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104/161)

폭주 에스퍼 94화

무언가 떠오를 듯하면서도 금세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머리가 불만스러웠으나, 주현은 어떻게 해야 고쳐지는지 모른다. 불만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이던 그는 문득 품속에서 담배를 찾았다.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담배는 그렇다 쳐도 라이터는? 주현은 몇 분 만에야 라이터를 베개 밑에 숨겨 둔다는 걸 떠올렸다. 아까 옷을 입으며 챙기지 않았으니 없는 게 당연했다.

이유 모를 안도가 가슴을 스쳤다. 성냥을 많이 가지고 있는 그가 왜 라이터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는지, 그는 모른다.

사실 주현은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머리가 아팠다. 눈도 아프고, 가슴도 아팠다. 어쩐지 가늘어진 손으로 팔뚝을 문지르며 고개 숙이자 조금 나아지는 듯도 했다. 아닐 수도 있고.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를 기다리게 한 사람은 머리카락이 어느 정도 말랐을 때쯤에 왔다. 등 뒤의 문이 벌컥 열리고는 빠르면서도 일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받는 가이딩인데 두 번이나 건너뛰다니, 제정신입니까? 아무리…….”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주현의 옆에 선 남자는 눈을 부릅뜬 채 그를 올곧게 응시했다. 주현은 차인호의 숨이 짧게 멈췄다가 떨림과 함께 새어 나오는 걸 들었다.

가이드의 손은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마치 주현이 산들바람에도 날아가 버리는 민들레 홀씨라도 되는 양. 볼을 감싸곤 거즈 위를 쓰다듬는 손가락이 무척 따뜻했다. 심지어는 덜덜 떨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두꺼운 거즈 밑으로 기어들었다. 작은 따끔거림과 함께 테이프가 떨어졌고, 이내 답답하던 눈가가 가벼워졌다. 두 눈을 떴으나 여전히 세상의 절반은 어두웠다.

“괜찮아요.”

차인호가 울먹인다. 주현은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 지금은 어둠만을 비추는 눈이 마지막까지 생각했던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억누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

“괜찮, 괜찮을, 리가…….”

주현은 차인호가 우는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다. 도구는 감정을 느낄 필요 없다고 했는데.

문득 차인호가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영상 속에서 주현을 끌어안고 우는 걸 본 적 있으나 눈앞에서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첫 번째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젖어 들고 이슬 같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예쁜 손가락이 눈꺼풀과 그 아래 속눈썹을 매만졌다. 가이딩은 효과 없었다. 그야 이미 아문 상처에는 통하지 않으니까.

“흐, 으…….”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차인호는 우는 것조차 예뻤다. 그러나 주현이 생각하기에 차인호는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게 훨씬 더 보기 좋았다. 그래서 그의 눈물을 멈추고 싶었지만, 주현은 그 방법을 몰랐다.

멍청하고 쓸모없는 폭주 에스퍼는 가이드의 얼굴을 적시는 눈물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멍한 머리로 한참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그는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어디 다쳤습니까?”

“……네?”

“어디 다쳐서, 아파서 우는 겁니까? 그렇다면 병원에 가셔야죠.”

차인호는 마치 주현이 이상한 말을 했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여전히 부드러운 손은 그의 왼쪽 볼과 눈가를 스쳤고, 밀려오는 따뜻한 가이딩에 평생 이대로 있고 싶었으나 그건 안 될 일이다. 세상 그 어떤 성인도 주현 같은 구제 불능 쓰레기의 곁에 있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차인호의 눈물이 멈췄다. 그렇지만 미소는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딱딱하게 굳어선 두려워 보이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주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왜…… 우는 것 같아요?”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 안 좋은 일이 뭐 같은데요?”

차인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안 좋은 일. 엄마의 얼굴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 뒤를 다양한 사람이 이었고, 가늘게 헐떡이던 주현은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차였다거나.”

문득 SS급 가이드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차인호가 신주현의 매칭 가이드라서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말. 이번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차인호는 남은 손도 뻗어서 주현의 얼굴을 감쌌다. 부드럽고 느릿한 손길이 간지럽게 살갗을 스쳤다. 따스한 온기에 절로 눈이 감겼다.

“제가 고작 그런 일로 울 것 같아요?”

아이를 어르듯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주현은 녹이 슨 것처럼 원활하게 돌지 않는 사고를 애써 굴렸다. 누군가에게 차이고 서럽게 우는 차인호. 상상해 보려 해도 희미한 이미지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주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전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나서 우는 걸까요?”

“엄마가, 사랑해 주지 않아서?”

“……이미 극복한 일이에요.”

“고양이가 도망가서?”

“비슷하지만 달라요.”

“옷이 더러워서?”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배가 고파서?”

“전, 저는…….”

차인호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주현을 끌어안으며 울었다. 커다랗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며 그를 강하게 끌어안은 팔이 너무나도 좋아서 주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힘없는 몸에 가이딩이 흘러들어 왔다. 차인호를 꼭 닮은 적당하고 따뜻한, 완벽한 가이딩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차인호는 일하는 중이다. 그리 생각하면 조금은 덜 죄스럽게 느껴졌다.

“가족을 죽여서?”

거의 숨소리만으로 속삭인 목소리를 차인호가 들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등을 감싼 팔의 힘이 조금 더 강해졌을 뿐이다.

“보고 싶은데 만날 수 없어서?”

“…….”

“죽고 싶어서?”

어디를 봐도 세상은 여전히 절반밖에 없다. 아릿한 통증과 달콤한 가이딩이 뒤섞인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주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간신히 차인호의 옷자락을 손끝으로 쥐었다. 그것만으로 좀 더 숨쉬기가 편했는데, 동시에 그것만으로 좀 더 죄가 늘어난 기분이었다.

“주현 씨는 그래서 울었, 어요?”

사랑받지 못해서, 나비가 도망가서, 옷이 더러워서, 배고파서, 가족을 죽여서, 만날 수 없어서, 죽고 싶어서. 그래서 주현은 울었나? 그게 울음의 이유였을까?

생각이 뚝뚝 끊어지는 머리는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주현은 대신 미약하게 남은 자존심을 앞으로 내세웠다.

“전 안 울어요.”

툭 내뱉은 목소리에는 어떠한 열의도 없었다.

조금 더 커진 훌쩍임과 함께, 차인호가 포옹을 끝냈다. 그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전에 고운 입술이 왼쪽 눈가에 닿았다. 뒤통수를 감싸는 손은 떨고 있었고, 식어 버린 눈물이 볼에 닿아 간지러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현은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상해진 거리감 때문에 차인호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손 뻗으면 닿을 듯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도 멀어 보였다.

망설임 끝에 옷자락을 놓은 손이 무릎 위로 추락한 순간이었다. 입술을 떼어 낸 차인호가 물었다.

“이거 누가 그랬어요?”

“……말할 수 없습니다.”

“왜 다쳤어요?”

“합당한 처벌을 받았을 뿐입니다.”

“처벌?”

주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협회를 곤란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토록 커다란 자비를 내려 준 협회에 충성을 바치는 건 목숨을 구원받은 자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멋대로 흘러가는 사고를 붙잡지 못한 채 멍하게 앉아 있던 주현을 깨운 건 차인호의 목소리였다.

“무슨 죄를 지어야 사람 눈을 이렇게 만들어 놔요?”

“라, 아……. 라연이가, 생각나서.”

차인호가 눈을 부릅떴다. 그걸 알아채지 못한 주현은 손톱을 세워 팔뚝을 긁어내렸다. 한곳에 고정하지 못하고 자꾸만 허공을 맴도는 시야로 회색빛 가이딩 룸의 구석구석이 들어찼다. 금이 간 벽, 커다란 침대, 창틀에 쌓인 먼지, 동그란 테이블, 차인호의 가슴팍.

‘그러고 보니 라연이는 지금쯤 어디 있을까? 무사히 보육원으로 돌아갔나? 원장 선생님이 걱정하실 텐데.’

생각을 끝낸 주현은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라연이도 원장 선생님도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 왜 이런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주현이 죽였는데.

폭주. 그는 폭주했고, 소중한 사람들을 죽인 나쁜 범죄자고, 사랑받지 못하도록 태어난 이상 그렇게 살다 죽어야 한다.

‘[사랑해요.]’

꿈인지 환영인지. 구분할 수 없는 허상에서 본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눈의 신주현과 화사하게 웃는 차인호. 백일몽. 꿈에서나 겨우 만날 수 있는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

폭주 에스퍼의 입꼬리가 밀려 올라갔다. 근육의 움직임 때문인지 왼쪽 눈의 상처가 욱신거리더니 뜨끈한 액체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여전히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주현은 자신이 정말로 미쳐 버렸다는 걸 알았다. 정상적인 사람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잘은 몰라도 제정신을 가진 보통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마저 탐욕을 부리지 않을 터다.

창백하고 흉터 가득한 손이 차인호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놀라는 게 느껴졌다. 반쪽짜리 시야로 눈물 나게 아름다운 얼굴을 들여다보며 폭주 에스퍼가 속삭였다.

“일, 하셔야죠.”

볼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 매달려 있다 톡 떨어진 액체는 조금 따뜻하고 약간 끈적였다. 색은 보지 못했다. 다가온 키스에 모든 정신을 빼앗긴 까닭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