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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109/161)

폭주 에스퍼 98화

흠칫 놀란 찬휘는 그제야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아까는 몰랐는데, 나무 몇 그루가 트럭이 들이받기라도 한 것처럼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대충 살펴본 건 사실이지만, 굳이 콕 집어서 말해 준 게 자존심 상했다.

억지로 웃은 찬휘가 폭주 에스퍼에게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도 알거든요?”

“그러십니까. 사전에 받은 정보에는 그쪽 능력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고 해서 혹시나 말한 겁니다.”

폭주 에스퍼가 아는지는 모르겠으나, 능력 이야기는 찬휘의 역린과도 같았다.

그의 능력은 ‘Float’로, 건드린 물건을 떠오르게 할 수 있었다. B급이라 너무 무거운 건 불가능한데다 무조건 닿아야 하고, 동시에 네 개 이상은 안 된다는 제약이 있어 썩 쓸 만한 능력은 아니었다.

“허접한 능력이라 죄송하네요. 그래도 전 폭주는 안 했는데요.”

약점을 찔렸다고 생각한 순간, 상대의 단점을 건드는 건 나쁜 버릇이라고 아영이 말했던 게 문득 떠올랐다. 그러나 말은 이미 뱉었고, 사실 후회하지도 않았다. 찬휘가 거만스레 턱을 들었다.

왼쪽에 있던 찬휘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폭주 에스퍼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다시금 앞을 응시했다.

“보면 압니다.”

관심 없다는 목소리였다. 찬휘는 이젠 폭주 에스퍼에게까지 무시 받는 처지가 된 것 같아 표정 관리조차 못 하고 팍 인상을 썼다. 증오가 가득 밴 얼굴이 카메라에 담겼다.

“그 눈은 왜 그래요?”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지만, 분명 주현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드디어 얻은 반응에 찬휘는 활짝 웃으며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아, 알겠다. 매칭 가이드가 가이딩 제대로 안 해 줬구나? 하긴, 폭주 에스퍼한테 누가 가이딩해 주겠어요? 천하의 차인호라도 그건 힘들지. 계약해 주는 대가로 돈 얼마나 받았어요? 대스타시니까 꽤 많이 줬겠는데.”

“저기요.”

주현이 멈춰 섰다. 드디어.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물러서지 않은 찬휘는 싸늘한 시선에 떨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상대는 인상을 쓰지도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만난 순간부터 내내 멍했던 눈이 마치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 엄청난 변화에 절로 몸이 덜덜 떨렸다.

“상대 봐 가면서 짖으라는 말 들은 적 없습니까?”

“뭐?”

“없다면 제가 해 줄게요.”

콰직! 검은 나무 틈새에서 불쑥 튀어나온 괴물이 보이지 않는 공격에 내장을 쏟아 내며 죽었다. 소리도 없이 뒤에서 습격한 건데 어떻게 알고 죽였나, 하는 놀라움보다 가까이 다가온 폭주 에스퍼의 오묘한 눈동자에 숨조차 못 쉬고 짓밟히는 감각이 훨씬 더 컸다.

“내 가이드에 대해 한마디만 더 하면, 너도 같은 꼴로 만들 거야.”

같은 꼴이라는 게 주현의 왼쪽 눈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널브러진 사체를 말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두려움을 견디고자 찬휘는 주먹을 꽉 쥐며 힘껏 주현을 노려보았다. 그는 결코 커다란 괴물을 보지도 않고 터뜨릴 수 없다거나, 애초에 죽이기도 힘들다거나, 그런 건 억지로라도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가진 유일한 패를 내보였다.

“나, 날 건드리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 몰라?!”

“폭주 에스퍼가 그딴 거 신경 쓰겠어? 내가 너처럼 인기 많은 연예인인 것도 아닌데.”

더 할 말 없다는 듯 휙 돌아선 주현이 다시금 길 같지도 않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홀로 남겨진 찬휘는 얼빠진 얼굴로 입을 벌린 채 굳어 있다가 황급히 정신 차리곤 주현을 뒤따라 뛰었다.

‘인기 많은 연예인. 누가? 내가. 인기, 많은, 연예인.’

찬휘는 처음 만난 사이면서 마음대로 말을 놓은 주현에게 따질 생각조차 못 하고 시큰둥한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주현에게 진짜 인기 많은 연예인은 당신의 잘난 가이드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묘하게 커진 눈으로 외쳤다.

“인기 많은 연예인 털끝 하나라도 다치면 당신 큰일 난다고. 알기나 해?”

“시끄럽게 굴지 말고 닥쳐.”

“누구한테 욕질이야?”

주현은 그를 무시하며 앞을 가로막은 바위를 능력을 사용해 옆으로 치웠다.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고 외치려던 찬휘는 괜히 더 꼴이 우스워질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잠시, 찬휘는 여전히 일정한 거리에서 따라오고 있는 카메라를 흘긋하곤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가늘게 떨렸으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이미 폭주 에스퍼와 임무에 간다고 이야기가 퍼진 이상, 어떻게든 영상 분량은 채워야 했다. 한창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만큼 소속사 또한 이번 임무를 위해 협회에 대단한 뒷돈을 줬을 터. 그중 일정 비율은 눈앞의 폭주 에스퍼에게 돌아갔으리라.

‘그렇다면 내가 머뭇거릴 이유는 없지.’

받은 만큼 일하는 건 당연한 상식이다. 늘 하는 것처럼 얼굴에 철판을 깐 그가 폭주 에스퍼에게 말을 걸었다. 카메라의 불빛이 빨갛게 빛났다.

* * *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죠.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그러니까 아무 말도 못 하더라고요. 저 그런 거 못 참거든요. 다른 사람 함부로 대하는 거.”

“아, 네.”

“참, 혹시 S급 에스퍼 윤가람 씨라고 아세요? 제가 그분이랑 꽤 친한데, 사실 가람 씨 금발 염색이래요. 저희끼리의 비밀. 알죠? 앗, 땃휘분들도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 쉿!”

“…….”

“저번에 한 임무에서…….”

주현은 오랜만에 지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는 단연 쉬지 않고 떠드는 에스퍼 때문이다.

일반인이나 가이드도 아니고 에스퍼 호위 임무를 맡은 것부터 기분 나쁜데 자꾸만 조잘거려서 안 그래도 눈 때문에 아픈데 두통까지 심해졌다.

그러나 주현은 혼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며 그를 두고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협회의 임무는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할 사항이고, 설령 죽는 한이 있다고 해도, 협회는, 협회에 충성을, 언제나…….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주현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여전히 종종 둔해지는 사고가 언제쯤 완벽히 돌아올지 알고 싶었다.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며 분홍색 이끼로 뒤덮인 나무줄기를 뛰어넘자 화려한 피부의 작은 괴물이 긴 꼬리를 흔들며 도망쳤다. 그러곤 검은 나무에 딱 달라붙더니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완벽한 위장이었다.

주현은 질척한 땅을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물들이 온통 까매서 참으로 우중충했으나, 그 부분만 빼면 지구 환경과 제법 흡사했다. 괴물도 무지막지하게 크거나 심한 거부감을 주는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 뭐 있어요?”

뒤따라온 찬휘가 얌전한 말투로 물었다. 그의 옆을 둥둥 떠다니는 카메라를 잠시 본 주현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 저었다.

임무를 받을 당시, 태석은 그에게 찬휘의 개인 채널에 올라갈 영상을 찍을 거라고 말했었다. 다만 말 그대로 함께 일하는 동료1의 포지션이기에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기껏 만든 이미지를 무너뜨리지 마라. 악의적으로 편집조차 할 수 없게 똑바로 행동해.’

당시 주현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기에 태석이 그 말을 하며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왼눈을 잃은 후로 그는 태석의 얼굴을 올곧게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 눈 하나를 잃은 건 분명 큰 손실이고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그렇다고 본능적인 차원에서 겁먹을 정도는 아니다. 기억나지 않는 3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떠올리려 할수록 두개골 안쪽의 지끈거림이 커졌다. 아릿한 통증을 참기 위해 심호흡을 한 주현이 걸음을 재촉했다.

‘그나저나 이미지 관리는 아까 위협했던 일로 박살 났을 텐데…….’

확신하는 주현과 달리 정작 당사자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어떻게든 폭주 에스퍼를 화면에 많이 담으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이번 임무는 길어지겠다는 예감이 드네요. 그래도 걱정하지는 마세요! 캠핑에 필요한 물건이라면 든든하게 챙겨 왔으니까요.”

주현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찬휘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찬휘의 가방은 침낭이 들어가기엔 너무 작고, 주현이 가진 건 한 명 분량밖에 없다. 저 망할 놈이 침낭에서 편히 자는 동안 주현은 뜬눈으로 밤새 그를 지켜야 한다.

임무 한 번 엿 같다고 생각하며 넝쿨을 헤친 순간이었다. 찬휘가 밝은 얼굴로 주현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주현 씨, 저희 땃휘분들에게 한마디 해 주세요. 다들 기대하고 계시거든요.”

보지 않아도 자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딴 걸 왜 하냐고 소리치기에는 태석의 경고가 마음에 걸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상황에서 난동을 부리면 피해자 장찬휘와 싸가지 없는 신주현으로 영상이 올라갈 게 분명했다.

애써 스스로를 다독인 주현이 유일하게 친분 있는 연예인을 떠올렸다. TV 속 차인호도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었다. 슬며시 미소 짓는 아름다운 얼굴을, 아니, 듣기 좋은 목소리를 잠시 생각하던 주현이 입을 열었다.

“딱히분들-”

“딱히가 아니라 땃휘인데요.”

“……땃휘분들, 항상, 숙여.”

“그게 무슨- 억!”

주현은 찬휘를 밀어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그가 있던 위치로 휙 지나간 괴물은 독수리와 사마귀를 합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게이트 DS-17의 보고서에 적혀 있던 괴물. 등급은 기껏해야 그린으로, 밑에서 세 번째인 만큼 그다지 강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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