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93화
너무나도 오랜만에 뱉어 보는 단어였다. 혀가 움직이는 게 어색할 정도로 간신히 흘러나온 목소리는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눈앞에는 주현의 엄마가 있었다. 정수연. 길지도 짧지도 않은 머리카락이 어깨 근처에서 흔들리고, 주현과 닮은 눈이 무감정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주현은 태석이 말한 ‘다른 방식’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대상자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방향이다. 악질적이지만 그만큼 효과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태석에게는 안타깝지만 주현은 매일 밤 악몽을 꾼다. 그곳에 나오는 사람은 다양한데, 엄마는 단골 배우였다. 다시 말해 눈앞의 환영이 어떤 폭언을 쏟아 낸다 해도 아프긴 하겠지만 견딜 수 있다는 뜻이다.
주현은 싸늘한 말을 기대하며 11년 전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엄마가 웃었다.
[주현아. 내 아들. 오늘 저녁은 뭐 먹고 싶니?]
아.
[이따 아빠 오면 같이 놀러 가자고 할까?]
“그만해.”
[내 자랑스러운 아들.]
“그만…….”
[엄마가 주현이 사랑하는 거 알고 있지?]
가늘게 떨며 달싹이던 입술은 이내 아무 말도 뱉어 내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주현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희게 질려선 가쁜 숨을 내쉬었다.
환영 속의 엄마가 본 적 없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가느다란 손을 뻗었다. 볼을 스치는 손길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눈앞에서 펼쳐지는 게 허상이라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너를 가장 사랑해.]
주현은 그의 얼굴에 피어나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목구멍 아래에서 기어 올라온 숨결은 짧고 끊어지는 웃음으로 변했다.
생각보다 더 질이 나쁘다. 벌써 죽을 것 같았는데 아직 ‘교육’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절망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엄마의 온기와 함께 밀려왔다.
“재미있는 걸 보고 있는 모양이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태석의 군화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어릴 때부터 이어진 폭력 때문에 주현은 등 뒤에 누군가가 서는 걸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그러나 주현은 태석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엄마는 눈앞에서 웃으며 주현이 늘 원했으나 한 번도 주지 않았던 애정을 내밀고 있었으므로.
[널 낳아서 다행이야.]
“Daydream. 대상자가 바라지만 결코 얻을 수 없는 걸 보여 주는 능력이지. 꽤 특이한 능력이지 않나?”
[주현아, 사랑해.]
볼을 타고 뜨거운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피인지 눈물인지, 그런 것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주현은 울음을 터뜨렸다. 가진 거라곤 자존심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만을 끌어안고 살아온 남자는 유일하게 가진 것마저 빼앗긴 채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고개 숙인 주현을 엄마가 끌어안았다. 묶인 몸을 최대한 움직여 벗어나려 했으나 그를 감싼 팔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콧속을 누비는 아늑한 향이 진짜 엄마의 향기인지 모른다. 그녀에게 안겨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엄마에게서 사랑받은 적 없기 때문에, 웃기지도 않은 능력에 등장할 정도로 이것을 바랐기 때문에, 그러나 영원히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럼, 악몽을 즐겨라.”
주현은 헐떡이느라 태석이 구석에 있던 카메라를 켜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의자에 묶인 주현의 앞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왔다. 새아빠는 머쓱하게 어깨를 두드렸고 초등학교 때 담임은 그를 자랑스러운 제자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주현에게 손을 뻗었으며 온 세상이 선의와 사탕 조각 따위로 가득 차 있었다.
담쟁이가 눈에 띄는 <동백 보호소>의 외벽은 고고히 서 있으며 누구도 죽지 않았다. 모두가 살아서, 행복하게. 순진하게 빛나는 어린 얼굴이 눈부셨다.
그의 눈은 이제 하나밖에 없음에도 이 찬란한 세상은 갈라지지 않고 온전했다.
[야아, 같이 가!]
민재가 옆을 지나쳐 뛰어갔고 그 뒤를 은비가 따랐다. 널따란 잔디밭은 조용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동백 보호소> 식구들이 자주 나들이 가던 장소였다.
서로를 좋아하는 석규와 은하가 나무 아래에 나란히 앉아 웃고, 혜린은 라연이를 안고 어린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다. 체크무늬 노란색 돗자리에 난 작은 구멍까지 또렷했다.
[거기 서서 뭐 해?]
다정한 물음에 천천히 고개 들자 온 얼굴을 붕대로 감싼 소년이 주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감히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런 주현을 일깨운 건 뒤쪽에서 들려온 화난 목소리였다.
[신주현! 너 감기 기운 있으니까 겉옷 입으라고 했잖아!]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은 거친 듯하면서도 아프지 않았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으나 이상하게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익숙한 걸 넘어서 상당히 가까운 사람이라고 본능이 외쳤음에도.
주현이 돌아보려던 그때, 연우가 다가왔다.
[하하, 너무 화내지 마.]
어깨를 잡는 손은 지독히도 따스했다. 지금 그의 몸에는 맞지 않을 겉옷이 약간의 품을 남긴 채 몸을 감쌌다.
주현은 울음소리를 참으려 하지만 벌려진 입에서 억눌린 절망이 새어 나간다.
그는 단지 그의 엄마가, 새아빠가, 선생님이, 하경이, 연우가, 그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은 결국 그를 떠나고, 떠났고, 떠날 것이며 첫 숨을 들이쉬기도 전에 아비를 죽인 저주받은 운명은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결코 떨어지지 않고 더운 숨을 흘리며 날카로운 이로 호시탐탐 그를 삼키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망가져 가는 게 느껴진다. 눈앞의 행복이 하나도 남김없이 산산이 조각 난 건 오로지 그의 잘못이다. 신주현이 태어났기 때문에 사라진 행복이자, 그로 인해 발생한 불행이다.
“넌 쓸모없는 쓰레기다. 그런 주제에 살아 있는 건 오직 협회의 자비 덕분이지.”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악마처럼 낮고 진실되게 들렸다. 이미 환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주현은 동의도 반박도 하지 못했다.
“너 같은 버러지도 좋은 일에 사용해 주는 걸 감사하게 여겨라.”
좋은 일. 좋은 일이 뭐지? 멍하게 되뇌던 주현의 눈앞에 숨 막히게 아름다운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차인호는 미간을 찌푸리지도 질린다는 듯 표정을 구기지도 않고 꽃처럼 예쁘게 웃었다.
[당신이 제 매칭 에스퍼라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차인호가 누군가를 끌어안았다. 그 앞에 서 있는 건 익숙하면서도 지독하게 낯선 남자였다. 검은 눈의 신주현은 저렇게 생겼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해요.]
완벽히 패배한 주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온 얼굴이 눈물과 피로 젖었음에도, 아직 환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와줘…….”
작은 속삭임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허공으로 사라졌다.
* * *
그는 자신이 언제부터 샤워기 아래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무척 차갑고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분명 그의 몸이건만 어딘가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주먹 쥐었다 펴길 반복하던 그는 손톱 밑을 물들인 적갈색 자국을 멀거니 응시했다.
잘 돌아가지 않는 뇌를 가만히 둔 채 습관만으로 몸을 씻고, 아까부터 아프던 눈을 매만졌다. 까슬까슬한 무언가가 손끝에 닿았다. 아마도 거즈나 붕대.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남자가 샤워를 마쳤다. 화장실은 낡고 좁았으나 아주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흉터로 뒤덮인 몸을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고, 좁은 시야에 반 이상 깨져 버린 거울이 들어왔다.
거울 속 남자는 시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즈로 뒤덮인 왼쪽 눈, 마른 볼, 창백한 피부, 미동 없는 표정. 산소에 닿아 끈적해진 피처럼 검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남자는 퍼뜩 이름을 떠올렸다.
신주현. 그는 신주현이었다. 그리고 모든 기억이 훅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은 주현, 신주현이고 올해로 스물다섯 살이다. 목줄을 찬 폭주 에스퍼이자 C동의 일원이고, 붕대 아래의 왼쪽 눈은 다시는 뜨지 못한다. 눈을 다친 이유는 명령 불복종으로 인한 처벌이며, 목숨을 앗아 가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는 협회의, 협회의 자비와 동정과…… 그 아래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주현은 언제나, 그와 같은 버러지는, 감사, 은혜를, 쓸모없는 쓰레기가…….
이리저리 기워 누더기처럼 흘러가던 사고는 문밖에서 들려온 쿵쿵 소리에 멈췄다.
“시간 없으니까 얼른 나와!”
화장실 문이 아닌 방문을 두드리는 것이기에 조금 멀게 들렸다.
주현은 서둘러 제복을 입고 문밖으로 나갔다. 짜증 어린 표정의 직원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주현의 머리를 보곤 혀를 찼으나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절반밖에 없는 시야로 똑바로 걷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주현은 동료에게 위치를 알리는 벌처럼 비틀거리며 걸었다. 마지막으로 이 복도를 걸었을 때보다 좀 더 더워진 기분이었다.
쨍쨍한 하늘을 잠시 바라본 주현은 눈이 부셔 금방 고개를 돌렸다. 회색 복도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렸다.
달칵, 가이딩 룸에 주현을 밀어 넣은 직원은 커다란 하품과 함께 문을 닫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이 몇 시인지, 날짜가 언제인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런 걸 알 필요는 없다. 그야 도구란 그저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면 되니까.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