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97화
“가서 잘해. 쥐여 준 돈이 얼만데, 본전은 뽑아야지. 망치면 진짜 가만 안 둬.”
“아, 알았다고! 알았다는데 왜 자꾸 그래?”
“네가 또 성질부리다 말아먹을까 봐 그런다, 왜.”
눈을 크게 뜨며 위협한 아영이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찬휘에게서 멀어졌다. 그들이 있는 곳은 자동차 안이었는데, 밖에는 협회 직원 몇 명과 기묘한 색으로 일렁이는 게이트가 있었다.
게이트의 이름은 DS-17로, 탐사하기에 적당했다. 크게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게이트. 그래도 평소 찬휘가 들어가던 곳보다는 제법 난도가 높았다.
폭주 에스퍼를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불퉁하게 내민 찬휘가 아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임무가 정확히 뭐라고?”
“몇 번이나 말했, 하……. 폭주 에스퍼와 함께 게이트에 들어가서 이렇게 생긴 걸 찾아오면 돼.”
아영이 내민 태블릿 화면에는 온갖 색이 다양하게 섞인 투명한 크리스털 같은 게 떠올라 있었다.
“가이드는 누군데. 못해도 A급은 되지?”
“가이드는 없어. 폭주 에스퍼랑 같이 간다는데 어떤 가이드가 따라가겠어?”
“뭐?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그러게 진작 성질 죽이고 매칭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매칭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는 임무에 가기 전, 등급에 나눠 등록된 가이드와 계약을 통해 짝을 맺어 임무지로 향한다. 대부분 협회에서 미리 가이드와 계약 후 임무를 내려 주는데, 찬휘는 연예계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소속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가이드를 찾아왔다.
임무가 끝난 후 어디 가서 장찬휘가 이러더라 저러더라 떠들지 않을 가이드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좁은 틀 안에서 폭주 에스퍼와 함께 임무에 동행할 가이드를 찾는 건 훨씬 더 어려울 게 분명했다.
아영은 더 말하지 않았지만, 찬휘는 어쩐지 그녀가 구태여 내뱉지 않은 말을 알아챘다.
“내 등급이 낮아서 그래? 그 새끼가 폭주하면 난 못 막으니까?”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 가이드들이 그랬을 거 아냐. 내가 그것도 모르는 병신인 줄 알아?”
“장찬휘. 멋대로 생각하고 화내는 거 그만하라고 했지.”
“내가 뭐 틀린 말 했냐고!”
고함이 차내를 울리고 사라졌다. 시근덕거리는 찬휘를 단호하게 응시하던 아영이 미간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지 어려운 임무도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힘들고 위험한 건 폭주 에스퍼가 다 해 줄 거고, 안전장치가 있어서 설령 폭주한다고 해도 네가 다칠 일은 없어.”
매니저인 아영은 비밀 유지 계약서를 작성하고 찬휘의 임무까지 도맡아 관리하는 만큼, 일반인임에도 임무의 난이도 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찬휘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가이드들이 그를 믿지 못하고 임무를 거부한 상황 자체가 심기를 건드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이드 없이 둘이서 임무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자신을 더욱 무시할 것 같아서.
그걸 스스로 털어놓는 것도 싫어 찬휘는 쾅! 조수석을 걷어찬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임무 확인을 위해 대기 중인 협회 직원을 지나친 그는 멀찍이서 홀로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큰 키, 새까만 머리카락, 창백한 얼굴. 그리고…… 까만 안대? 왼눈을 덮은 안대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 신주현이 고개를 들었다. <에스퍼 단합회>에서 만난 적 있지만 멀리서 본 게 다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눈동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진한 붉은색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찬휘가 일부러 어깨를 펴며 눈에 힘을 줬다. 폭주 에스퍼는 아무런 반응 없이 시선을 돌렸다.
‘폭주 에스퍼 주제에 누굴 무시해?’
불쑥 치밀어 오른 생각을 곱씹으며 서 있자니 아영이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등에 멜 수 있는 배낭은 평소 그가 가지고 다니던 것보다 좀 더 컸다.
“임무 관련된 서류랑 필요한 거 이것저것 넣었어. 특히 서류는 꼭 읽어. 가이딩 약물도 있으니까 부족하다 싶으면 쓰고.”
‘가이딩 약물’을 말할 때 일부러 목소리를 죽인 아영이 가방을 찬휘의 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며 조금 더 가까워지자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폭주 에스퍼랑 최대한 엮여. 하다못해 많이 찍기라도 해.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나도 알아.”
허공을 노려보며 대답한 찬휘는 어깨를 두드리는 아영의 손을 티 나지 않게 떨쳐 냈다.
협회 직원에게 확인받은 후 본격적인 임무가 시작되었다. 찬휘는 익숙하게 카메라를 들고 자신을 찍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밥은 먹었어요? 전 든든하게 먹고 나왔어요! 여기는, 짜잔! 게이트 들어가기 전 마지막 점검하는 곳! 이제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찬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휙 고개 돌려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폭주 에스퍼와 눈을 맞춘 후 애써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제 개인 채널에 올릴 영상 찍고 있어요. 팬분들이 좋아하시거든요.”
“임무 내용 유출은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아……. 적당히 편집해서 올리니까 괜찮아요.”
“협회에 피해 가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네, 네. 그래야죠.”
말을 마친 주현이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시무룩하고 우울한 분위기 그대로 멍하니 서 있는 게 어쩐지 짜증 났다. 사실 첫 만남부터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서 더욱 그리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반가워요! 장찬휘라고 합니다. 편하게 불러 주세요. 신주현 씨 맞죠?’
살갑게 말을 걸었음에도 돌아오는 건 가벼운 고갯짓이 끝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열받는 행태에 남몰래 주현을 노려보던 찬휘가 헛기침을 하곤 다시금 녹화를 시작했다.
“오늘은 폭주 에스퍼 신주현 씨와 둘이서 데이트하기로 했어요. 가이드는 어딨냐고요? 혹시 모를 위험에 제가 오지 말라고-”
“임무가 왜 데이트입니까?”
“……그냥 재미있게 말한 거예요.”
“그게 재밌습니까?”
폭주 에스퍼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높낮이 없는 어조로 물었다. 차라리 대놓고 비꼰다면 슬픈 척이라도 하겠는데, 순진함을 연기하며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체리 같은 눈을 마주 보던 찬휘가 슬쩍 몸을 물리며 대답했다.
“이왕이면 친해 보이는 게 낫잖아요.”
‘화제성을 위해서.’
뒷말을 꿀꺽 삼킨 찬휘가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미묘하게 고개를 갸웃한 주현은 별다른 대답 없이 입을 다물었다. 아직 임무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열받는 일투성이였다.
카메라를 꽉 움켜쥔 찬휘는 애써 심호흡을 했다. 방송국이나 다른 임무에서는 훨씬 모욕적인 말도 많이 들었다. 이제 와 이딴 폭주 에스퍼 한 명에게 휘둘릴 필요는 없다. 굳게 다짐한 B급 에스퍼가 남몰래 게이트를 노려보았다.
* * *
게이트에 들어서고 10분, 찬휘는 자신보다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와 결코 친해질 수 없다는 걸 확신했다.
‘저희 예전에 만난 적 있다는 거 아세요? <에스퍼 단합회>에 저도 나갔거든요.’
‘그런가요.’
어떤 주제를 꺼내든 돌아오는 건 쌀쌀맞은 단답뿐이었다.
‘그 스카프 안 더우세요?’
‘딱히…….’
심지어 나중에는 그것마저도 점점 말끝이 흐려지며 더 짧아졌다.
‘에스퍼와 둘이서만 임무하는 건 처음이네요.’
‘…….’
협회에 피해 어쩌고저쩌고할 때는 잘만 떠들었으면서 조금만 사적인 대화로 이어 가려 하면 귀신같이 입을 다물었다. 눈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가,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동안에다 귀여운 인상인 찬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날카롭고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이라 더더욱 화가 났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듬직한 등판을 보며 이를 갈던 찬휘는 힐끗 옆을 떠다니는 카메라를 살폈다.
찬휘의 능력으로 허공에 떠 있는 카메라는 능숙하게 두 사람을 찍고 있었다. 그다지 큰 힘을 쓴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가이드가 곁에 없다는 불안감은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정작 폭주 에스퍼는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는 사실이 더욱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애써 표정을 갈무리한 찬휘가 수백 번을 연습한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주현을 향해 뛰어갔다.
“그런데, 방송에서 봤던 거랑 느낌이 상당히 다르시네요?”
크고 밝은 목소리로 외친 거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터다. 일부러 카메라를 옮겨 주현의 얼굴을 담은 찬휘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혹은 아무 생각 없는 건지 같은 표정으로 걷던 주현이 느릿하게 손을 들어 안대 위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후유증이 남아서……. 저도 제가 이상하다는 거 압니다. 그런 거 느낄 때마다, 한 번씩…… 죽고 싶어요.”
생각보다 훨씬 더 묵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찬휘는 숨 쉬는 쓰레기가 된 기분으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부츠에 묻은 진흙을 털어 내고자 바닥에 문지른 찬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DS-17은 정글형 게이트였다. 습기 가득한 공기와 사방을 둘러싼 검은색 나무를 짜증스레 보던 그가 그새 거리가 벌어진 주현을 향해 잽싸게 뛰어갔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폭주 에스퍼뿐이라는 사실에 입안이 썼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찬휘가 검은 안대를 바라볼 때였다.
“근처에 괴물이 있습니다. 몸 사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