넘지 말았어야지.”
주현에게 겁먹은 게 확실한데도 찬휘는 당연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믿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카메라? 부서지면 끝이다.
아니면 폭주 에스퍼인 주현이 정말로 자신을 해치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 있는 걸까. 주현의 1순위는 임무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찬휘는 그걸 모른다. 즉, 그의 허세는 다른 곳에서 나오고 있다는 말이다.
“…….”
원인이 무엇인지 대충 눈치챈 주현은 가만히 찬휘를 내려다보았다. 스물네 살의 B급 에스퍼. 능력은 간단히 말해 부유. 전투에 활용하기는 어려워도 그가 보기에는 상당히 쓸 만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가 수행했다는 임무는 하나같이 C, D등급 에스퍼나 받을 쉬운 것들 뿐이었다. 주현은 연예계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그와 비슷한 에스퍼를 떠올렸다.
‘윤가람과 장찬휘의 차이점은 오직 등급뿐인가?’
아니, 주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벌떡 일어나 투덜거리며 옷에 묻은 진흙을 털어 내던 찬휘는 주현과 시선이 마주치곤 놀란 듯 한 걸음 물러섰다.
“뭐, 뭘 봐?”
“약한 주제에 자존심은 세고, 사람은 싫지만 사랑받고는 싶고. 살기 피곤하겠어.”
찬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순간 두려움마저 잊었는지 두 눈에 살의가 가득했다. 정곡을 찔린 사람 특유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주현은 어떠한 동정심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폭주 에스퍼 주제에 뭘 안다고 멋대로 떠들어?”
화가 날 만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주현은 찬휘가 싫었다. 꽃처럼 피어난 동족 혐오는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서 타인의 무관심을 적의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꼭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고 더 나은 사람이 됐냐 묻는다면 대답하지 못할 폭주 에스퍼가 좁은 시야를 더욱 좁히며 눈앞의 지저분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딴 건 몰라도 네 열등감이 얼마나 큰지는 알아. 남을 깎아내려야만 네가 잘나져?”
“아무것도 모르면 닥쳐!”
찬휘의 악에 받친 고함에 저 멀리서 이름 모를 괴물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멍청하고, 이기적이고, 마침내 인생에 행복이 찾아왔다고 믿었던 열네 살의 신주현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다.
웃기지도 않은 화풀이라는 건 주현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애만 없었다면 세상은 훨씬 더 살기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그럴 때마다 숨쉬기가 버거워서.
간신히 묻어 둔 채 살고 있었는데 왜 최근 들어 자꾸만 11년 전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는 스스로가 미워서 잠 못 드는 밤이 요즘 눈에 띄게 늘어났다.
“에스퍼로 태어난 것도 열받는데, 하필이면 능력도 허접해서, 평생 그저 그런 인간 취급받는 게 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고! 난 훨씬 대단한 사람인데!”
“그럼 능력 없이 싸워 볼까?”
사위가 조용해졌다.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B급 에스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주현이 한 걸음 다가가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누구 하나 뒈질 때까지 개싸움 한번 해 봐? 능력 따위 하나도 안 쓰고 주먹으로만 해 보자. 그럼 공평하겠네.”
“윽…….”
“그렇게 하기엔 타고난 힘 차이가 불공평해? 아니면 경험? 어떻게 해 줘야 만족하는데?”
그래, 신주현.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말만 그럴싸하지 정작 스스로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병신. 차인호를 사랑해? 그럼 거절은 왜 해? 미움받고 싶지 않아? 그래서 네가 구제 불능 쓰레기라는 거야.
다가와 주지 않는다 원망해 놓고 정작 손 내미니까 무섭다며 물러선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사랑받고 싶으면 그럴 만한 행동을 해. 그러기 싫으면 욕심이라도 부리지 마.”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는 그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주먹을 꾹 쥐고 떨던 찬휘가 입을 벌린 그때, 떼를 지은 쥐를 닮은 괴물이 오른쪽에서 나타나 두 사람을 가로지르며 지나갔다. 공격하려는 낌새는 없었다. 오히려 부딪히지 않기 위해 피하며 필사적으로 달려 나갈 뿐이었다.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검붉은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찬휘는 자신에게 뻗어지는 손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평소 가이드만큼이나 후방에서 임무를 수행했던 터라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응할 수 없었다.
“크윽!”
찬휘는 강하게 잡아당겨져 다시 한번 바닥을 나뒹굴었다. 다만 이번에는 재빠르게 일어나서 폭주 에스퍼에게 화내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재수 없는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도 모를 거대한 식물만이 있을 뿐이었다.
식물은 파리지옥을 닮았는데, 꽉 다물린 틈새로 흉터 가득한 손이 삐죽 나와 있었다. 조금 전에 찬휘를 쓰레기처럼 바닥으로 내던진 바로 그 손이었다. B급 에스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 *
[‘DS-17-9’는 게이트 ‘DS-17’에서 출몰하는 옐로급 괴물 중 하나다.
해당 괴물은 약 3M 길이의 식물형 괴물로, 검은 몸체에 푸른 점박이가 있는 게 특징이다. ‘DS-17-9’는 몸을 숨긴 채로 다가가 사냥감을 한입에 삼키는데, 이때 사냥감을 곧바로 소화하지 않고 자체적인 기술로 사냥감의 기억을 읽는다.
이렇게 사냥감의 은신처와 동료가 있는 위치를 알아냄으로써 사냥감을 찾아 이동하느라 쓰일 에너지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해당 괴물에게 삼켜진 적 있는 에스퍼 A의 말에 따르면 ‘DS-17-9’이 기억을 읽음에 따라 잊고 있던 과거가 강제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다고 한다.
하여, 게이트 바이오 연구 부서에서 ‘DS-17-9’을 이용해 기억 장애 환자를 치료하려던 시도가 있었고, 이는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52%의 참여자가 단시간에 괴물의 배 속에서 소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DS-17-9’이 지구 환경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폐사했다는 점으로 보아 실현 가능성은 현저히 낮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대외비 실험 파일 中]
* * *
온통 머릿속이 하얬다. 주현은 누군가가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감촉에 취해 몸에서 힘을 뺐다. 팔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음에도 불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옅고 느리게 폐를 스치는 공기가 어쩐지 달콤했다. 다시금 따뜻하고 미끄러운 무언가가 안대로 덮인 눈과 그 위의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어쩐지 서늘한 바람이 느껴지는 오른손을 누군가가 건드렸다. 그에 의식이 부상하기 직전, 진정시키듯 다시금 정체 모를 무언가가 이마를 쓰다듬었다. 눈꺼풀 아래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안구가 멈췄고, 더 이상의 반항은 없었다.
* * *
새까만 정글 속, 거대한 식물을 앞에 두고 홀로 남은 찬휘가 바들바들 떨며 헐떡였다. 폭주 에스퍼를 삼킨 괴물은 그대로 멈춰 미동 하나 없었다.
위치를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기척에도 펄쩍 뛰며 움츠러들던 찬휘는 최대한 팔을 뻗어 축 늘어진 주현의 손을 툭툭 쳤다.
“이, 이봐. 신주현, 씨!”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아주 차갑고 생기 없게 느껴지는 손을 잡아당겼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동으로 가볍게 흔들리다 멈춘 손가락의 흉터를 뚫어지게 응시하던 찬휘가 휙 돌아섰다.
주머니에서 탐지기를 꺼내 게이트 위치를 파악한 그가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욱 빠르고 힘차게 나아갔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죽으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고 자기가 실수한 건데 뭐 어떡해? 임무하다 죽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 애초에 폭주 에스퍼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임무는 실패했지만, 그냥, 그냥 돌아가서…….”
중얼중얼 흘러나온 목소리가 땅을 밟는 소리와 섞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옷에 묻은 진흙은 이미 완전히 말라붙어 빨래하기도 쉽지 않을 터다.
‘이건 그냥 옷값 물어 주고 버리자. 이참에 디자인도 바꿔서 새로 주문하지 뭐. 좀 더 화려하게, 아, 날개라도 달까? 따라 하는 걸로 보이려나.’
초조하긴커녕 느긋하다 여겨질 정도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찬휘는 발 앞으로 빠르게 지나간 작은 괴물에 우뚝 멈춰 섰다. 도마뱀을 닮은 괴물은 빠르게 기어가더니 나무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구에선 본 적 없는 작은 벌레들이 주변을 날아다니며 끊임없이 성가시게 했다. 폭주 에스퍼와 함께 걸었을 땐 한 마리도 본 적 없었는데.
따끔한 통증에 손바닥을 들여다보자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폭주 에스퍼에게, 주현에게 밀쳐졌을 때 생긴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